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의 군사재판으로 홍사익육군 중장을 필두로 148명의 한국인이, 포로 수용소의 감시원으로서의 행동등을 이유로 BC급 전범으로서 유죄판결을 받아 중 23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고 있다.
BC급 전범중에는, 당시 병합 하고 있던 조선의 한국인과 구식민지 출신의·대만인이 있었다.
그 수는, 한국인이 148명, 대만인이 173명이었다.
연합국이, 일본의 전쟁 범죄 중(안)에서도 포로 학대를 특히 중시하고 있던 것(포츠담 선언의 제10항),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의 각지에 설치한 포로 수용소의 감시원에게 한국인·대만인의 군속을 충당한 것, 연합국 각국이 한국인·대만인을, 「적국에 사용된 신민」이라고 봐, 일본인으로서 재판한 것, 상관의 명령에 근거하는 행위에서도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고 한 것이, 많은 한국인·대만인의 전범을 낳은 요인이 되었다.
한국인 전범 148명 가운데, 군인은 3명이었다.
1명은 홍사익중장이며, 2명은 지원병이었다.
이 외, 통역이었던 한국인 16명이 중화 민국의 국민 정부에 의해서 재판해져 중 8명이 사형이 되었다.
남는 129명 전원이, 포로 수용소의 감시원으로서 징용 되어 타이·쟈와·말레이의 포로 수용소에 배속된 군속이다.
한국인에 대해서는 「일반의 일본인보다 키가 크고, 일본의 정규군보다 더 흉포했다」
「체벌에서는, 일본병보다 그들(한국인)을 훨씬 더 무서워했다」
「일본인 전범의 책임을 경감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점령지역에서 가장 미움받은 것은, 요즘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이었다」
등을 시작해 그 흉포성에 대한 증언이 많이 나와 있다.
대만인 군속은, 보르네오 포로 수용소에 배속되었다.오스트레일리아 법정에서 많은 대만인이 전범으로서 재판해져 중 7명이 사형, 84명이 유기금고가 되었다.
戦後の軍事裁判で洪思翊陸軍中将を筆頭に148名の朝鮮人が、捕虜収容所の監視員としての行動などを理由にBC級戦犯として有罪判決を受け、うち23名は絞首刑に処せられている。
BC級戦犯の中には、当時併合していた朝鮮の朝鮮人と旧植民地出身の・台湾人がいた。
その数は、朝鮮人が148人、台湾人が173名だった。
連合国が、日本の戦争犯罪の中でも捕虜虐待を特に重視していたこと(ポツダム宣言の第10項)、日本軍が、東南アジアの各地に設置した捕虜収容所の監視員に朝鮮人・台湾人の軍属を充てたこと、連合国各国が朝鮮人・台湾人を、「敵国に使用された臣民」と見なし、日本人として裁いたこと、上官の命令に基づく行為でも責任を免除されないとしたことが、多くの朝鮮人・台湾人の戦犯を生み出した要因となった。
泰緬鉄道建設の例に見られるように、日本政府が「ジュネーヴ条約」の準用を連合国各国に約束しながら、それに基づいた処遇を適正に行わなかった為、条約に反した命令・処遇の実行責任が、末端の軍属にも問われた(厳密には「準用」は「遵守」に比べて実行側の裁量の余地が大きいが、そうした主張が通る状況ではなかった)。
朝鮮人戦犯148人のうち、軍人は3人だった。
1人は洪思翊中将であり、2人は志願兵だった。
この他、通訳だった朝鮮人16人が中華民国の国民政府によって裁かれ、うち8人が死刑となった。
残る129人全員が、捕虜収容所の監視員として徴用され、タイ・ジャワ・マレーの捕虜収容所に配属された軍属である。
尚、敵国の婦女子をはじめとする民間人を抑留したジャワ軍抑留所の監視にも朝鮮人軍属があたったため、オランダ法廷で戦犯となっている。
朝鮮人については「一般の日本人よりも背が高く、日本の正規軍よりももっと凶暴だった」
「体罰では、日本兵よりも彼ら(韓国人)を遥かに恐れた」
「日本人戦犯の責任を軽減するつもりは毛頭ないが、占領地域で最も嫌われたのは、このころ日本国籍を持っていた朝鮮人だった」
などをはじめ、その凶暴性についての証言が数多く出ている。
台湾人軍属は、ボルネオ捕虜収容所に配属された。オーストラリア法廷で多くの台湾人が戦犯として裁かれ、うち7人が死刑、84人が有期禁錮とな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