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량해전
조선 왕조가 편찬 한 「선조실록」에는, 「일본선백척 포착, 2백척소파, 참수 5백, 포로백팔10여, 닉자수 알려지지 않고」라고 있어[6], 「선조실록」의 다른 기사에서는, 「일본선의 총수 300척, 그 안 200척이 침몰, 나머지의 일본선 100석이 철퇴.일본측천명의 사상.익사한 사람은 셀 수 할 수 없다. 」[7]어떤.조선의재상인유성용이 적은 「징록」에서는 「분적주2백여소.살 잡아 무산.」라고 있다.
명·조선측 자료에서는 승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명·조선 군측에서는, 명군의 부장자 용이나 조선군의 주장이순신, 한층 더이영남(가사토우라첨사),방덕용(요안군수),고득장(흥양현감),리언양이라고 하는 장관이 전사해, 한때 내민 명군의 주장진도 일본군의 포위로부터 위험하게 피했다고 여겨져 명·조선수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 하거나 있다 있어는 다시 쥰텐을 봉쇄하는 것은 필적하지 않았다.일본 군측에 장관 클래스의 전사자는 있지 않고, 주력인 시마즈군전사자수도정한록에서는 실명을26명 주어고려군 깨닫아에서도 실명을39명을 실어 50 다른 사람이 전사했다고 해, 그 외의 일본군의 전사자수를 더해도 손해는 100명에게 못 미친다고 추정되고 있다.
조선측의사료
- 「선조실록」:선조 31년 11월 18일의 조에, 「일본군은 전사자가 적고, 불과 수십명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기재.
- 「조선 왕조 실록」:태종 13년 11월 18일의 조에, 「일본군은 전사자가 적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세로 20 다른 사람, 그 외의 군세로 30 다른 사람, 합해 50 다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기재.
- 「(정병록)」:제27권에, 「일본군은 전사자가 적고,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세로 20 다른 사람, 그 외의 군세로 30 다른 사람, 합해 50 다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기재.
일본측의사료
- 「시마즈가 문서」:「문녹2년 진 일기」에,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세로 전사한 사람은 26명」이라고 기재.
- 「고니시유키나가 문서」:「문녹2년 진 일기」에, 「그 외의 군세로 전사한 사람은 39명」이라고 기재.
학술 논문
- 지궁아키히로 「로량해전에 있어서의 일본군의 손해에 대해」( 「조선 학보」 제180집, 2000년):조선측과일본측의사료를비교 검토해,일본군의손해는100명에못 미친다라고추정하고 있다.
- 카네나리기 「로량해전에 있어서의 명·조선수군의 전술」( 「동아시아 연구」 제22호, 2009년):명·조선수군의시점으로부터로량해전을분석해,일본군의손해는조선측의사료에기재되고 있는숫자와거의 일치한다고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료와연구 성과에 근거하고,로량해전에 있어서의일본군의손해는100명에못 미친다라고추정되고 있습니다.
터무니 없는 세뇌된 바보
1. 일본에서 말하는 휴전 체결은 사실은 아니다. 그런 (일)것은 존재하지 않았고 일본에서 관백의 사망으로 일방적으로 철병을 결정
2. 대부분의 중국 장군은, 자신의 관할로 일본군이 안전하게 철병 하는 것을 뇌물을 받아 허락 (자국은 아니기 때문에 당연할 것이다)
3. 이순신을 포함한 조선의 장군은 모두 거절. 복수심 밖에 없었다
4. 로량해전이 시작
5. 이순신은 20번(회) 이상의 해전을 하고, 반드시 일본군에 근접하지 말아라 라고 규칙을 결정했다. 일본군은 백병전에 능숙하고 조총을 잘 친다
6. 조총의 살상 범위의 밖에서 일본군을 해류에 감금해 두어 대포로 진한 뭐 부수는 것이 이순신의 전술
7. 바보같은 중국의 jin lin가 그것을 무시해 돌진해 눈 깜짝할 순간에 포위 있었다
8. 이순신은 jin lin를 요구하기 위해서 억지로에 돌격 해 구출에 성공한다
9. 중국의 장군을 도망시키고, 또 싸운 도중에 조총에 해당된다
10. 유언에서는 “빌리는 비용 임박이니까,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아라”라고 명령
11. 이순신의 아들이 이순신의 갑옷을 입고 대신을 해 이순신인 모습을 하면서 싸웠다
12. 전투가 끝나고, 반이상의 일본수군이 고향에 갈 수 없어서 바다에서 죽었다
13. 이후 이순신에 죽음을 (들)물은 중국의 jin lin는 갑판에 투신을 해 울며 아우성쳐 “그는 살아도 나를 구출했고, 죽어도 나를 구출한”이라고 말한다
14. 조선 정부에서는 이순신을 1 등급 공신으로 임명해 충무공이라고 하는 직위를 수여 “이전부터 나라를 위해서 죽은 장군은 많지만, 나라를 구와 죽은 장군은 없었다”라고 국왕이 말하는 (조선 왕조 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