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0월 25 일자의 「칙령 제 41호」의 제2조에, 울도군의 관할구역이 「울능섬 전체와 타케시마, 이시마」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을 이유로, 독도인 이시지마는, 1900년 10월의 시점에서 한국령이 되어 있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하지만 그것은 견강 부회의 설이다.
울능도에 두 개의 족도가 존재하는 사실은, 1882년의 리규원의 「울능섬 외도」에서도 확인이 이루어지고 있다.리규원이 족도로 하는 것은, 키타자와 타다시성이 「타케시마 고증」으로 타케시마로 한 울능도의 동약 2킬로의 죽서(타케시마)와 울능도의 토호쿠, 간논자키로부터 수십 미터에 있는 도항(사진 1)이다.
리규원이 울능도의 족도로 한 타케시마와 도항은, 1883년에 울능도로 향해 간 히노키원 곧 가지의 「지도」(그림 3)과 1900년의 아카츠카 타다시조의 「삽화」(그림 4)에도 답습되어 대한제국이 륭희 4년(1910년)
에 간행한 「한국 수산잡지」에서는, 죽서와 서항도로 되어 있다.「칙령 제 41호」를 전후 해, 울능도의 족도는 어느 쪽도 타케시마와 도항의 후타지마에서 만났다.그 중에서도 아카츠카 타다시조의 「삽화」는, 1900년 6월, 울능도가 울도군에 승격하는 계기가 된 시찰관우용정과의 공동 조사 시에 그려져 아카츠카 타다시조의 「울능섬에 있는 산숲개황」에서는, 울능도의 강역이 「동서범6리강, 남북범4리강」이라고 명기되어 있다.아카츠카 타다시조의 삽화에 독도는 그려지지 않고, 「동서범6리강, 남북범4리강」이라고 한 울능도의 강역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이시지마는 독도는 아니었으니까이다.
(그림 3) 히노키원 곧 가지 「복명서」수록 「지도」(1883년)
(그림 4) 아카츠카 타다시조 「울능도보고서」 「삽화」(1900년)
그럼 이시지마는, 리규원이 족도로 한 도항인 것일까.힌트는, 1909 연간의 해도(그림 5)에 있다.그곳에서는 도항이 서항도[SomokuSomu]와 표기되어 이것을 전통적인 한문의 발음 표기법의 반절로 읽으면, 서항도( 「Soku=돌」섬)는 이시지마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쥐[S(o)]의 최초의 모음 o와 항[(m) oku]의 최초의 자음 m가 제외해져 서항의 「S(o)(m) oku」는 「Soku=돌」이 되어 이시지마가 된다).그럼 리규원은 왜, 도항이라고 명명한 것일까.그것은 「울능도검찰 일기」 중(안)에서, 도항을 「형태, 후시우시의 마다 해」, 「치죽총 있어」라고 한 것에서도 분명하다.서항도[SomokuSomu]는, 이것을 한국어로서 읽으면 「소의 목(항=목덜미)의 섬」이 된다.이시지마는, 서항도(도항)를 반절로 읽어, 한음으로 표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5) 해도 306호 「죽변만지수원단」부분
리규원이 도항이라고 명명한 것은, 섬의 정상에 치죽이 나 있는 것부터, 와키라고 있는 소의 항(목덜미)과 진단했기 때문에이다.그 도항이 「칙령 제 41호」에서는 이시지마(소크트)가 되는 것은, 서항도라고 표기해[SomokuSomu]와 훈독 해, 그것을 음독으로 표기한 것일 것이다.그것은 반절로 서항도를 읽으면, 이시지마가 되기 때문이다.울도군의 행정 관할구역으로 족도로 여겨진 후타지마는, 죽서와 도항(서항 시마=이시지마)으로, 독도(타케시마) (와)는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있다.따라서, 토호쿠 아시아 역사 재단이 주장하는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 칙령 제 41호로 독도를 울능군의 관할구역에 규정하고 있다」사실은 없고, 「1905년의 일본의 일방적인 시마네현 편입 조치는, 당연, 무효가 된다」사실도 없었다.타케시마의 불법 점거를 계속하는 한국측의 궤변이야말로, 무효인 것이다.
【부기】「칙령 제 41호」로 이시지마로 여겨져 도정이라고 명명해진 것은, 그 형상이 조선 가옥에·····.(이하는,【부기】(←이쪽을 클릭)를 봐 주세요.)
1900年10月25日付の『勅令第41号』の第二条に、欝島郡の管轄区域が「欝陵全島と竹島、石島」と記されていることを理由に、独島である石島は、1900年10月の時点で韓国領になっていた、と主張するのである。だがそれは牽強付会の説である。
欝陵島に二つの属島が存在する事実は、1882年の李奎遠の『欝陵島外図』でも確認がなされている。李奎遠が属島とするのは、北澤正誠が『竹島考証』で竹島とした欝陵島の東約2キロの竹嶼(竹島)と、欝陵島の東北、観音崎から数十メートルにある島項(写真1)である。
李奎遠が欝陵島の属島とした竹島と島項は、1883年に欝陵島に赴いた檜垣直枝の「地図」(図3)と1900年の赤塚正助の「挿図」(図4)にも踏襲され、大韓帝国が隆煕4年(1910年)
に刊行した『韓国水産誌』では、竹嶼と鼠項島とされている。「勅令第41号」を前後し、欝陵島の属島は何れも竹島と島項の二島であった。中でも赤塚正助の「挿図」は、1900年6月、欝陵島が欝島郡に昇格する契機となった視察官禹用鼎との共同調査の際に描かれ、赤塚正助の「欝陵島山林概況」では、欝陵島の疆域が「東西凡六里強、南北凡四里強」と明記されている。赤塚正助の挿図に独島は描かれておらず、「東西凡六里強、南北凡四里強」とした欝陵島の疆域に、独島は含まれていない。石島は独島ではなかったからである。
(図3)檜垣直枝『復命書』所収「地図」(1883年)
(図4)赤塚正助『欝陵島報告書』「挿図」(1900年)
では石島は、李奎遠が属島とした島項なのであろうか。ヒントは、1909年刊の海図(図5)にある。そこでは島項が鼠項島[SomokuSomu]と表記され、これを伝統的な漢文の発音表記法の反切で読むと、鼠項島(「Soku=石」島)は石島と読めるからだ(鼠[S(o)]の最初の母音oと、項[(m)oku]の最初の子音mが除かれ、鼠項の「S(o)(m)oku」は「Soku=石」となって石島となる)。では李奎遠は何故、島項と命名したのだろうか。それは『欝陵島検察日記』の中で、島項を「形、臥牛のごとし」、「稚竹叢あり」としたことでも明らかだ。鼠項島[SomokuSomu]は、これを韓国語として読むと「牛の首(項=うなじ)の島」となる。石島は、鼠項島(島項)を反切で読み、漢音で表記したものと言えるのである。
(図5)海図306号「竹邊灣至水源端」部分
李奎遠が島項と命名したのは、島の頂上に稚竹が生えていることから、臥せている牛の項(うなじ)と見立てたからである。その島項が「勅令第41号」では石島(ソクト)となるのは、鼠項島と表記して[SomokuSomu]と訓読し、それを音読で表記したのであろう。それは反切で鼠項島を読むと、石島となるからだ。欝島郡の行政管轄区域で属島とされた二島は、竹嶼と島項(鼠項島=石島)で、独島(竹島)とは関係がなかったのである。従って、東北アジア歴史財団が主張するような「大韓帝国が1900年10月25日、勅令第41号で独島を欝陵郡の管轄区域に規定している」事実はなく、「1905年の日本の一方的な島根県編入措置は、当然、無効となる」事実もなかった。竹島の不法占拠を続ける韓国側の詭弁こそ、無効なのである。
【付記】「勅令第41号」で石島とされ、島頂と命名されたのは、その形状が朝鮮家屋に・・・・・。(以下は、【付記】(←こちらをクリック)をご覧くだ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