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세기의 원구.원래의 군은 나가사키현·대마도에 쳐들어갔습니다.그 중에는 몽골인과 함께 한국인 병사도 있었습니다.「고려사절 요점」에는, 귀환한 고려군의 장군이 200명의 아이를 코마왕에게 헌상 했다고 하는 기술이 있어요.「몽고 내습」이라고도 말해지도록(듯이), 몽골인이 대거 해 밀려 들어 오고, 거기에 한국인들이 어쩔 수 없이 뒤따라 합쳐졌다고 하는 파악하는 방법이 일본인안에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실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조선은 고려였습니다.코마왕인 아이( 후의 충렬왕)는 1272년, 스스로 진행되고, 쿠빌라이·한에 일본을 공격해야 하는 것인 것을 이하와 같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유그일본미몽성화 고 발조사계적군용 전함 자금(쪽)편 거처수.당이차사위신면진 정신력소조왕사.
왕자는 이 상주의 2년 후의 1274년, 부왕의 죽음으로 보다, 왕( 제25대왕, 충렬왕)에게 즉위 합니다.그리고, 충렬왕은 문장 긴 역 (1274년)과 홍안의 역 (1281년)에 대하고, 함선을 건조해, 병력과 경비를 적극적으로 원왕조에 제공해, 일본 침공의 주도적인 역할을 완수합니다.
충렬왕의 상주문은 고려에 일본 침략의 의도가 있던 것의 무엇보다의 증거입니다.원을 불쏘시개 상에서의 침략이기 때문에 「범의 권세를 빌리는 여우」(와) 같은 것입니다만, 실제로 조선병은 몽골병과 함께 일본에 내습해, 난폭랑자를 일했습니다.훌륭한 침략인 것에 틀림없습니다.
13世紀の元寇。元の軍は長崎県・対馬に攻め入りました。その中にはモンゴル人とともに朝鮮人兵士もいました。『高麗史節要』には、帰還した高麗軍の将軍が200人の子供を高麗王に献上したという記述があります。「蒙古襲来」とも言われるように、モンゴル人が大挙して押し寄せて来て、それに朝鮮人たちが仕方なく付き合わされたという捉え方が日本人の中にもあると思います。しかし、実態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
当時の朝鮮は高麗でした。高麗王の子(後の忠烈王)は1272年、自ら進んで、フビライ・ハンに日本を攻めるべきであることを以下のように、上奏しています。
惟彼日本 未蒙聖化 故発詔 使継糴軍容 戦艦兵糧 方在所須。儻以此事委臣 勉尽心力 小助王師。
惟(おも)んみるに彼の日本は、未だ(皇帝フビライの)聖なる感化を蒙(こうむ)らず。故に詔(みことのり)を発して、軍容を整え、継糴(けいてき、糧食を整えること)せしめんとせば、戦艦兵糧まさに須(みち)いる所あらん。もし此事(このこと)を以て、(皇帝が)臣(忠烈王のこと)に委(ゆだ)ねば、心力を尽し勉(つと)め、王師(皇帝のこと)を小助せん。――『高麗史』の「元宗十三年」の一部
王子はこの上奏の2年後の1274年、父王の死により、王(第25代王、忠烈王)に即位します。そして、忠烈王は文永の役(1274年)と弘安の役(1281年)において、艦船を建造し、兵力と経費を積極的に元王朝に提供し、日本侵攻の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ます。
忠烈王の上奏文は高麗に日本侵略の意図があったことの何よりの証拠です。元を焚き付けた上での侵略ですから「虎の威を借りる狐」の如きものですが、実際に朝鮮兵はモンゴル兵とともに日本に襲来し、乱暴狼藉を働きました。立派な侵略であることに違いありません。
忠烈王は元王朝の都の大都(現在の北京)に滞在し、元の国力の強大さに圧倒されました。元に服従することこそが高麗の生き残る道と信じ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毎年、元に莫大な貢ぎ物を送り、異常な追従ぶりを示しました。貢ぎ物を調達するため、なりふり構わず民や臣下を搾取したためクーデターが起こり、危うく殺されそうになることもあり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