일본의 자네들!
자네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 들이는 순간!
자네들을 짓누르던 모든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침내 심신의 평화가 찾아 올 것입니다!
믿습니까?
huh? w
일본어의 원형은 고대한국어
말은 지배자의 말로 지배된다. 그 좋은 보기로 영어를 들 수 있다. 11세기의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 공은 프랑스 말을 썼다. 영국 왕 윌리엄1세로 즉위한 다음에도 그는 줄곧 프랑스 말을 썼고, 상류 지배층도 덩달아 이를 따랐다. 이후 프랑스 말은 3백년간에 걸쳐 선주민의 언어인 앵글로색슨 말과 섞여 오늘날의 영어가 되었다. 한국말과 일본말은, 프랑스 말과 영국말의 경우보다 더둑 길고 더욱 진한 관계를 지니었다. 고대 한국인은 기원전 3세기 무렵에서 7세기 후반에 걸쳐,우수한 농경문화와 철기문화를 가지고 끊임없이 일본 열도로 이동했다. 그것은 기술 집단을 골고루 데리고 건너간 지배층, 즉 엘리트그룹의 대이동이었다. 일종의 정치망명이다. 부여와 원삼국이 멸망하고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일어났고,고구려,백제,가야가 멸망하고 신라가 나라를 통일하는 흥망성쇠의 소용돌이 가운데, 숱한 상류층은 일본땅으로 잇달아 피신했다. 또한 따뜻하고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는 기후 조건도 전진적인 한국의 조상들을 일본으로 이끌게 했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 고대 한국말은 온통 일본을 휩쓸게 된다. 중세 영국에는 선주민의 언어인 앵글로색슨 말이 엄존했기 때문에 프랑스 말은 이와 융합되는 형식으로 오늘날의 영어를 이룩해 왔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좀 특수하다. 극히 소수의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선주민 자체가 한국계였으므로 각 지방의 한국고대어(고대 방언)가 1천여년에 걸쳐 쌓이고 쌓여서 오늘날 일본말의 뼈대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일본 고대 인류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과 아세아 대륙 및 한반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인구 비율은 원주민1~2, 이주민8~9였다 한다. 이렇게 이룩된 7,8세기의 고대 일본말을’일본식 한국 고대방언’이라 부른다. 일본에는 8세기 초에 간행된 네 가지 고전이 있다. 고대사 책인 ‘일본서기’와 ‘고사기’,’풍토기’외에, 고대한국의 신라 향가와 비슷한 노래 4천5백16수를 모은 ‘만엽집’이 그것이다. 이들 역사서는 한국의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처럼 골격은 한문체로 썼으나 인명,지명,풍속,기수르노래 등은 ‘향찰’로 적었다. ’향찰’이란 한자의 소리와 뜻에서 생기는 ‘소리’로 한국의 고대어를 표기한 借字文이다. 흔히 ‘이두’체라 일컫는다. ’만엽집’도 이 같은 이두체로 되어 있다. 물론 그 표기법은 순수한 한국식 이두체는 아니다. 당시 일본에 유통된 것으로 보이는 다분히 일본식 한자의 소리와 뜻에서 빚어지는 ‘소리’로 한국의 고대어를 표기한 것이다. 이것을 일본 학자들은 그 간 중세 일본어와 현대 일본어의 틀 속에서 해독하려고 무진 애써왔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로 쓰인 것이 중세 및 현대 일본어로 읽힑 리가 없다. 일본인들은 노래를 정체불명의 문장으로 읽어왔고, 그런 것이 옛 노래요 옛말인 줄만 알고 지내왔다. 그러나 고대 한국어로 이것을 읽으면 당시의 정치사가 환히 드러난다. ’만엽집’에 실린 노래의 작자는 태반이 7~8세기의 일본왕이요 왕족이요 고위관리 들이기 때문이다. 노래묶음인 ‘만엽집’과 일본의 정사서인 ‘일본서기’와 비교하여 한국의 고대어를 추적하면 왜곡된 한,일 교류사의 진상이 드러난다. 한국의 고대사 책인 ‘삼국사기’,’삼국유사’와 비교하여 읽으면 더욱 잘 보인다. 동시에 사라진 한국의 숱한 고대어가 재구성되기도 한다. 당시 노래를 읊은 정치 엘리트들만이 아니라, 역사책을 서술한 학자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8세기 초에 나온 일본 고전을 한국언어로 다시 해독해 내야한다. 그리 하여 한국의 고대어를 재구성하고, 한,일고대교류사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
どうせ日本という存在自体が古代の韓国人たちによって設計された集団ではないですか? huh? w
日本のお前たち!
お前たちがこれを認めて受け入れる瞬間!
お前たちを押さえ付けたすべての抑圧とくびきから脱するようになって
遂に心身の平和が尋ねて来るでしょう!
信じますか?
huh? w
日本語の原型は古代韓国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