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조실록」31년(1598) 10월 12일 「이3로지병, 탕연궤, 인심흉구, 하담이립」
예상외의 대패로 충격을 받은 명군은 지휘관을 엄중하게 문책 했다.동일원은 직급이 3 등급 격하되어 3빙과 마 정문은 적전도망했다고 해서 참형에 대처했다.
사천전쟁 이후, 전의를 상실한 명군은 교전을 회피하는 태도를 나타내,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따라 철퇴하기 시작한 일본군의 의향과 함께 강화 교섭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현재에도 미야자키현 고바야시시에는 이 사천에서의 전승을 기념해 「고리 북용」이라고 하는 무용이 곧 전하고 있다.
『朝鮮宣祖実録』三十一年(1598)十月十二日 「而三路之兵、蕩然俱潰、人心恟懼、荷擔而立」
予想外の大敗で衝撃を受けた明軍は指揮官を厳重に問責した。董一元は職級が3等級降格され、郝三聘と馬呈文は敵前逃亡したとして斬刑に処した。
泗川戦役以降、戦意を喪失した明軍は交戦を回避するような態度を示し、秀吉の死によって撤退し始めた日本軍の意向と相まって講和交渉が公然と行われるようになった。
帰国後の慶長4年6月に義弘・忠恒親子の連名で高野山に建立した慶長の役の供養碑には、南原の戦いの戦果について「慶長二年八月十五日於全羅道南原表大明國軍兵數千騎被討捕之内至當手前四百廿人伐果畢」と触れた後、泗川の戦いの戦果として「同十月朔日於慶尚道泗州表大明人八萬餘兵撃亡畢」とある。一方、味方の被害として「右於度々戰場味方士卒當弓箭刀杖被討者三千餘人海埵之閒 横死病死之輩具難記矣」とある。
現在でも宮崎県小林市にはこの泗川での戦勝を記念して「輪太鼓踊」という舞踊が今に伝えられ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