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합방(한국 병합) 시대는 암흑기가 아니고, 풍부하게 번영했던 시대였던
한일합방 시대란, 1910(메이지 43) 년 1945(쇼와 20) 년의 대략 35년간, 일본이 구미제국의 지지 아래 조약에 근거해 대한제국을 병합 했던 시대를 가리킨다.이 시대가 「암흑 시대」였는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발판의 하나에 당시의 한국을 찍은 사진이 있다.
한일합방(한국 병합) 시대의 한국의 사진
서울(경성)
혼쵸(충무로)
당시의 영상을 보았을 때의 충격
도아 대학 교수·히로시마 대학 명예 교수
최·키르손(최길죠) 씨
당시의 영상을 보고, 도아 대학 교수·히로시마 대학 명예 교수 최·키르손(길죠)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그 영상에는, 번화가나 백화점이 있다 서울시내의 떠들썩해, 찻집에서 시민이 커피나 맥주를 마시고 있는 차림등이 어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이 시대에 이렇게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지, 라고 재차 다시 생각했습니다」
조선 호텔의 테라스
정향나무가게 백화점
한국 출신의 최씨는 한일합방 시대를 「암흑기」라고 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그러나, 당시의 영상은, 최씨의 생각을 근저로부터 가릴 수 있는 했다, 라고 한다.
대천해수욕장에서는 수영복차림의 여성도
경성에는 노면 전차도 달리게 되었다
창경원의 벚꽃을 보면서 산책하는 조선의 사람들
경성 남대문 거리 산쵸메
한일합방전의 남대문 한일합방 후와의 차이는 일목 요연
한일합방(한국 병합) 시대에 일본이 실시한 것
(1) 고액의 재정 투입
한일합방 후, 일본은 한반도를 「식민지」가 아니고, 일본의 일부로서 생각하고 있었다.구미의 「식민지」지배와는 달라, 거기에 착취는 없었다.
근현대사 연구가 미즈마정헌씨는, 이렇게 지적한다.「일본이 조선을 착취하고 있었는지, 라고 말하면, 오히려 일본에서 한반도로 혈세가 투입되고 있었다.35년간에 조선에 재정 보충이 없었던 것은, 쇼와 8년의 단 일년 뿐입니다.쇼와 10년대, 일본이 중일 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곤궁해, 내핍 생활에 몰리고 간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 놀랐던 것에, 한국에서는 다수의 학교가 건설되어 5천 킬로 이상의 철도도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2) 인프라의 정비·소득 증가 정책
압록강 철교
경성역
조선 은행
한반도에서의 벼농사
충청북도 공립 농업 학교의 실습 풍경
(3) 교육제도의 확립
일본이 한글을 말살했다고 말해지고 있지만, 실은 당시의 학교에서는 한글도 배우고 있던
고등 초등학교에서의 화학 실험
일본 통치 이전의 이씨 조선에 있고, 교육을 받게 된 것은 「양반」이라고 말해지는 지배계급의 자제뿐이어, 문맹퇴치율은20% 이하였다.이 점에 대해서도, 최씨는 일본 통치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학교 교육에서는 일본어로 조선어를 말살한 것처럼 듣고 있습니다만, 일본의 교육 정책으로 한반도가 근대적인 교육 시스템이 되어 온 것은 사실이며, 높게 평가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4) 계급 차별의 철폐
게다가 대만 출신으로 평론가의 노랑 후미오씨는, 다른 관점에서 일본의 조선 통치에 높은 평가를 주고 있다.「일본의 당시의 조선 총독부는 지금까지의 제도를 바꾸어 「만민 평등」을 실현해, 근대법에 근거하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이조 시대의 계급제도를 모두 철폐한 것, 이것은 대단한 것이군요.링컨 이상입니다.링컨의 노예 해방 이상의 일을 하고 있어요」
또, 조선의 사람들의 이름을 빼앗았다, 라고 비판을 받는 일도 있다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원래 노예 계급에는 성씨가 없었습니다.또 여성이라도 이름도 없었다.이름을 빼앗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름을 주었습니다.조선의 긴 역사 속에서 최대의 공헌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이 시책에도 통설과는 다른 긍정적인 평가를 주었다.
일본의 통치는 우량하고, 행정 수완 뿐만 아니라 민중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도 실현되었다
식민지 연구의 제일인자, 알렌·아일랜드는, 1926년에 출판한 저서 「THE NEW KOREA―조선(코리아)이 극적으로 풍부해졌던 시대(때) 」 중(안)에서, 일본의 조선 통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오늘의 조선은 이 왕조 시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 좋게 통치되고 있어 또 다른 많은 독립국과 비교해도 그 통치는 우수하다.정부의 행정 수완 뿐만 아니라, 민중의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 대해도 우수한 것이다」
우선, 「사실」에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일한 양국의 관계 개선은 시작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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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韓併合(韓国併合)時代は暗黒期ではなく、豊かに繁栄した時代だった
日韓併合時代とは、1910(明治43)年~1945(昭和20)年のおよそ35年間、日本が欧米諸国の支持のもと条約に基づいて大韓帝国を併合した時代を指す。この時代が「暗黒時代」だったかどうかを検証する足がかりの一つに当時の韓国を写した写真がある。
日韓併合(韓国併合)時代の韓国の写真
ソウル(京城)
本町(忠武路)
当時の映像を目にした時の衝撃
東亜大学教授・広島大学名誉教授
チェ・キルソン(崔吉城)氏
当時の映像を見て、東亜大学教授・広島大学名誉教授のチェ・キルソン(萑吉城)氏は大きな衝撃を受けた。その映像には、繁華街や百貨店があるソウル市内のにぎわい、喫茶店で市民がコーヒーやビールを飲んでいる姿などが映っていたからだ。「この時代にこんなに豊かな生活をしていたのか、と改めて考え直しました」
朝鮮ホテルのテラス
丁字屋百貨店
韓国出身のチェ氏は日韓併合時代を「暗黒期」とする教育を受けてきた。しかし、当時の映像は、チェ氏の考え方を根底から覆えした、という。
大川海水浴場では水着姿の女性も
京城には路面電車も走るようになった
昌慶苑の桜を見ながら散策する朝鮮の人々
京城南大門通り三丁目
日韓併合前の南大門~日韓併合後との違いは一目瞭然
日韓併合(韓国併合)時代に日本が行ったこと
(1) 多額の財政投入
日韓併合後、日本は朝鮮半島を「植民地」ではなく、日本国の一部として考えていた。欧米の「植民地」支配とは異なり、そこに搾取はなかった。
近現代史研究家の水間政憲氏は、こう指摘する。「日本が朝鮮を搾取していたのか、と言えば、むしろ日本から朝鮮半島に血税が投入されていた。35年間で朝鮮に財政補填がなかったのは、昭和8年のたった一年だけです。昭和10年代、日本が日支事変以降、経済的に困窮し、耐乏生活に追い込まれていったわけじゃないですか。ところが、驚いたことに、韓国では多数の学校が建設され、5千キロ以上の鉄道もつくられていたんです」
(2)インフラの整備・所得増加政策
日本が朝鮮半島の社会的基盤を整えたのは事実だ。前出のチェ氏も水間氏も同様に、日本が朝鮮半島で行った近代化への貢献を列挙する。「日本は朝鮮に近代的なインフラを整備し、建物等を数多く建築し、所得を上げる政策を実施しました。稲の品種改良によって寒冷地でも稲作農業ができるようし、その結果、北部でもおいしい米がたくさんと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これは朝鮮における経済政策でも成功した例です」
鴨緑江鉄橋
京城駅
朝鮮銀行
朝鮮半島での稲作
忠清北道公立農業学校の実習風景
(3)教育制度の確立
日本がハングルを抹殺したと言われているが、実は当時の学校ではハングルも教えられていた
高等小学校での化学実験
日本統治以前の李氏朝鮮において、教育を受けられたのは「両班」といわれる支配階級の子弟のみであり、識字率は20%以下であった。この点についても、チェ氏は日本統治について肯定的な評価を下している。「学校教育では日本語で朝鮮語を抹殺したように言われていますが、日本の教育政策で朝鮮半島が近代的な教育システムになってきたことは事実であり、高く評価されてもいいと思います」
(4)階級差別の撤廃
さらに、台湾出身で評論家の黄文雄氏は、別の観点から日本の朝鮮統治に高い評価を与えている。「日本の当時の朝鮮総督府はそれまでの制度を変えて『万民平等』を実現し、近代法に基づく社会を作りました。李朝時代の階級制度をすべて撤廃したこと、これは大したものですね。リンカーン以上です。リンカーンの奴隷解放以上の仕事をしていますよ」
また、朝鮮の人々の名前を奪った、と批判を受けることもある「創氏改名」については、「もともと奴隷階級には苗字がなかったんです。また女性でも名前もなかった。名前を奪ったのではなく、むしろ名前を与えたんですね。朝鮮の長い歴史のなかで最大の貢献であると思います」と、この施策にも通説とは異なる肯定的な評価を与えた。
日本の統治は優良で、行政手腕のみならず民衆の文化的経済的発展も叶った
以上見てきたような日本の統治政策は、台湾でも施行された。しかし、台湾では韓国のような感情的な反発は見られず、むしろ近代化を推し進めたものとして肯定的に評価している。
植民地研究の第一人者、アレン・アイルランドは、1926年に出版した著書「THE NEW KOREA―朝鮮(コリア)が劇的に豊かになった時代(とき) 」の中で、日本の朝鮮統治を次のように評価している。
「今日の朝鮮は李王朝時代とは比べ物にならないくらい良く統治されており、また他の多くの独立国と比較してもその統治は優れている。政府の行政手腕のみならず、民衆の文化的経済的発展においても優れているのである」
まず、「事実」に目を向けることから、日韓両国の関係改善は始まるのではないだろう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