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병합 전후의 조선의 사진
한국인을 기아와 내란으로부터 구한, 대일본 제국
↑1900년의 Seoul 남대문 큰 길
화상 클릭으로 확대 ↑일본 통치전 서울 남대문 거리
화상 클릭으로 확대 ↑1897년의 Seoul 남대문 큰 길.성문의 전은 상인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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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의 Seoul
↑산들에는 초록이 한 개도 없는 상태
【조선 총독부 정책 일람】
병합시(1910) 종전시(1945)
■교육의 보급 거의 전무 → 초등학교 5,213교건설, 학생수 2,389,135명.
■경성 제국대학 창설(1924), 구서울 사범 학교(현서울 대학), 이화여대 등 1000교이상 건설
■조선 국민에게 교육을 실시해, 취학률을61%까지 높였다(1944)
(한글을 정비해 체계화시켜, 한자, 일본어와 함께 보급시켰다)
■문맹퇴치율 3-8% → 80%
■인구 1313만명 → 2,512만명(1944)
■평균수명 24세 → 56세
■철도 3,827 km부설
■경지 면적 246만 정보 →449만 정보
■논면적 84만 정보 →162만 정보(1928)
■수확량(미의 생산량) 약 1 천만석 →2 천만석(1930)
■단당 수량 0.49석 →1.49(3배)
■식림 하게야마에 30년간에 5억 9 천만책을 식림
■싶은 연못(한국 국내이기 때문에 연못의 반은, 아직도 일본 제국 근제)
■조선의 통일되지 않은 도량형을 통일해, 화폐 가치의 안정과 물자의 유통에 이바지했다
(물건을 받을 때는 큰 매스, 팔 때는 작은 매스를 사용하고 있던 랄반 특권 박탈)
■지적의 정비 경지를 경작자의 소유로 간주해,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위와 생활을 향상시켰다
■카오스인 한반도에, 인신의 자유, 사유재산의 보장, 법의 원래의 평등을 도입
■유아 키센과 주술적 의료의 금지
■이씨 조선의 잔학한 고문을 폐지
(일본인 상대에게 살인을 범한 김구조차도 일년반으로 형기를 끝내도록(듯이) 죄형 법정주의를 철저)
■가축 계급에 있던 조선 여성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도록(듯이) 요구해, 가장의 권한을 제한
■코 중장, 금 운손 소장 등, 한국인을 차별대우 없게 취급해, 군의 고위에 발탁
■경성 제국대학 창설(1924), 구서울 사범 학교(현서울 대학), 이화여대 등 1000교이상 건설
■조선 국민에게 교육을 실시해, 취학률을61%까지 높였다(1944)
(한글을 정비해 체계화시켜, 한자, 일본어와 함께 보급시켰다)
■문맹퇴치율 3-8% → 80%
■인구 1313만명 → 2,512만명(1944)
■평균수명 24세 → 56세
■철도 3,827 km부설
■경지 면적 246만 정보 →449만 정보
■논면적 84만 정보 →162만 정보(1928)
■수확량(미의 생산량) 약 1 천만석 →2 천만석(1930)
■단당 수량 0.49석 →1.49(3배)
■식림 하게야마에 30년간에 5억 9 천만책을 식림
■싶은 연못(한국 국내이기 때문에 연못의 반은, 아직도 일본 제국 근제)
■조선의 통일되지 않은 도량형을 통일해, 화폐 가치의 안정과 물자의 유통에 이바지했다
(물건을 받을 때는 큰 매스, 팔 때는 작은 매스를 사용하고 있던 랄반 특권 박탈)
■지적의 정비 경지를 경작자의 소유로 간주해, 조선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의 지위와 생활을 향상시켰다
■카오스인 한반도에, 인신의 자유, 사유재산의 보장, 법의 원래의 평등을 도입
■유아 키센과 주술적 의료의 금지
■이씨 조선의 잔학한 고문을 폐지
(일본인 상대에게 살인을 범한 김구조차도 일년반으로 형기를 끝내도록(듯이) 죄형 법정주의를 철저)
■가축 계급에 있던 조선 여성에 대해서 이름을 붙이도록(듯이) 요구해, 가장의 권한을 제한
■코 중장, 금 운손 소장 등, 한국인을 차별대우 없게 취급해, 군의 고위에 발탁
■강도 건수
쇼와 2년 1771건
쇼와 7년 1261건
쇼와 12년 727건
쇼와 17년 394건
강도 건수:조선 총독부 「통계 연보」보다
일본의 패전 후, 한국은 미국에 의해서 독립해 결과적으로 한일합방은 일본에 다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은
日本人の血税を搾取して近代化できた朝鮮
日本併合前後の朝鮮の写真
朝鮮人を飢餓と内乱から救った、大日本帝国
↑1900年のSeoul 南大門大通り
画像クリックで拡大 ↑日本統治前ソウル南大門通り
画像クリックで拡大 ↑1897年のSeoul 南大門大通り。城門の前は商人の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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画像クリックで拡大
↑1888年のSeoul
↑山々には緑が一本もない状態
【朝鮮総督府政策一覧】
併合時(1910)~終戦時(1945)
■ 教育の普及 ほぼ皆無 → 小学校5,213校建設、生徒数2,389,135人。
■ 京城帝国大学創設(1924)、旧ソウル師範学校(現ソウル大学)、梨花女子大など1000校以上建設
■ 朝鮮国民に教育を実施し、就学率を61%まで高めた(1944)
(ハングルを整備し体系化させ、漢字、日本語と共に普及させた)
■ 識字率 3-8% → 80%
■ 人口 1313万人 → 2,512万人(1944)
■ 平均寿命 24歳 → 56歳
■ 鉄道 3,827km敷設
■ 耕地面積 246万町歩 →449万町歩
■ 水田面積 84万町歩 →162万町歩(1928)
■ 石高(米の生産量)約1千万石 →2千万石(1930)
■ 反当たり収量 0.49石 →1.49(3倍)
■ 植林 禿山に30年間で5億9千万本を植林
■ ため池(韓国国内のため池の半分は、いまだ日本帝国謹製)
■ 朝鮮の不統一な度量衡を統一し、貨幣価値の安定と物資の流通に資した
(モノを受けるときは大きなマス、売るときは小さなマスを使っていたリャンバン特権剥奪)
■ 地籍の整備 耕地を耕作者の所有とみなし、朝鮮の大多数を占める農民の地位と生活を向上させた
■ カオスな朝鮮半島に、人身の自由、私有財産の保障、法のもとの平等を導入
■ 幼児キーセンと呪術的医療の禁止
■ 李氏朝鮮の残虐な拷問を廃止
(日本人相手に殺人を犯した金九でさえも一年半で刑期を終えるように罪刑法定主義を徹底)
■ 家畜階級にあった朝鮮女性に対して名前をつけるように要求し、家長の権限を制限
■ 洪中将、金ウンソン少将など、朝鮮人を分け隔てなく扱い、軍の高位に抜擢
■ 京城帝国大学創設(1924)、旧ソウル師範学校(現ソウル大学)、梨花女子大など1000校以上建設
■ 朝鮮国民に教育を実施し、就学率を61%まで高めた(1944)
(ハングルを整備し体系化させ、漢字、日本語と共に普及させた)
■ 識字率 3-8% → 80%
■ 人口 1313万人 → 2,512万人(1944)
■ 平均寿命 24歳 → 56歳
■ 鉄道 3,827km敷設
■ 耕地面積 246万町歩 →449万町歩
■ 水田面積 84万町歩 →162万町歩(1928)
■ 石高(米の生産量)約1千万石 →2千万石(1930)
■ 反当たり収量 0.49石 →1.49(3倍)
■ 植林 禿山に30年間で5億9千万本を植林
■ ため池(韓国国内のため池の半分は、いまだ日本帝国謹製)
■ 朝鮮の不統一な度量衡を統一し、貨幣価値の安定と物資の流通に資した
(モノを受けるときは大きなマス、売るときは小さなマスを使っていたリャンバン特権剥奪)
■ 地籍の整備 耕地を耕作者の所有とみなし、朝鮮の大多数を占める農民の地位と生活を向上させた
■ カオスな朝鮮半島に、人身の自由、私有財産の保障、法のもとの平等を導入
■ 幼児キーセンと呪術的医療の禁止
■ 李氏朝鮮の残虐な拷問を廃止
(日本人相手に殺人を犯した金九でさえも一年半で刑期を終えるように罪刑法定主義を徹底)
■ 家畜階級にあった朝鮮女性に対して名前をつけるように要求し、家長の権限を制限
■ 洪中将、金ウンソン少将など、朝鮮人を分け隔てなく扱い、軍の高位に抜擢
■ 強盗件数
昭和2年 1771件
昭和7年 1261件
昭和12年 727件
昭和17年 394件
強盗件数:朝鮮総督府『統計年報』より
日韓併合後、日本は朝鮮半島を日本本土と同じと考え日本国民の莫大な税金を注いで、朝鮮を近代化させた。
日本の敗戦後、韓国はアメリカによって独立し結果的に日韓併合は日本に多大な経済的損失を被った
日本の敗戦後、韓国はアメリカによって独立し結果的に日韓併合は日本に多大な経済的損失を被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