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건국한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의 귀족중심 계급 차별을 아주 싫어하고, 초기에 양인(良人)과 천민(賤民) 두 가지 계급만 두어 양인은 누구나 능력이 되면 관리가 될 수 있게 했고, 관직은 세습되지 않도록 했다.
14~15세기 당시에는 전세계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개혁!
하지만 공신(功臣)들에게 지급한 새습 토지인 장원(莊園)이 결국에는 양반이 일종의 계급으로 고착화 되게 하고
사실상 양반- 중인- 평민- 천민의 봉건적 계급사회로 후퇴한다. (과거의 신분제 계급차별은 전근대적 농업중심 경제구조에서는 필연적인 것)
그래도 가끔 중인이나 평민이 관리가 되기도 하고 정조대왕때까지는 천민이 성리학자로 인정받는 사례도 있긴 했다.
임진왜란, 明의 패망과 淸과 전쟁에서 패전, 뒤이은 일본은 물론 중국과의 무역 축소 등 대외 교역을 통한 사대부의 경제적 기반 박살, 두번의 전쟁에서 권위도 추락하고...
그런 와중에 지배계급은 경제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성리학적 가치를 착취와 차별의 수단으로 악용하기 시작하고... 따라서 정치는 엉망이 되고...
건국 당시 사대부들이 만들고자 했던 국가는 엄청난 것이었고 성리학적 가치도 혁신적인 것이었다. 상당히 성공도 했고 국민의 국가 및 정치의식을 엄청나게 끌어 올렸지만...
국제정세의 변화 대응에 연이어 실패했고, 그 결과 그렇게 망해갔고 망해버린 것...
朝鮮を建国した新進士大夫たちは高麗の貴族中心階級差別がとても嫌で, 初期に良人(良人)と賎民(賎民) 二つの階級だけ二つ程の良人は誰も能力になれば管理にな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たし, 官職は世襲されないようにした.
14‾15世紀当時には全世界で事例を捜してみることができない位のおびただしい改革!
しかし功臣(功臣)らに支給したセスブ土地である主席合格(荘園)が結局には両班が一種の階級で固着化になるようにして
事実上両班- 衆人- 平民- 賎民の封建的階級社会で後退する. (過去の身分制階級差別は前近代的農業中心経済構造では不可欠なこと)
それでもたまに衆人や平民が管理になったり正祖大王時までは賎民が性理学者で認められる事例もあったりした.
壬辰の乱, 明の敗亡と 清と戦争で敗戦, 引き継いだ日本はもちろん中国との貿易縮小など対外交易を通じる士大夫の経済的基盤撲殺, 二度の戦争から権威島墜落して...
そんな渦中に支配階級は経済的優位を守るために性理学的価値を搾取と差別の手段に悪用し始めて... したがって政治は台無しになって...
建国当時士大夫たちが作ろうとした国家はおびただしいものだったし性理学的価値も革新的なのだった. よほど成功もしたし国民の国家及び政治意識をおびただしく引き上げたが...
国際情勢の変化対応にぞくぞく失敗したし, その結果そのようにマングヘガッゴ滅びてしまったこ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