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도경」은 기본적으로 송인의 시점에서 고려를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서긍이 기술한 고려의 풍습에도 그 자신의 주관이 꽤 포함되어 있다.그 내용 중(안)에서 민거조를 보면, 「백성이 거주하는 형세가 불균일로, 벌집과 의총같다.풀을 베고 지붕을 가려겨우 비바람을 막고 있는이,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측으로 이어 맞춘 것에 지나지 않는다.유복한 집은다소 기와를 쳤다가, 겨우10채에 한 채나 2채밖에 없다.」라고 쓰여져 있거나, 민서조에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 적고, 여색을 좋아해, 분별 없게 사랑해, 재를 존중해 남녀의 혼인도 경솔하게 연결되어 헤어지기 쉽고, 전예를 본받지 않기 때문에, 정말로 웃어야 할 것이다.」라고 기록되고 있다.또, 사우의 조를 보면, 「고려는 본래, 유령을 무서워해 신앙해, 음양에 묶여 병이 들면약을 마시지 않는다.아버지와 아들과 같이 매우 가까운 친척이라도, 서로를 보지 않고,
그러나, 서긍자신이 언급한 것처럼, 그가 숙소의 밖에 나왔던 것이 56 회 밖에 없었던 것을 고려하면, 그가 고려의 풍습을 정확하게 이해해 기술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은 민중의 생활에 대한 부분에서 좀 더 큰 것이 아닐까.서긍이 일반 민중의 생활을 기록한 것은 가치가 있다가, 그 기록을 액면대로에 받아 들이려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전술한 것처럼 「고려도경」은 분명한 한계를 가지는 사료이다.또, 「고려도경」이 편찬 되고 나서 머지 않아 송이전쟁에 말려 들어갔기 때문에, 「고려도경」의 원본을 찾아내는 것이 어려워져, 이것에 의해 판본도 몇개인가 있어, 연구에 혼란을 주고 있다.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r200100&code=kc_age_20
「高麗圖經』は基本的に宋人の視点で高麗を記述したものである。 したがって、徐兢が記述した高麗の風習にも彼自身の主観がかなり含まれている。その内容の中で民居条を見ると、「民が居住する形勢が不均一で、蜂の巣と蟻塚のようだ。草を刈って屋根を覆ってやっと雨風を防いでいるが、家の大きさは垂木を両側につなぎ合わせたものに過ぎない。裕福な家は多少瓦を張ったが、やっと十軒に一軒か二軒しかない。」と書かれていたり、民庶条に「その人々は恩を施すことが少なく、女色を好み、分別なく愛し、財を重んじ、男女の婚姻も軽率に結ばれ、別れやすく、典禮を見習わないので、本当に笑うべきことである。」と記録されている。また、祠宇の条を見ると、「高麗は本来、幽霊を恐れて信仰し、陰陽に縛られて病気になったら薬を飲まない。父と息子のようにとても近い親戚でも、お互いを見ず、呪いと圧勝を知るだけである。」という記述もある。圧勝は邪悪な気を押して力を使えなくさせる一種の方術である。このような言及は高麗人が合理的でなく、未開のレベルにあるように理解される記述である。
しかし、徐兢自身が言及したように、彼が宿所の外に出たことが5~6回しかなかったことを考慮すると、彼が高麗の風習を正確に理解して記述したと見るのは難しい。 そして、このような誤りは民衆の生活に対する部分でもっと大きいのではないだろうか。徐兢が一般民衆の生活を記録したことは価値があるが、その記録を額面通りに受け入れるには慎重を期す必要がある。
前述したように『高麗圖經』は明らかな限界を持つ史料である。また、『高麗圖經』が編纂されてから間もなく宋夷戦争に巻き込まれたため、『高麗圖經』の原本を見つけることが難しくなり、これにより版本もいくつかあり、研究に混乱を与え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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