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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당교조는 손병희가 계승하게 되었다.손자는 리상헌의 이름으로 일본에 건너, 개화파와 접촉하면서 「도전」 「재전」 「언전」의 세번째 싸움론을 제기했다.그리고, 1904년, 권동진, 오세창등과 정치단체 「진보회」를 결성해, 그 실무를 리용9에 맡겼다.그러나, 리용9는 송병과 묶어 친일적인 단체 「일진회」를 창설해, 일본과의 협조를 주장했다.이것에 대해서,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 「천도교」를 선포해, 동학의 정통인 교단인 것을 주장했다.리용9는 1906년에 「시천교(조선어판)」를 재흥시켜, 여기서 동학은 「천도교」와「시천교」에 분열했다.
「천도교」는 그 후,3·1 독립 운동을 거쳐 애국 계몽 운동의 일익을 담당해, 「시천교」는 일진회의 조직 중(안)에서 친일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체포·송검 된 피의자 12,668명, 이 중 3789이름이 불기소에 의해 석방, 6,417명이 기소되어 나머지 1,151명은 조사중과 있다(1919년 5월 8 일시점).1919년(타이쇼 8년) 5월 20 일시점으로 1심 판결이 완료한 피고인은 4,026명.이 중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3,967명.사형·무기 징역이 된 사람, 징역 15년 이상의 실형이 된 사람은 없다.
한편 사직의 손을 면한 활동가들은 외국에 망명해, 그들의 국내에 있어서의 독립 운동은 좌절 했다.그 후의 한반도 지역은 일본의 통치에 복종해, 1945년(쇼와 20년)의 일본 패전에 이르기까지 대규모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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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学党教祖は孫秉煕が引き継ぐこととなった。孫は李祥憲の名で日本に渡り、開化派と接触しながら「道戦」「財戦」「言戦」の三戦論を提起した。そして、1904年、権東鎮、呉世昌らと政治団体「進歩会」を結成し、その実務を李容九にまかせた。しかし、李容九は宋秉畯と結んで親日的な団体「一進会」を創設し、日本との協調を主張した。これに対して、孫秉煕は1905年12月1日、「天道教」を宣布し、東学の正統な教団であることを主張した。李容九は1906年に「侍天教(朝鮮語版)」を再興させ、ここで東学は「天道教」と「侍天教」に分裂した。
「天道教」はその後、三・一独立運動を経て愛国啓蒙運動の一翼を担い、「侍天教」は一進会の組織の中で親日的な活動を展開した。
逮捕・送検された被疑者12,668名、このうち3,789名が不起訴により釈放、6,417名が起訴され、残り1,151名は調査中とある(1919年5月8日時点)。1919年(大正8年)5月20日時点で一審判決が完了した被告人は4,026名。このうち有罪判決を受けたのは3,967名。死刑・無期懲役になった者、懲役15年以上の実刑になった者はいない。
一方司直の手を免れた活動家たちは外国へ亡命し、彼らの国内における独立運動は挫折した。その後の朝鮮半島地域は日本の統治に服し、1945年(昭和20年)の日本敗戦に至るまで大規模な運動は起こらなか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