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877년의 「태정관 지령」과「기타케시마 약도」
호사카 유우지씨는, 「조선 국교때시말내 서적을 찾아 구하는 것」의 「7년 후(1877), 당시 , 일본의 최고 권력 기관에서 만난 태정관은, 울능도(타케시마)와 독도(송도)는, 일본 영토는 아니면 내무성에 통지했습니다」라고 해, 그 증거로 해 「태정관 지령」을 들었다.거기에는 「타케시마외한섬의 의식, 본방 관계 이것 없음」이라고 있다부터다.한층 더 호사카씨는, 「같은 문서의 5 페이지에〈다음에 일도 있어 마츠시마(독도)라고 부르는〉이라고 쓰여져 있습니다.그리고 이 태정관 지령문의 부도는, 두 개의 섬이 울능도와 독도이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히 보이고 있습니다」라고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호사카씨는, 문헌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일까.호사카씨가 「태정관 지령문의 부도」라고 하는 「기타케시마 약도」라고, 「태정관 지령」을 거둔 「공문록」과 「태정류전제2편」에는, 시마네현이 제출한 조사 서류와 메이지 정부의 자료가 관련 자료로서 합철되고 있어 시마네현의 제출 서류인가, 메이지 정부의 자료나 구별해 해석할 필요가 있다부터다.
하지만 타케시마와 마츠시마에 대한 메이지 정부의 인식은, 차이가 났다.당시 , 일본이 참고로 한 서양의 해도등은, 울능도에 마츠시마라고 표기한 Siebold의 「일본도」(1840년)【그림 1】을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재하지 않는 타케시마(아르고노트섬)와 마츠시마(울능도)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그 서양의 해도등에 현재의 타케시마가 그려지는 것은 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안크르호가 타케시마를 발견한 다음에 있다.그 때문에 한시기, 해도등에는 타케시마(아르고노트섬)와 마츠시마(울능도), 거기에 리안크르바위(현재의 타케시마)가 그려지는 등의 혼란【도 2】가 있었다.
그 사실이 확인된 것은, 태정관 지령으로부터 4년 후의 1881년 8월.외무성의 지시로 조사한 키타자와 타다시성이, 「오늘노 마츠시마 하즉치 겐로쿠 12년칭술소노 타케시마 니시테, 고래나판도외노지 타르야지르베시」( 「타케시마 고증」)이라고 보고하고 나서이다.이후, 메이지 정부는 키타자와 타다시성의 보고에 따라, 「일본칭마츠시마 한명 타케시마, 조선칭울능도」(일본칭술 마츠시마, 한명 타케시마.조선칭술울능도)로 하고 있다.
키타자와 타다시성의 「타케시마 고증」과 내무경야마다 아키요시의 지령에서도 분명한 것 같게, 1877년의 태정관 지령으로 「외일도」라고 여겨진 마츠시마는, 호사카 유우지씨가 주장하는 독도는 아니고 울능도였으므로 있다.호사카 유우지씨가 주장하는, 「정말로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하지만 호사카 유우지씨의 주장이야말로, 「완전한 허위」였으므로 있다.호사카 유우지씨의 타케시마 연구는, 태정관 지령으로 「타케시마외한섬의 의식, 본방 관계 이것 없음」이라고 있으면, 그것을 무비판에 근거로 해, 「공문록」에 「기타케시마 약도」가 있으면, 그것을 「태정관 지령문의 부도」라고 하는 등 엉터리였다.「태정관 지령」을 근거로 한다면, 그것이 그 후, 어떻게 해석되고 갔는지, 방증을 들면서 실증할 필요가 있다.그 작업을 게을리하면, 자설에 적당한 부분만큼을 근거로, 허위의 주장을 반복하게 되기 때문이다.
호사카 유우지씨는 「고문서를 봐도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양두 개고기의 전형이다.김 아키라 이사오씨가 지원하는 「독도」사이트는, 열람하는 사람들을 광 빌려주는, 상품 전시회인 것이다.
<그림은 클릭하면 확대하는>
【도 1】Siebold 「일본도」(“KartevomJapanischenReiche”) 부분(1840년)
지도에는,“Takashima(ArgounautIsland)”는, 북위 37도 52부, 동경 129도 50부로 여겨져“Matsushima(DageletIsland)”는, 북위 37도 52부, 동경 37도 25부, 동경 130도 56부로 여겨지고 있어 실재하지 않는 아르고노트섬에 Takashima(=타케시마)와 표기되어 다쥬레이섬=울능도가 마츠시마로 여겨졌다.북위 37도 14부, 동경 131도 52부에 위치하는 현재의 타케시마는, 1840년 시점에서는 서양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이 지도에는 기재되지 않았다.
【도 2】영국 해군 해도 「일본-일본, 큐슈, 시코쿠 및 조선의 일부」
(“Japan-Nipon,KiusiuandSikokandpartoftheKorea”) 부분(1863년)
지도에는, 한반도의 동쪽으로,“TakosimaorArgounautP.D.”(문어 섬=타케시마, 아르고노트섬)(이)가 점선으로 기록되어“Matusima(DageletI.)”(마츠시마, 다쥬레이섬=울능도), 한층 더 현재의 타케시마가,“LiancourtRks.,Eng.HornetIs.,Menelai&Olivutsa”와 프랑스명, 영국명, 러시아명으로 기록되고 있다.1849년, 프랑스의 포경선 리안크르호가 현재의 타케시마를 발견하면, 서양의 해도에는 타케시마(=아르고노트섬)와 마츠시마(=다쥬레이섬=울능도) 외에, 새롭게 리안크르바위(현재의 타케시마)가 등장해(그림 2), 그 후, 해도상으로부터 환상의 아르고노트섬(타케시마)이 사라지고, 울능도는 마츠시마, 현재의 타케시마는 리안크르바위로 여겨졌다.
(타쿠쇼쿠 대학 교수 시모죠 마사오 헤세이 24년 6월 20일 게재)
(3)1877年の「太政官指令」と「磯竹島略図」
保坂祐二氏は、『朝鮮国交際始末内探書』の「7年後(1877)、当時、日本の最高権力機関であった太政官は、欝陵島(竹島)と独島(松島)は、日本領土ではないと内務省に通達しました」とし、その証拠として「太政官指令」を挙げた。そこには「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とあるからだ。さらに保坂氏は、「同じ文書の5ページに〈次に一島あり松島(独島)と呼ぶ〉と書かれています。そしてこの太政官指令文の付図は、二つの島が欝陵島と独島であるという事実を確実に見せています」とも主張している。
ところで保坂氏は、文献批判をしているのだろうか。保坂氏が「太政官指令文の付図」とする「磯竹島略図」と、「太政官指令」を収めた『公文録』と『太政類典第二編』には、島根県が提出した調査書類と、明治政府の資料が関連資料として合綴されており、島根県の提出書類か、明治政府の資料か区別して解釈する必要があるからだ。
事実、保坂氏が「太政官指令文の付図」とする「磯竹島略図」は島根県が提出した地図で、太政官指令文の付図ではない。それに保坂氏が、「同じ文書の5ページに〈次に一島あり松島(独島)と呼ぶ〉と書かれています」とした箇所も、島根県が政府に提出した調書の一部である。島根県では、江戸時代以来の地理的理解に基づき、欝陵島を磯竹島とし、現在の竹島を松島として、両島を島根県の版図とすべきとしていたからである。
だが竹島と松島に対する明治政府の認識は、異なっていた。当時、日本が参考にした西洋の海図等は、欝陵島に松島と表記したシーボルトの『日本図』(1840年)【図1】を踏襲していたため、実在しない竹島(アルゴノート島)と松島(欝陵島)が描かれていたからだ。その西洋の海図等に現在の竹島が描かれるのは1849年、フランスの捕鯨船リアンクール号が竹島を発見した後である。そのため一時期、海図等には竹島(アルゴノート島)と松島(欝陵島)、それにリアンクール岩(現在の竹島)が描かれるなどの混乱【図2】があった。
1877年、太政官指令で「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とされた竹島と外一島は、そのアルゴノート島と欝陵島である。
その事実が確認されたのは、太政官指令から四年後の1881年8月。外務省の指示で調査した北澤正誠が、「今日ノ松島ハ即チ元禄十二年称スル所ノ竹島ニシテ、古来我版図外ノ地タルヤ知ルベシ」(『竹島考証』)と報告してからである。以後、明治政府は北澤正誠の報告に従い、「日本称松嶋一名竹島、朝鮮称欝陵島」(日本称スル松嶋、一名竹島。朝鮮称スル欝陵島)としている。
これは島根県も同様で、島根県令の境二郎は1881年11月12日、「日本海内松島開墾之儀ニ付伺」を内務卿と農商務卿に提出した。この松島開墾の伺いに対し、内務卿山田顕義は翌年1月31日、「書面松島ノ義ハ、最前指令ノ通、本邦関係無之義ト可相心得、依テ開墾願ノ義ハ許可スベキ筋ニ無之候事」(書面の松島のことについては、この前の指令の通り、日本とは関係がないと心得るべきである。よって開墾の願いは許可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島根県に指令した。島根県が開墾を願い出た松島は、「其景況東西トモ四五里、南北三里余、周廻十五六里」の広さを持つ、欝陵島であった。
北澤正誠の『竹島考証』と、内務卿山田顕義の指令でも明らかなように、1877年の太政官指令で「外一島」とされた松島は、保坂祐二氏が主張する独島ではなく欝陵島だったのである。保坂祐二氏が主張する、「正にこれが歴史の真実」である。
にもかかわらず、保坂祐二氏は次のように結論を締めくくった。「日本の古文書も、独島は朝鮮領土であり、日本の領土ではないと認めていいます。ですから独島の日本の固有領土と言う日本の主張は、完全な虚偽であります」。
だが保坂祐二氏の主張こそ、「完全な虚偽」だったのである。保坂祐二氏の竹島研究は、太政官指令で「竹島外一島の儀、本邦関係これなし」とあれば、それを無批判に根拠とし、『公文録』に「磯竹島略図」があれば、それを「太政官指令文の付図」とするなど杜撰であった。「太政官指令」を根拠とするのであれば、それがその後、どのように解釈されていったのか、傍証を挙げながら実証する必要がある。その作業を怠れば、自説に都合のよい部分だけを根拠に、虚偽の主張を繰り返すことになるからである。
保坂祐二氏は「古文書を見ても独島は韓国領土」としているが、それは羊頭狗肉の典型である。金章勲氏が支援する「独島」サイトは、閲覧する人々を誑かす、見本市なのである。
<図はクリックすると拡大します>
【図1】シーボルト「日本図」("KartevomJapanischenReiche")部分(1840年)
地図には、"Takashima(ArgounautIsland)"は、北緯37度52分、東経129度50分とされ、"Matsushima(DageletIsland)"は、北緯37度52分、東経37度25分、東経130度56分とされており、実在しないアルゴノート島にTakashima(=竹島)と表記され、ダジュレー島=欝陵島が松島とされた。北緯37度14分、東経131度52分に位置する現在の竹島は、1840年時点では西洋ではまだ発見されておらず、この地図には記載されていない。
【図2】英国海軍海図「日本−日本、九州、四国及び朝鮮の一部」
("Japan−Nipon,KiusiuandSikokandpartoftheKorea")部分(1863年)
地図には、朝鮮半島の東側に、"TakosimaorArgounautP.D."(タコ島=竹島、アルゴノート島)が点線で記され、"Matusima(DageletI.)"(松島、ダジュレー島=欝陵島)、さらに現在の竹島が、"LiancourtRks.,Eng.HornetIs.,Menelai&Olivutsa"と、フランス名、イギリス名、ロシア名で記されている。1849年、フランスの捕鯨船リアンクール号が現在の竹島を発見すると、西洋の海図には竹島(=アルゴノート島)と松島(=ダジュレー島=欝陵島)の他に、新たにリアンクール岩(現在の竹島)が登場し(図2)、その後、海図上から幻のアルゴノート島(竹島)が消えて、欝陵島は松島、現在の竹島はリアンクール岩とされた。
(拓殖大学教授下條正男平成24年6月20日掲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