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경제 PositiveNegativeFreeStyleArguments


1. 대한제국은 1890년대에는 근대화를 시작한 직후이기 때문에 약했다


2. 당시의 만주는 도적이 매우 많고, 위험한 무법지대로 청나라 측에서 귀찮아했다


3. 대한제국은 청나라에게 “우리가 도적을 해치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청나라에게 허락을 받은


4. 그러나, 도적을 진압한 이후에는 그 지역에서 나가지 않거나, 약탈을 하기 시작


5. 청나라측은 잘못된 것을 직감


6. 1901년에 대한제국은 규모를 늘려 5000명의 군대를 파견 (무기는 독일로, 전술은 프랑스를 카피)


7. 당황한 청나라측은 15,000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한제국 군대에게 나가라고 경고


8.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청나라 군대는 15번의 전투에서 전부, 대한제국 군대에게 패배


9. 상황이 심각해지고, 만주 관할에서는 “이대로 가면 만주는 한국인의 손이 됩니다. 병력 증원을 요청합니다” 라고 베이징에 보내다


10. 청나라 측에서도 사실을 알고, 대한제국에 항의


11. 대한제국 측은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지방의 군부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다” 라고 거짓말


12. 청나라 측에서는 프랑스측에도 항의를 하다. 프랑스의 장교가 대한제국에 합류하여 만주 침략을 도왔다는 주장






[ 청나라에서 프랑스에 보낸 공문서 ]




-【2】 대한제국 상황과 카두알 장군의 대한제국 파견

[발신] 프랑스 외무부

[수신] 베이징Pékin의 피숑華盛 M.S. Pichon(26호), 서울의 콜랭 드 플랑시(1호)-


1899년부터 이미 프랑스 장교단이 대거 입국하기 시작


-귀하는 대한제국 정부가 페이외르 대위를 북부 국경지대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실제로 두만강 유역의 만주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참여토록 임명했고, 이 장교에게 이 같은 원정대 동반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었다고 지난 7월 17일에 보고한 바 있습니다.-


-귀하, 서울 주재 프랑스 공사가 두만강Tumen 유역의 만주 영토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목적과 그에 반대하는 러시아 내각의 상황을 설명하는 여러 정보를 제게 보내왔습니다. 아울러 콜랭 드 플랑시 공사가 말하길, 이러한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에서 서울 병기창 책임자인 페이외르 포병 대위의 출발을 막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대위는 북부 국경지대 시찰이라는 명목 아래 실제로 모두가 탐내는 영토를 점령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참여토록 임명된 자이다.-





==



13. 1904년에는 대한제국 측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독립신문에 “대한제국은 하루 빨리 근대화를 끝내고, 만주를 얻은 뒤에는 청나라에게 배상금을 얻어내야 한다. 그리고는 식민지를 늘려야 한다” 라는 문장을 투고



14. 상황을 알아차린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 이후에는, 조선의 성장을 억누르고, 1905년에 강제로 차관을 도입하여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종속하고, 화폐를 정복, 군대는 강제 해산을 시켰다.



15. 분노한 대한제국 군대의 일부가 소요사태를 일으켰지만 일본군에게 진압 당했다.



16. 일본은, 당시 대한제국이 얻은 간도와 만주의 영토를 청나라에게 돌려주다



17. 대한제국은 1910년 병합 당하며 사라지다




==


당시, 대한제국의 1인당 GDP는 1909년 기준으로 아시아 2위, 국가 예산의 가장 많은 지출은 국방비였다. (1901년 기준 41.02%)


그러나, 근대화의 타이밍이 너무 늦어버리고, 조선이 커지는 것을 직감한 일본이 미리 눌렀기 때문에 실패








출처

프랑스 외무부 문서

1889∼1905년 한·청 국경분쟁 諸 記錄

日本統監府間島派出所에서 日本政府에 提出한 間島問題의 參考書類』3, 「舊邊界警務署 鐘城分署의 日記中 間島關係事件拔萃」.『拔萃文書』



















 


대한제국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1899에서 1909의 사진







대한제국의 나라 노래














조선이 이렇게 강력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와 러시아와 합의하고 행동을 한 것이지만


1905년에 일본이 러시아를 이겨버리고, 조선의 군대를 해산하고 경제권을 잡은 이후부터는


서구의 약속도, 자국의 군대도 사라진 조선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러일 전쟁의 결과다. 일본은 조선이 성장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本当の歴史 [ 大韓帝国 vs 清 ]


1. 大韓帝国は 1890年代は近代化を始めた直後だから弱かった


2. 当時の満洲は盗賊が非常に多くて, 危ない無法誌どおり清側で煩わしがった


3. 大韓帝国は清に "私たちが盗賊をやっつけるでしょう" と言って清に許しを得た


4. しかし, 盗賊を押えた以後にはその地域から出ないとか, 掠奪を夏期手始め


5. 清側は間違ったことを直感


6. 1901年に大韓帝国は規模をふやして 5000人の軍隊を派遣 (武器はドイツで, 戦術はフランスをコピー)


7. 荒てた清側は 15,000人の兵力を投入して大韓帝国軍隊に出なさいと警告


8. 1901年から 1903年まで清軍隊は 15番(回)の戦闘で全部, 大韓帝国軍隊に敗北


9. 状況が深刻になって, 満洲管轄では "このまま行くと満洲は朝鮮人の手になります. 兵力増員を要請します" と北京に行かせる


10. 清側でも事実が分かって, 大韓帝国に抗議


11. 大韓帝国側は "私たちは分からない事だ. 地方の軍部が独断的にやらかした事だ" と嘘


12. 清側ではフランス側にも抗議をする. フランスの将校が大韓帝国に合流して満洲侵略を助けたという主張






[ 清でフランスに送った公文書 ]




-【2】 大韓帝国状況とカドアル将軍の大韓帝国派遣

[発信] フランス外務省

[受信] 北京Pkinのピショング華盛 M.S. Pichon(26号), ソウルのコルレングドプルラングシ(1号)-


1899年からもうフランス将校団が大挙入国しはじめ


-貴下は大韓帝国政府がペイウェル大尉を北部国境地帯視察という名目の下実際に豆満江流域の満洲領土を占領するための準備作業に参加するように任命したし, この将校にこのような遠征隊連れを承諾してはいけないと判断したと去る 7月 17日に報告した事があります.-


-貴下, ソウル駐在フランス工事が豆満江Tumen 流域の満洲領土に対する大韓帝国政府の目的と彼に反対するロシア内閣の状況を説明する多くの情報を私に送りました. 同時にコルレングドプルラングシ工事が言うのを, このような状況でこのような状況でソウル兵器責任者であるペイウェル砲兵大尉の出発を阻ま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いました. その大尉は北部国境地帯視察という名目の下実際に皆が貪る領土を占領するための準備作業に参加するように任命された者だ.-





==



13. 1904年には大韓帝国側でもっと露骨的に独立新聞に "大韓帝国は一日早く近代化を終わらせて, 満洲を得た後には清に賠賞金を得なければならない. それからは植民地をふやさなければならない" という文章を投稿



14. 状況を見抜いた日本は, 露日戦争勝利以後には, 朝鮮の成長を押えつけて, 1905年に強制で次官を取り入れて大韓帝国の経済圏を従属して, 貨幤を征服, 軍隊は強制解散をさせた.



15. 怒った大韓帝国軍隊の一部が所要事態を起こしたが日本軍に鎭圧あった.



16. 日本は, 当時大韓帝国が得た間島と満洲の領土を清に返す



17. 大韓帝国は 1910年併合あって消える




==


当時, 大韓帝国の 1人当り GDPは 1909年基準でアジア 2位, 国家予算の一番多い支出は国防費だった. (1901年基準 41.02%)


しかし, 近代化のタイミングがあまり遅れてしまって, 朝鮮が大きくなることを直感した日本があらかじめ押したから失敗








出処

フランス外務省文書

1889〜1905年限り・請い国境紛争 諸 記録

日本統監府間島派出所で 日本政府に 提出一 間島問題の 参考書類』3, 「旧辺界警務署 鐘城分署の 日記中 間島関係事件抜萃」.『抜萃文書』




















大韓帝国が本格的に成長する 1899から 1909の写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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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帝国の国歌














朝鮮がこんなに力強く行動することができたことは, フランスとロシアと合議して行動をしたことだが


1905年に日本がロシアを勝ってしまって, 朝鮮の軍隊を解散して経済圏を取った以後からは


西欧の約束も, 自国の軍隊も消えた朝鮮は何もできなくなった.


日露戦争の結果だ. 日本は朝鮮が成長することを望まなか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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