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8년 2월 20일(1933년.91년전의 2월 20일),고바야시다키지(29세)가, 츠키지 경찰서(도쿄도 츄오구 츠키지 잇쵸메6-1Map→)의 특고경찰에 잡혀 3시간 이상의 고문의 끝, 동일 19시 45분에 사망했습니다.
다음날의 석간으로다키지의 죽음을 안사타 이나코(29세)도,나카죠 유리코( 후의 미야모토유리꼬)(32세)와다키지가 되돌려졌다고 하는 마바시의 집에 달려 들었습니다.
···울면서, 어머니가, 야스다 박사와 함께 고바야시의 옷(기모노)를 벗게 하고 있다.나카죠와 내가 곧 그것을 돕기 시작했다.
뭐라고 할 것이다.이렇게 되어!
팔로부터 소매로부터 벗으면서, 끝내 개가 나의 입술을
경찰은 사인을 심장 마비로 해(확실히 쇼크사였을 것이다), 굉장한 고문이 있었습니다.경찰로부터 감시받는 것을 무서워해 어디의 병원도 해부를 거부(문중의 「야스다 박사」(의사 야스다 노리타낭)은 검거되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해 장례·고별식에 발길을 옮긴 사람들도 죄다 검거되었습니다.
문중의 이와타의도는, 일본 공산당의 간부로, 전년(쇼와 7년), 역시 특별 고등경찰에 체포되어 4일 후에 고문에 의해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다키지 만이 아니었습니다.실로, 특별 고등경찰에 잡히고,고문을 받아(또는 학대되어) 죽은 사람은 114명에 달해,감옥의 열악한 환경하에서 병이 들어 사망한 사람은 1,503명(출옥 후 병사한 사람도 다수.발광한 사람도).검거된 인원수는이라고 하면,정부의 통계에서도 7만 5,681명, 실제로는 수십 만명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야나가와여울 「고발 전후의 특별 고등경찰 관료」).
당지(도쿄도오타구)에 연고 있다 사람에 한해서도,이치카와 쇼이치,다카미 준 ,마미야 모스케,다카다 다모쓰등이 검거되고 있습니다.사이토 산키도, 당지에 살고 있는 무렵, 검거되었습니다.
어떤 고문이 이루어졌는가는, 쇼와 3년의 「3·15대탄압」의 우리 검속자가 받은 고문을,다키지(죽음의 5년전.25세)가 취재해 「19이8·3·15(1928년 3월 15일)」(Amazon→ NDL(쇼와 5년 발행.복자 있어)→)에 쓰고 있습니다.
···알몸으로 되면, 갑자기 것도 있어는 없고, 나중에
그래서 도는 한번 더 정신을 잃었다.
도는 경찰에 올 때마다, 이런 것을 「순경」이라고 하고, 마을에서는 사람들의, 「
「살키, 죽여라──네, 죽여라──!!」
그것은 죽도, 손바닥, 철봉,
「네, 무슨응도 신경라고 응이다.」
도는 이를 악문 채로, 가크리와 자신의 머리가 전에 접힌 것을, 의식의
당시는 복자 투성이였지만, 가쓰모토 세이이치로가 결사적으로 모토하라원고를 지켰으므로, 다키지가 쓴 대로 이와 같이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고문으로 특징적인 것은 성적인 물건으로, 알몸으로 해 부끄러운, 우산의 앞으로 국소를 찌르는 일도 있었습니다(검거된 여성의 증언.「요코하마 사건을 살아」(Amazon→)).
특별 고등경찰(특별 고등경찰)은, 메이지 33년 공포의 「치안 경찰법」이 흘러 나와 설치되어 타이쇼 14년제정의 「치안 유지법」이후, 맹위를 떨칩니다.동년(타이쇼 14년), 「보통선거법」이 제정되었으므로, 신장이 예상되는 자유주의, 평화 주의(반전 주의), 평등 주의, 민주주의를 잡아 가려는 목적이지요(이러한 생각을 가지는 사람을 「사상범」이라고 했다).조문에 「국체변혁 스르코트 목적 트시」자를 단속하면 있어, 공산주의자를 단속하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다키지가 죽은 쇼와8년, 당지(도쿄도오타구
조선 출신의 시인·
하이쿠 짓는 사람의
昭和8年2月20日(1933年。 91年前の2月20日)、 小林多喜二(29歳)が、築地警察署(東京都中央区築地一丁目6-1 Map→)の特高警察に捕らえられ、3時間以上の拷問の末、同日19時45分に死亡しました。
翌日の夕刊で多喜二の死を知った佐多稲子(29歳)も、中条百合子(後の宮本百合子)(32歳)と、多喜二が戻されたという馬橋の家に駆けつけました。
・・・泣きながら、おっ母さんが、安田博士と一緒に小林の着物を脱がせている。中条と私がすぐそれを手伝い始めた。
なんということだろう。こんなになって!
腕から袖から脱ぎつつ、おえつが私の唇を
警察は死因を心臓麻痺とし(確かにショック死ではあったのだろう)、凄まじい拷問があったのです。警察から睨まれることを恐れ、どこの病院も解剖を拒否(文中の「安田博士」(医師の安田徳太郎)は検挙された)。彼の死を悼んで通夜・告別式に足を運んだ人たちもことごとく検挙されました。
文中の岩田義道は、日本共産党の幹部で、前年(昭和7年)、やはり特高に逮捕され、4日後に拷問によって命を落としています。多喜二だけではなかったのです。実に、特高に捕まって、拷問を受けて(または虐待されて)死んだ人は114人にのぼり、牢獄の劣悪な環境下で病気になり死亡した人は1,503人(出獄後病死した人も多数。発狂した人も)。検挙された人数はというと、政府の統計でも7万5,681人、実際には十数万人と推測されています(柳河 瀬『告発 戦後の特高官僚』)。
当地(東京都大田区)にゆかりある人に限っても、市川正一、高見 順、間宮茂輔、高田 保らが検挙されています。西東三鬼も、当地に住んでいる頃、検挙されました。
どういった拷問がなされたかは、昭和3年の「三・一五大弾圧」のおり検束者が受けた拷問を、多喜二(死の5年前。25歳)が取材し『一九二八・三・十五(一九二八年三月十五日)』(Amazon→ NDL(昭和5年発行。伏せ字あり)→)に書いています。
・・・裸にされると、いきなりものもいはないで、後から
それで渡はもう一度気を失った。
渡は警察に来るたびに、こういうものを「お巡りさん」といって、町では人たちの、「
「殺せ、殺せ──え、殺せ──え !!」
それは竹刀、平手、鉄棒、
「えッ、何んだって神経なんてありやがるんだ。」
渡は歯を食いしばったまま、ガクリと自分の頭が前へ折れたことを、意識の
当時は伏字だらけでしたが、勝本清一郎が命がけで元原稿を守ったので、多喜二が書いたままをこのように読むことができます。
女性に対する拷問で特徴的なのは性的なもので、裸にして恥ずかしめ、傘の先で局所を突くようなこともありました(検挙された女性の証言。「横浜事件を生きて」(Amazon→))。
特高(特別高等警察)は、明治33年公布の「治安警察法」の流れで設置され、大正14年制定の「治安維持法」以後、猛威を振るいます。同年(大正14年)、「普通選挙法」が制定されたので、伸長が予想される自由主義、平和主義(反戦主義)、平等主義、民主主義を潰していこうという狙いでしょう(これらの考えを持つ人を「思想犯」とした)。条文に「国体ヲ変革スルコトヲ目的トシ」た者を取り締まるとあり、共産主義者を取り締まることが名目でしたが、
多喜二が死んだ昭和8年、当地(東京都大田区
昭和18年6月、創価学会の初代会長・牧口
昭和17年に起きた「横浜事件」では、雑誌編集者や新聞記者ら60名ほどが「治安維持法」違反で逮捕され、拷問を受け、内4名が死亡。「改造」と「中央公論」は廃刊に追い込まれます。
朝鮮出身の詩人・
俳人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