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대덕읍 옹암리에 살던 김기순(당시 48세) 일가 36명은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10월 초 지방 좌익에 끌려가 몰살당했다. 인민군이 퇴각하던 무렵이었다. ‘부유하다’는 게 빌미가 됐다. 김기순 부부와 아들, 동생 부부, 조카 등 35명은 동네 앞바다에 수장됐다. 시신은 옹암리 앞바다 갯벌에서 발견되거나 바닷가에 떠밀려 왔다고 한다.
서울대 법대 신입생이던 김씨 장남 김수현은 고향 마을로 돌아오다 같은 동네 출신인 좌익들을 만났다. ‘다 아는 사람들인데 설마 우리를 죽이겠어’라고 했지만, 김수현은 이들에게 맞아 죽었다. 10남매 중 타지에 있던 남동생 둘만 겨우 살아남았다. 희생자 36명 중 10세 미만이 10명이나 됐다. ‘아기들을 수장하려고 가마니에 넣어서 가는데, 장난치는 줄 알고 웃었다’는 증언까지 나왔다.
전남 영광 백수면에 살던 김진원(당시 68세)씨 일가 20명도 1950년 10월 3일 동네 저수지 인근 정자나무 아래로 끌려 나갔다. 지방 좌익이 마을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부유하다’ ‘기독교인이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식구가 있다’는 이유로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 김진원은 이 동네 백수교회 장로였고, 가족 모두 교회 신자였다. 희생된 가족 중에는 여섯 살 손녀를 비롯, 미성년자도 여럿이었다. 이날 박모씨 가족 7명, 임모씨 가족 10명도 함께 희생됐다.
全南長興郡テドック邑オングアムリに暮したギムギスン(当時 48歳) 日が 36人は 6・25戦争が起こった 1950年 10月初地方左翼に引かれて行って皆殺しされた. 人民軍が退却した頃だった. ‘富裕だ’はのが言葉尻になった. ギムギスン夫婦と息子, 弟(妹)夫婦, 甥など 35人は町内沖合に首長された. 死体はオングアムリ沖合干潟で発見されるとか海辺に押されて来たと言う.
ソウル大法大新入生だった金さん長男キム・スヒョンは故郷村に帰って来て同じ町内出身である左翼たちに会った. ‘すべて分かる人々なのにまさか私たちを殺して’と言ったが, キム・スヒョンはこれらに叩かれて死んだ. 10兄と妹の中で他地にあった弟二人だけやっと生き残った. 犠牲者 36人の中 10歳未満が 10名もされた. ‘赤んぼうたちを首長しようと俵に入れて行くのに, いたずらをするかと思って笑った’と言う証言まで出た.
全南光栄フリーター面に住んだキム・ジン院(当時 68歳)さん一家 20人も 1950年 10月 3日町内貯水池隣近精子木下にひかれて行った. 地方左翼が村住民たちを集まるようにした後 ‘富裕だ’ ‘キリスチャンだ’ ‘村役場で働く家族がいる’と言う理由で竹窓で突いて殺した. キム・ジン院はこの町内フリーター教会長老だったし, 家族皆教会信者だった. 犠牲された家族の中には六歳孫娘を始じめ, 未成年者も多くの人だった. この日パク某さん家族 7人, 林某氏家族 10人も一緒に犠牲され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