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히토시겸이라고 하는 서기가 표시한 「닛토장유가」(1763년부터 1764년)이, 당시의 님 아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서기」란 일본 체제중에 시와 글을 가지고 통신사의 아래에 오는 일본인에 시로 대응하는 직무였습니다.
오오사카, 쿄토, 에도의 현난 호화로움을 부러워하는 것과 동시에, 「이 풍부한 카네시로탕 연못이 왜인의 소유하는 곳(중)이 되어, 제다 황이라고 칭해, 자자손손에게 전할 수 있고 있는 것이다」 「이 개에도 동일한 배를, 모두실구소탕 해, 4백리 60주를 조선의 국토로 해, 조선왕의 덕을 가지고, 예절의 나라로 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한국의 생각은, 전혀 진보하지 않고, 지금도 옛날도 변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군요.
전후의 일본인과 같이, 텔레비전으로 미국의 도시나 가정의 전자제품등을 보고 「이것은, 이루어질 리 없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가 신기하다입니다.
또, 동서에는,대마도에서 먹은 고구마의 맛있음에 감격해, 씨감자를 청하는이라고 고구마를 한반도에 가지고 돌아가거나 요도가와에서는 양수 물방아의 기구의 훌륭함에 감복해 「본받아 만들고 싶을 정도다」라고도 쓰고 있습니다.
물방아는, 당시의 일본과 이씨 조선의 기술의 차이를 적시는 상징적인 물건입니다.
さつまいもを朝鮮に伝えた日本
金仁謙という書記がしるした「日東壮遊歌」(1763年から1764年)が、当時の様子をあらわしています。
「書記」とは日本滞在中に詩文をもって通信使のもとへやってくる日本人に詩で対応する職務でした。
大坂、京都、江戸の絢爛豪華さをうらやむとともに、「この豊かな金城湯池が倭人の所有するところとなり、帝だ皇だと称し、子々孫々に伝えられていることである」「この犬にも等しい輩を、みな悉く掃討し、四百里六十州を朝鮮の国土とし、朝鮮王の徳を持って、礼節の国にしたいものだ」と記載されています。
韓国の考え方は、全く進歩せず、今も昔も変わ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ね。
戦後の日本人のように、テレビでアメリカの都市や家庭の電化製品などをみて「これは、かなうはずない」と思うのでしょうが、なぜ、そう思わないのかが不思議です。
また、同書には、対馬で食べたサツマイモの美味しさに感激し、種芋を乞うてサツマイモを朝鮮半島に持ち帰ったり、淀川では揚水水車の機構の見事さに感服し「見習ってつくりたいぐらいだ」とも書いています。
水車は、当時の日本と李氏朝鮮の技術の差をしめす象徴的なもの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