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군
조선에서 「신이 이끄는 부대」라고 불린 명군은, 문녹의 역에 대해서는,조승훈 인솔하는5,000명,리여송 인솔하는슈우수이 거울을 포함한43,000명이 참전해, 한층 더 벽제관의 싸움 후에류 인솔하는5,000명이 증원으로서 새롭게 도착했다.루이스·프로 의자는, 평안성을 둘러싼 명군의 병력을 전문으로서 「적어도20만」이라고 기재하고 있다[게이쵸의 역에 대해서는, 최대 동원이 된 게이쵸 3년(1598년) 9월의 울산·사 카와·순천의 세방면면동시 반공때의 병력을, 「선조실록」은 수군을 맞추어라 92,100명으로 해, 참모본부 편찬 「일본 전사 조선역 」에서는 같이 64,300명으로 하고 있다.또 조선의 사료 「연 명아주실기술」에서는 양역을 통한 명의 동원수를221,500 다른 사람으로 한다.
원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을 정복하기 때문에(위해) 가는 길로 명의 책봉국의 조선에 길안내 시키려고 했지만 끊은 때문
조선을 우선 먼저 지배하려고 했다.초반부터 조선이 너무 약해 야마토군은 평양을 평정 했다.조선은 당황해서 명에
원군 요청을 했다.국력이 닮아 있다고(면) 바보같은 일을 말하는 놈이 있지만.명의 병력을 전혀 무시해 단독으로 싸웠다고 망상
명이 없으면 조선은 초반에 일본에 평정 되고 있었다.
明軍
朝鮮で「天兵」と呼ばれた明軍は、文禄の役においては、祖承訓率いる5,000人、李如松率いる秋水鏡を含む43,000人が参戦し、さらに碧蹄館の戦い後に劉綎率いる5,000人が増援として新たに到着した。ルイス・フロイスは、平安城を囲んだ明軍の兵力を伝聞として「少なくとも20万」と記載している[慶長の役については、最大動員となった慶長3年(1598年)9月の蔚山・泗川・順天の三方面同時反攻の際の兵力を、『宣祖実録』は水軍を合わせ92,100人とし、参謀本部編纂『日本戦史 朝鮮役』では同じく64,300人としている。また朝鮮の史料『燃藜室記述』では両役を通しての明の動員数を221,500余人とする。
そもそも豊臣秀吉は明を征服する為通り道で明の冊封国の朝鮮に道案内させようとしたが断った為
朝鮮をまず先に支配しようとした。序盤から朝鮮が弱すぎ倭軍は平壌を平定した。朝鮮は慌てて明に
援軍要請をした。国力が似てると馬鹿な事を言う奴がいるが。明の兵力を全く無視し単独で戦ったと妄想
明が無ければ朝鮮は序盤で日本に平定されてい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