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의 눈빛과 통신사의 목적
제1회 통신사의 명목은6대장군의교의 습위의 축하이지만, 본심은 별도인 곳에 있었다.
통신사가 파견되는 5개월전[1428년(음력) 7월 1일]의 일,
의미는 「일본에는 100편의 서경이 있다라고 (들)물은, 통신사에 구입시킬 필요가 있다.또 일본의 종이는 사 반드시 해 강하다.이 기술은 어떻게 해서든지 습등은 오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곳)중에 있으리라.
자료4〈1428_7_1〉
이러한 일이통신사를 파견한 동기의 중요 부분이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조선의 중추가 일본의 중앙의 문화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었는지를 엿봐 알 수 있다.
서경과는 서경으로, 신빙성이 있다라고 말해지는 지금 문장 서경은 28편이지만, 원래는 약 100편이라고 하는 낡은 전승이 있었다.일본은 역사의 낡은 나라이니까, 태고의 문물이 남아 있어도 신기하다는 아니라고 하는 감각이 있던 것일 것이다.
또 세종은 일본의 지제품을 실제로 손에 들어 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그것은 어떠한 지제품이었는지라는 것이 되지만, 하나의 가능성은 일본 종이를 붙여 있다 부채일 것이다.그러나 후술 하도록(듯이) 서적(책자) 용의 얇은 종이인 것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일년 후의 1429년, 일본에서 돌아온 제1회 통신사·박서생은 세종에의 보고를 실시한 3일 후
(12월 6일) 군신을 앞에 두고,
「또 일동에 대해서, 일본에서 조사해 온 감청석, 도은의 기술, 제지의 기술, 주홍경분의 기술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일동의 것은 모두 이것들을 써두었다」.
자료5〈1429_12_6〉
“심중 파랑”라는 말은 산화동의 화합물의 일종인 감청(감청)으로, 안료인 것과 동시에 고대에 있고는 동의 광석으로서 이용되었다.(세종은 일본에서 들여온 감청과 녹청(여섯 짊어진다)을 각지에 견본으로서 보내, 동광석의 탐사에 임하게 하고 있다)
12월 3일, 세종에 대해서는, 이외에, 유명한 물방아의 기술, 유노야의 서비스, 다리의 수축·유지, 동화(전)의 이용등의 시스템에 관한 보고를 하고 있다.(자료 6〈1429_12_3〉
이 외, 고속선(에 앞이 날카로워지고 있어 철정을 이용하는 배)의 기술, 목탄에 의한 환원 제련, 일본도의 제작등을 세종의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전습 해 반도에 뿌리내리게 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일본으로부터의 예물에 있던, 칠기에 관해서도, 조선측은 일본의 칠기 공예 기술에 주목하고 있다.후의 기록이지만, (1502년 10월 3일) 「옻나무공미우라 야마토급비 대마도에 구메심.사원노 칠기작 란가때문 메나리」(조선사 제4편제6권, 연산군 일기권 46) 어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