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누가 지원했는지?
한국인 특별 지원병 제도 운용 당시 , 대부분의 최종 입소자의 연령은 18세부터 23세 미만에 집중하고 있어, 학력은 대부분이 초등학교 졸업자들로, 농업 종사자가 50%, 일부의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던 회사원도 지원했다.
한국인 특별 지원병의 대부분은 병사로, 그 후에 등장하는 학도병들은 장교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병은, 동원된 학도병들에게도 뒤떨어지는 계급적인 차별을 받은 것 같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숫자
역사 교과서나 학자들은, 절대로 비교 수치를 공개하지 않는다.
그대로 항일의 의지를 칭하기 위해서, 정신적인 측면이나 의의만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수치적인 데이터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급식(초중고생)이 편협한 사관을 가지게 된다.
역대 한국인 특별 지원병의 응모자수 80만명 뿐만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합격한 1938년부터 1943년까지의 한국인의 합계만 봐도, 당시의 생각을 알 수 있다.
1940년의 창설로부터 1945년까지의 3 달빛복군수는 339명(소스).
1938년의 시행으로부터 1943년의 일본군지원자는 80만 3000명, 최종 합격자는 1만 6830명.
재미있는 것은, 조선 교육령, 창씨개명, 한국인 특별 지원병제가 일본의 3대황민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동시기에 실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광복군(왼쪽), 한국인 특별 지원병( 오른쪽)
1940년, 지원의 열기
1940년의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당시를 알 수 있는 내용이 기술되고 있다.
영예의 지원병 응모
7만 9600명, 함경남도 1만 900명, 중등졸 200명, 4월 각 도로부터 선발
영예의 지원병으로서 국민으로서의 충성을 다하려고 사람들은 쇄도해, 그 수는 나날이 증가하고 갔다.제3차 한국인 육군 특별 지원자 모집까지, 응모한 사람의 수는, 전조선을 통해서, 7만 9600명을 돌파했다.
그 중으로, 적격자는 3만 6711명으로, 3000명 모집의 정원범위에 적격자만으로도 10배를 넘고 있어 지원한 사람이 110명, 중고교를 졸업한 사람이 192명, 현직의 순경이 1명 내려 또 각 도별로 보면, 지원자 총수에서는 함경남도의 1만 901명이 가장 많아, 적격자수는 전라남도의 4638명이 가장 많았다.
이러한 지원자를 가지고, 금년 4월에 각 도로 전형 시험을 본 후, 5월에는 군부에서 증병제에 대한 신체검사등을 실시해, 합격자를 발표하고 나서 7월에 제1회에 1000명을 지원자 훈련소에 입소시켜, 4개월간 훈련하게 되었다.
나머지 2000명도 차례차례 4개월씩 훈련을 끝낸 후, 입영 시킬 예정이지만, 제1회의 지원자 1만 2000명에 비하면 7만 9000명과 단번에 26 배증 천민의 것은 성적이 좋다고 하는 것보다, 한국인 청년의 지원병이 된다고 하는 정열이 불타고 있는 것을 안다.
한국인 육군 특별 지원자
2월 20일 현재의 혈서 중학
입퇴자는, 20대의 청년 입대 적령기가 주류로, 그들은 태어났던 시기에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없었다.
한국인의 왕공족은 안센이치체에 협력해, 일본군고관이었다.
그들을 단순하게 친일파라고 본다면, 조선은 친일 일색이 되어 버린다.
지원자들은, 일본인에 의한 차별을 극복해, 스스로의 능력을 기르려고 하는 근대화의 종이라고 해석할 수 없을까?
요약
·많은 조선의 청년들은, 일본군으로서 대동아전쟁에 참가하려고 했다.
·일제 시대의 조선 본토는, 항일 감정보다 부일 감정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朝鮮人の誰が志願したのか?
朝鮮人特別志願兵制度運用当時、ほとんどの最終入所者の年齢は18歳から23歳未満に集中しており、学歴はほとんどが小学校卒業者たちで、農業従事者が50%、一部の経済的に安定していた会社員も志願した。
朝鮮人特別志願兵のほとんどは兵士で、その後に登場する学徒兵たちは将校だ。
学ばなかったため、志願兵は、動員された学徒兵たちにも劣る階級的な差別を受けたようだ。
受け入れ難い数字
歴史教科書や学者たちは、絶対に比較数値を公開しない。
そのまま抗日の意志を称えるために、精神的な側面や意義だけを強調するだけで、数値的なデータを示さないので給食(小中高生)が偏狭な史観を持つようになる。
歴代朝鮮人特別志願兵の応募者数80万人だけでなく、最終的に合格した1938年から1943年までの朝鮮人の合計だけ見ても、当時の考えを知ることができる。
1940年の創設から1945年までの3月の光復軍数は339人(ソース)。
1938年の施行から1943年の日本軍志願者は80万3000人、最終合格者は1万6830人。
おもしろいのは、朝鮮教育令、創氏改名、朝鮮人特別志願兵制が日本の三大皇民化政策の一環として同時期に実施されたということだ。
光復軍(左)、朝鮮人特別志願兵(右)
1940年、志願の熱気
1940年の東亜日報の記事をみると、当時が分かる内容が記述されている。
栄誉の志願兵応募
7万9600人、咸鏡南道1万900人、中等卒200名、4月各道から選抜
栄誉の志願兵として、国民としての忠誠を尽くそうと人々は殺到し、その数は日増しに増えていった。第3次朝鮮人陸軍特別志願者募集まで、応募した人の数は、全朝鮮を通じて、7万9600人を突破した。
その中で、適格者は3万6711人で、3000人募集の定員枠に適格者だけでも10倍を超えており、志願した人が110人、中高校を卒業した人が192人、現職の巡査が1名おり、また各道別に見ると、志願者総数では咸鏡南道の1万901人が最も多く、適格者数は全羅南道の4638人が最も多かった。
これらの志願者をもって、今年4月に各道で選考試験を受けた後、5月には軍部で増兵制に対する身体検査などを実施し、合格者を発表してから7月に第1回に1000人を志願者訓練所に入所させ、4ヶ月間訓練することになった。
残り2000人も順次4ヶ月ずつ訓練を終えた後、入営させる予定だが、第1回の志願者1万2000人に比べると7万9000人と一気に26倍増えたのは成績が良いというより、朝鮮人青年の志願兵になるという情熱が燃えていることが分かる。
朝鮮人陸軍特別志願者
2月20日現在の血書中学
入退者は、20代の青年入隊適齢期が主流で、彼らは生まれた時期に朝鮮という国はなかった。
朝鮮人の王公族は内鮮一体に協力し、日本軍高官だった。
彼らを単純に親日派と見るなら、朝鮮は親日一色になってしまう。
志願者たちは、日本人による差別を克服し、自分たちの能力を育てようとする近代化の種と解釈できないだろうか?
要約
・多くの朝鮮の青年たちは、日本軍として大東亜戦争に参加しようとした。
・日帝時代の朝鮮本土は、抗日感情より賦日感情が圧倒的に高かった。
・歴史はありのままに受け止め、解釈し評価しなければなら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