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일본군 「위안부」피해자이·오크 손씨사망
◆◆◆ 리옥선(이·오크 손) ◆◆◆
※리옥선과 표기되는 경우도 있어
【자라난 내력·위안부가 된 경위등】
1927년 10월(주), 한국 부산의 궁핍한 집에서 태어난다.14세 때, 술집의 양녀로서 팔려 게다가 다른 술집에 팔린다.
1942년 7월, 가게의 사용의 한중간에 납치되어 중국 동북부, 연길의 비행장에서 중노동 당함과 동시에 폭행·강간된다.약 1년 후, 동시내의 위안소에 넣어진다.
해방 후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2000년 6월, 58년만에 한국에 귀국했다.
(주) 호적상은 1928년
【위안소까지의 이동시의 공권력·군의 관여등】
일본인과 한국인의 남자 두 명에게 납치되어 트럭으로 역까지 가, 기차에서 연길(만주)까지 데리고 가진다.그곳의 일본군의 비행장에서 일하게되어 강간된다.약일년 후, 연길 시내의 위안소에 넣어진다.( 「증언 미래에의 기억 아시아 「위안부」증언집」보다)
【고찰】
1번째의 술집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한밤중의 1시 2시까지 기능찬미해 게다가, 손님의 접대를 강요 당한 때문, 2도 정도 도망가, 마지막에는 다른 술집에 부모님에게도 비밀로 팔려 버린 것 같습니다.2번째의 술집에서의 님 아이는 증언에 없기 때문에 불명(※다만, 나눔의 집의 HP의 기계 번역에서는 「기생집」이라고 있다)입니다만, 거기로부터, 위안부로서 팔렸다고 한다면 특이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2건째의 술집이, 「손님의 접대는 거절하고는, 모처럼 샀는데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매춘숙이라도 매앞」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신기하다가 아닙니다.또, 단지 「손님의 접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술을 따르는 접대가 아니고, 몸으로의 접대라고 하면, 싫고 2도나 도망갔다는 것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동녀의 증언으로는, 위안소에 넣어질 때까지의 이야기에 「납치」가 들어갑니다.
납치된 것은, 2건째의 울산(울산)의 술집에서 일하고 있었을 때에 7월 중순의 저녁때의 이야기입니다.「가게의 주인으로부터 쇼핑을 부탁받아 큰길에 나왔는데, 돌연, 두 명의 남자에게 포」,「어디에 데리고 간다, 돌아가 주어와 저항했습니다만, 그대로인같게 데리고 사라졌다」( 「증언 미래에의 기억 아시아 「위안부」증언집」P.155)(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7월 중순의 저녁때이기 때문에, 아직 밝을 것입니다.큰길에서 잡혀, 동녀는 절규면서 인라고 있습니다.이런 상황으로 아무도 도와 주지 않고 그대로 납치되었다고 하는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게다가, 아래와 같은 자료대로, 납치한 것이「일본인과 한국인의 두 명조」이거나「조선남 2명」이거나 합니다.
또, 그 후, 손발을 속박되어 재갈을 물려져서 트럭에 실리고, 울산역에서 화물차에 실립니다.
역에서는,「우리 전원, 이번은 기차로 갈아 타도록 들었습니다」( 「증언 미래에의 기억 아시아 「위안부」증언집」P.156)과 있다 게, 이 표현을 믿으면, 자신의 다리로 걸어 화물차를 탄 것 같습니다.그렇다면, 역에서 도움을 요구할까 도망치면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한 기술은 없고, 단지,「어디선가 갈아 탈 때가 있으면 탈출하려고 생각했습니다만, 결국 어디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증언 미래에의 기억 아시아 「위안부」증언집」P.156)(와)과 있어요.
이와 같이 동녀의 납치의 상황은 불가해한 부분이 많이 있어요.게다가 그대로 위안소에 넣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비행장에서 일한다고 말하는 「정신대」의 요소도 있습니다.과연 「종군위안부」를 의식해 만든 창작이라고 하는 감을 닦을 수 없습니다.원래, 비행장에서 강제 노동을 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15, 16세의 소녀 같은 것 연행하지 않고 남성을 노리겠지요.
덧붙여 납치된 연령에 대해 미묘하게 다른 것은, 달력 나이와 만 나이의 차이에 의하는 것이지요.
【신빙성】
증언에 불가해한 부분이 많이 신빙성이 있다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특히 납치와 비행장에서의 중노동에 관한 증언)
결정적으로 동녀의 증언을 부정하는 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2000년에 58년만에 한국에 귀국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1991년을 자청하고 소송을 일으킨 김 마나부 순서(김·하크슨) 산야문옥주(문·오크스)씨들과 달리, 공에 증언을 시작하는 시점으로부터, 「강제 연행의 요소가 없으면 일본 정부에 사죄나 보상을 요구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던 가능성도 있습니다.
旧日本軍「慰安婦」被害者イ・オクソンさん死去
◆◆◆ 李玉善(イ・オクソン) ◆◆◆
※李玉仙と表記される場合もあり
【生い立ち・慰安婦になった経緯等】
1927年10月(注)、韓国釜山の貧しい家に生まれる。14歳の時、飲み屋の養女として売られ、さらに、別の飲み屋に売られる。
1942年7月、店のお使いの最中に拉致され、中国東北部、延吉の飛行場で重労働させられると共に暴行・強姦される。約1年後、同市内の慰安所に入れられる。
解放後も故郷に戻れず、2000年6月、58年ぶりに韓国へ帰国した。
(注)戸籍上は1928年
【慰安所までの移動時の公権力・軍の関与等】
日本人と朝鮮 人の男二人に拉致されトラックで駅まで行き、汽車で延吉(満州)まで連れて行かれる。そこの日本軍の飛行場で働かされ、強姦される。約一年後、延吉市内の慰安所に入れられる。(「証言 未来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証言集Ⅰ」より)
【考察】
1つ目の飲み屋では、早朝から夜中の1時2時まで働きづめで、しかも、客の接待を強要された為、2度ほど逃げ出し、最後には別の飲み屋に両親にも内緒で売られてしまったようです。2つ目の飲み屋での様子は証言にないため不明(※ただし、ナヌムの家のHPの機械翻訳では「芸者集」とある)ですが、そこから、慰安婦として売られたと言うのなら特異な話ではないはずです。
2件目の飲み屋が、「客の接待は拒むは、せっかく買ったのに使えないから売春宿にでも売っぱらっちまえ」と考えたとしても不思議ではありません。また、単に「客の接待」と表現していますが、それが、お酌をする接待ではなく、体での接待だとしたら、嫌で2度も逃げ出したというのも納得できます。(あくまで推測に過ぎませんが)
しかし、同女の証言では、慰安所に入れられるまでの話に「拉致」が入ります。
拉致されたのは、2件目の蔚山(ウルサン)の飲み屋で働いていた時で7月中旬の夕刻の話です。「店の主人から買い物を頼まれ表の通りに出たところ、突然、二人の男に捕ま」り、「どこへ連れて行くんだ、帰してくれ、と抵抗しましたが、そのまま引きづられるように連れ去られた」(「証言 未来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証言集Ⅰ」P.155)と証言しています。
7月中旬の夕刻ですから、まだ明るいでしょう。表通りで捕まり、同女は叫びながら引きづられています。こんな状況で誰も助けてくれずにそのまま拉致されたと言うのは不自然です。しかも、下記資料の通り、拉致したのが「日本人と朝鮮 人の二人組」であったり、「朝鮮男2人」であったりします。
また、その後、手足を縛られ猿ぐつわをかまされトラックに乗せられて、蔚山駅で貨物車に乗せられます。
駅では、「私たち全員、今度は汽車に乗り換えるように言われました」(「証言 未来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証言集Ⅰ」P.156)とあるように、この表現を信じれば、自分の足で歩いて貨物車に乗ったようです。それなら、駅で助けを求めるか逃げればいいと思いますが、そのような記述はなく、ただ、「どこかで乗り換えるときがあれば脱出しようと思っていましたが、結局どこにも停まりませんでした」(「証言 未来への記憶 アジア『慰安婦』証言集Ⅰ」P.156)とあります。
このように同女の拉致の状況は不可解な部分が多くあります。さらに、そのまま慰安所に入れられるのではなく、一旦、飛行場で働くと言う「挺身隊」の要素もあります。如何にも「従軍慰安婦」を意識して作った創作と言う感が拭えません。そもそも、飛行場で強制労働をさせることが目的なら、15、16歳の少女なんか連行せずに男性を狙うでしょう。
なお、拉致された年齢について微妙に違うのは、数え年と満年齢の違いによるものでしょう。
【信憑性】
証言に不可解な部分が多く信憑性があるとは思えません。(特に拉致と飛行場での重労働に関する証言)
決定的に同女の証言を否定するものも見つかりませんでしたが、2000年に58年ぶりに韓国に帰国したと言うことで、1991年に名乗りをあげて訴訟を起こした金学順(キム・ハクスン)さんや文玉珠(ムン・オクス)さん達と違って、公に証言を始める時点から、「強制連行の要素がなければ日本政府に謝罪や補償を要求できない」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た可能性もあり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