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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만, 원구의 후에도, 외적의 침략은 있었다.이번은, 무로마치 시대의 1419년(오에이 26년), 4 대장군·아시카가의지(3 대장군·의만의 아들)의 시대에 일어난 「오에이의 외구」에 대해 보자.이씨 조선이, 1만 7000명 이상의 군세로 대마도를 침략했지만, 과연, 어떠한 사건이었던 것일까.

◆왜 이씨 조선은 대마도를 침략했는가


 오에이 26년(1419) 6월 20일, 대마도의 오자키포에 10소 정도의 군선이 나타났다.도민들은 당초, 동료가 돌아왔다고 착각 하고, 술이나 물고기를 준비하는 등 대접의 준비를 했다.그러나, 점차 님 아이가 이상한 것에 깨닫는다.그렇다고 하는 것도, 최초의 10소에 이어져 몇척의 군선이 앞바다에 출현했기 때문이다.

 대마도의 해안에 모습을 보인 배.그것은, 이씨 조선의 침공군이었다.사료에 의하면, 총원 227척, 1만 7285명 정도의 대군세이다.신변의 위험을 찰지한 도민은 산에 도망쳤다.이것보다, 대마도는 순식간에 전장화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씨 조선은 왜 대마도를 공격했는가—.제설 있다가, 당시의 대마도는 일본인(끓자)의 일대 거점으로 보여지고 있어 그 기세를 없애기 때문에 있던 것은 틀림없다고 여겨진다.

 15 세기 초두, 일본인는 무로마치 막부나 조선 왕조에 의한 금압책, 또 조선 왕조에 의한 회유책에 의해, 침정화 하고 있었다.그러나, 오에이 25년(1418), 그런 상황에 변화가 방문한다.그것까지 일본인의 금압에 힘을 쓰고 있던 대마도 수호·무네사다무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뒤를 이은 그 아이 무네사다성(아명=도도웅환:개개기미 만)은 아직 젊고, 이씨 조선앞국왕인 태종은 이에 따라, 다시 일본인의 활동이 활발하게 되는 것을 무서워했다.

 사실, 오에이 26년 5월에는 약 50소의 야마토선이 한반도 근해에 나타나 조선의 배를 굽는다고 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덧붙여서, 이 50소는 원래 명을 목표로 하고 있어 이윽고 명군과 싸워 전멸 하고 있다).그러한 사정이 있어, 태종은 교통의 요충(나름 짊어진다)인 대마도에 쳐들어가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태종은 출병 전에 「대마도때문섬, 례어경상도지계숲.본시우리나라지지」(대마도의 섬인, 경상도의 계림에 례.본이것 우리 나라의 땅)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그러나, 대마도의 사람들로부터 하면, 확실히 「트집」이며 「토바티끌」이었다.

◆600명이서 1만 7000명을 깬다


 대마도에 상륙한 이씨 조선군은 대마도 수호·무네사다성에 책을 보냈지만, 대답은 없었다.그러자(면) 시마우치의 수색을 개시.그 과정에서 배를 다 태워, 1939호의 집을 구워, 114명을 다치게 해(다치게 해), 논의 곡물을 베고 갔다.이 때, 대마도를 지키는 무사의 수는 600명 정도이며, 이씨 조선군의 불과 30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어떻게 생각해도 다수의 의견이 힘이 있고, 이길 수 있어야할 않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씨 조선군은 생각하지 않는 고전을 강요당한다.6월 29일, 3군을 구성해 진공하며 갔지만, 그 중의 2군은 종자무 인솔하는 대마도세에 방해되었다.대마도세는 온전히 도전하고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이씨 조선군을 내륙부로 끌여들여 급습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작전이, 보기 좋게 빠졌다.대마도세가 발하는 화살은 재미있게 명중해, 또 땅의 이익을 살려 몹시 나쁘게 기습공격을 행해, 이씨 조선군에 대타격을 준다.일본측의 사료에 의하면 이씨 조선군은 2,500의 손해를 냈다고 한다.전력차이를 생각하면, 생각할 수 없는 전과이다(강악〈노가악〉의 싸움).
 이에 따라, 이씨 조선군은 일시 철퇴.이렇게 해 교착(교착) 상태에 빠지면, 무네사다성은 「7월에 들어가면 폭풍이 불기 위해, 대군이 장기간 머무는 것은 좋지 않다」라는 문서를 보내, 수호와 철퇴를 호소했다.간단하게 공락할 수 없으면 알았다 이씨 조선군도 이것을 수용한다.결과, 7월 3일에 대마도로부터 조선에 철수하게 되었다.

 지금과 같이 정보 전달 수단이 발달하고 있지 않는 무로마치 시대, 이 일련의 흐름은 막부에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았었다.당시 , 아시카가의지가 명의 사용을 되돌려 보내는 등 날명관계가 악화되고 있던 적도 있어, 쿄토에서는 「명이 습격해 왔다.대당봉기(원구)의 재래다」 등과 오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층 더 놀랄 만한은, 이씨 조선군이 침공하기 전의 5월 22일의 시점에서, 「대당·남만·고려등이 일본에 공격해 온다」라고 하는 정보가 쿄토에 퍼지고 있던 점이다.정보의 출처(소)는 「고려」라고 말해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을 들은 아시카가의지는 앙천 하면서도, 「신국 이유 무슨 일 있다인가」라고 입에 대었다고 한다.
 아시카가의지는 석청수 하치만신을 모신 신사에 발길을 옮겨, 무사를 빌었다.이 때, 전설에 의하면, 바람도 없는데 하치만신을 모신 신사의 토리가 넘어졌다고 한다.여하튼, 최종적으로는 이씨 조선과의 새로운 싸움은 행해져서 두, 의지가 무서워한 것 같은 「대당봉기」의 규모의 싸움에는 발전하지 않았다.이씨 조선내에서는 전과가 없었기(위해)때문에 재정을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결국은 중지가 되었다.

 조선측의 기록에는, 이 싸움의 후, 대마도측이 사자를 보내 조선에의 귀속을 바랐다고 하는 기술도 있다고도 말한다.그러나, 대마도 측에 귀속의 의지가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오히려 오에이의 외구는, 이씨 조선의 태종의 「대마도의 섬인, 본이것 우리나라의 땅」이라고 하는 말을, 명실 공히 부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된 것이다.(이케도우취)



日本を侵略しようとしたが弱く返り討ちに遭った朝鮮

だが、元寇のあとにも、外敵の侵略はあった。今回は、室町時代の1419年(応永26年)、4代将軍・足利義持(3代将軍・義満の息子)の時代に起きた「応永の外寇」について見てみよう。李氏朝鮮が、1万7000人以上の軍勢で対馬を侵略したのだが、果たして、どのような事件だったのだろうか。

◆なぜ李氏朝鮮は対馬を侵略したのか


 応永26年(1419)6月20日、対馬の尾崎浦に10艘ほどの軍船が現われた。島民たちは当初、仲間が帰ってきたと勘違いして、酒や魚を用意するなどもてなしの準備をした。しかし、次第に様子がおかしいことに気が付く。というのも、最初の10艘につづいて何隻もの軍船が沖合に出現したからだ。

 対馬の海岸に姿をみせた船。それは、李氏朝鮮の侵攻軍であった。史料によれば、総勢227隻、1万7285人ほどの大軍勢である。身の危険を察知した島民は山に逃げ込んだ。これより、対馬は瞬く間に戦場と化す。

 それにしても、李氏朝鮮はなぜ対馬を攻めたのか――。諸説あるが、当時の対馬は倭寇(わこう)の一大拠点とみられており、その勢いを削ぐためであったのは間違いないとされる。

 15世紀初頭、倭寇は室町幕府や朝鮮王朝による禁圧策、また朝鮮王朝による懐柔策により、沈静化していた。しかし、応永25年(1418)、そんな状況に変化が訪れる。それまで倭寇の禁圧に力を入れていた対馬守護・宗貞茂がこの世を去ったためだ。跡を継いだその子の宗貞盛(幼名=都都熊丸:つつくままる)はまだ若く、李氏朝鮮前国王である太宗はこれを受けて、ふたたび倭寇の活動が盛んになることを恐れた。

 事実、応永26年5月には約50艘の倭船が朝鮮半島近海に現われ、朝鮮の船を焼くという事件が起きている(ちなみに、この50艘はもともと明をめざしており、やがて明軍と戦い全滅している)。そうした事情があり、太宗は交通の要衝(ようしょう)である対馬に攻め入ろうと考えたのだ。

 太宗は出兵の前に「対馬為島、隷於慶尚道之鶏林。本是我国之地」(対馬の島たる、慶尚道の鶏林に隷う。本これ我が国の地)と述べたという。しかし、対馬の人びとからすれば、まさに「言いがかり」であり「とばっちり」であった。

◆600人で1万7000人を打ち破る


 対馬に上陸した李氏朝鮮軍は対馬守護・宗貞盛に書を送ったが、返答はなかった。すると島内の捜索を開始。その過程で船を焼き払い、1939戸の家を焼き、114人を殺め(あやめ)、田んぼの穀物を刈っていった。このとき、対馬を守る武士の数は600人程度であり、李氏朝鮮軍のわずか30分の1にすぎない。どう考えても多勢に無勢であり、勝てるはずのない戦いであった。

 しかし、李氏朝鮮軍は思わぬ苦戦を強いられる。6月29日、3軍を構成して進攻していったが、そのうちの2軍は宗資茂率いる対馬勢に阻まれた。対馬勢はまともに挑んでは勝てないと判断して、李氏朝鮮軍を内陸部に引き込んで急襲しようと考えたのだ。

 この作戦が、見事にはまった。対馬勢の放つ矢は面白いように命中し、また地の利をいかして散々に奇襲攻撃を行ない、李氏朝鮮軍に大打撃を与える。日本側の史料によれば李氏朝鮮軍は2,500もの損害を出したという。戦力差を考えれば、考えられない戦果である(糠岳〈奴加岳〉の戦い)。

 これを受けて、李氏朝鮮軍は一時撤退。こうして膠着(こうちゃく)状態に陥ると、宗貞盛は「7月に入ると暴風が吹くため、大軍が長期間留まるのはよくない」との文書を送り、修好と撤退を呼びかけた。簡単に攻め落とせないとわかった李氏朝鮮軍もこれを容れる。結果、7月3日に対馬から朝鮮へ撤収することになった。

 いまのように情報伝達手段が発達していない室町時代、この一連の流れは幕府に正確に伝わっていなかった。当時、足利義持が明の使いを追い返すなど日明関係が悪化していたこともあり、京都では「明が襲撃してきた。大唐蜂起(元寇)の再来だ」などと誤解していたのである。

 さらに驚くべきは、李氏朝鮮軍が侵攻する前の5月22日の時点で、「大唐・南蛮・高麗等が日本に攻め来たる」という情報が京都に広まっていた点だ。情報の出所は「高麗」といわれていたというが、これを耳にした足利義持は仰天しつつも、「神国ゆえ何事あるか」と口にしたといわれている。

 足利義持は石清水八幡宮に足を運び、無事を祈った。このとき、伝説によれば、風もないのに八幡宮の鳥居が倒れたという。ともあれ、最終的には李氏朝鮮とのさらなる戦いは行なわれず、義持が恐れたような「大唐蜂起」の規模の争いには発展しなかった。李氏朝鮮内では戦果がなかったために再征を主張する勢力もいたが、結局は中止になった。

 朝鮮側の記録には、この戦いののち、対馬側が使者を送って朝鮮への帰属を願ったという記述もあるともいう。しかし、対馬側に帰属の意志があったとは考えにくい。むしろ応永の外寇は、李氏朝鮮の太宗の「対馬の島たる、本これ我国の地」という言葉を、名実ともに否定する歴史的事件となったのであった。(池島友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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