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18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형 2명과 여동생이 있는데, 여동생은 유영철 본인과는 이란성 쌍둥이라고 한다. 함께 태어난 여동생은 1년 후 출생신고되었다. 아버지는 본처를 버리고 세컨드를 둔 상태였는데, 유영철의 어머니는 생활고에 갓 태어난 유영철을 죽일 생각까지 했다.
유영철의 가정은 찢어지게 가난했으며 알코올 의존증으로 인한 아버지의 폭력과 외도가 심했다고 한다. 유영철은 5세가 되던 해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계모 슬하에서 형제들과 자랐다. 유영철의 아버지와 계모는 밤만 되면 유영철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 뒤 거주지를 옮겨 어머니와 같이 살게 돼 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하게 된다. 결국 초등학교를 2번 입학한 셈이 되며, 만 7세에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초·중·고등학교 시절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 일대에서 보냈다. 중학교 1학년 무렵, 유영철의 아버지가 사망하고, 유영철과 형제들은 생모와 합쳤다. 유영철의 어머니가 아이들을 돌보는 보모로 살림을 꾸렸다. 유영철은 계모 밑에 살던 시절보다 행색이 훨씬 나아 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유영철은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생활기록부에는 말이 없고 “애어른” 같았다는 말이 남겨져 있다. 그림과 운동에 소질을 보이던 아이였으나, 나중에 펼쳐질 삶을 예고하듯 유난히 개구리를 잡아 목을 비틀고 해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동물에 관심이 많던 유영철은 친구들한테 의사가 되겠다고 자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친엄마와 가정을 꾸려 전보다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싸움을 잘 하던 유영철은 주변 고등학교의 폭력조직과 싸움을 벌이고, 선도부 반장을 맡아 담배를 피우는 학생을 보면 선배라도 무릎을 꿇게 했다. 교사 대신 교사한테 혼나고 있던 학생을 폭행하는 등, 유영철의 폭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급기야 세운상가에서 불법 LP판을 훔치고 나서는 친구들한테는 “어차피 불법이니 절도가 아니다”는 말을 남겼다.
그 뒤 화가를 꿈꾸던 유영철은 예술고등학교에 지원했으나 낙방하자 좌절하였고 그 뒤로는 국제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2학년 때인 1988년 8월 23일 절도로 구속되어 소년원에 들어간 뒤 결국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1991년, 수차례 절도죄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잡범이 된 유영철은 1993년 황씨라는 여자와 결혼했으나, 결혼 몇달 만에 또 절도죄로 교도소에 들어갔다.
출소한 유영철은 1994년 10월 아들(현재 28세)을 득남한 이후 아침에는 웨딩숍 사진관에서 일하고 밤에는 불법퇴폐 업주들을 상대로 경찰관을 사칭하면서 금품갈취를 하였다. 1994년 11월 그의 둘째 형이 한강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고 기자에게 이야기한
1969년 4월 17일,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의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남원에서 자취하며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인천광역시로 이사하게 되자 영진상업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학창 시절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4개월간 음료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직장 생활에 적응을 못해 그만두고 떡 방앗간에서 배달일을 하거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군입대를 하였으며 육군 하사로 만기 제대(1992)하였다. 이후 별다른 직업 없이 생활하였으며, 절도 등 범죄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여 왔다.
정남규는 어린 시절 아버지(1999년 사망)의 끊이지 않는 폭행과 자신을 아껴주던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추행과 성폭행[9], 성희롱을 당한 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동급생이나 선배들에게 집단괴롭힘과 학교폭력을 겪었고 후배들에게 무시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자취방 옆에 살던 아저씨에게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군대 복무 시절에도 선임들에게 가혹행위와 심한 구타를 겪었고 한 선임에겐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후임들에게는 기수열외를 당하는 등 군 전역 후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며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1989년 4월 특수강도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1994년 절도죄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및 벌금 20만 원 등의 선고를 받은 후, 1996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2년 6월, 1999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절도, 강간 등) 징역 2년, 2002년 절도죄로 징역 10월 등 총 3년 4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었다.
30대 시절에는 어머니, 친누나와 3명이서 함께 살았지만 가족 중 직장을 가진 이가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머니 명의의 낡은 주택에 딸린 방을 세놓고 받는 월세 55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요약하자면 가난,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가혹행위, 집단따돌림 등 끔찍한 폭력들을 전부 다 겪은 굉장히 암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안타까운 사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거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그의 죄들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쾌락살인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1970年 4月 18日全北コチャンで生まれた. 兄弟では兄さん 2人と妹さんがいるのに, 妹さんは柳永哲本人とはイラン性双子と言う. 一緒に生まれた妹さんは 1年後出生届された. お父さんは本妻を捨ててセカンドを置いた状態だったが, 柳永哲のお母さんは生活苦に只今生まれた柳永哲を殺すつもりまでした.
柳永哲の家庭はとても貧乏くさかったしアルコール依存証によるお父さんの暴力と外道がひどかったと言う. 柳永哲は 5歳になった年から小学校 1年生の時まで継母もとで兄弟たちと育った. 柳永哲のお父さんと継母は夜さえなれば柳永哲に暴力を振るった. その後居住地を移してお母さんと一緒に住むようになって小学校にまた入学するようになる. 結局小学校を 2番(回)入学したわけになって, 満 7歳に小学校に入学する. 小・の中で・高校時代をソウル特別市麻浦区孔徳洞一帯で過ごした. 中学校 1年生頃, 柳永哲のお父さんが死亡して, 柳永哲と兄弟たちは生母と合した. 柳永哲のお母さんが子供達の面倒を見る保姆に暮しを立てた. 柳永哲は継母下に住んだ時代より行色がずっとましに見えた.
小学校に入学した柳永哲は平凡な学生時代を過ごした. 生活記録部にはものがなくて "エオルン" のようだったという話が残されている. 絵と運動に素質を見せた児だったが, 後で開かれる生を予告するように特に蛙を捕って首を拗って解剖するのが好きだった. 動物に関心が高かった柳永哲は友達に医者になると誇った.
中学校に入学しては実の母と家庭を立てて前より明るくなった姿を見せた. しかしけんかがお上手だった柳永哲は周辺高等学校の暴力組職とけんかをして, 善導部班長を引き受けてタバコを吸う学生を見れば先輩でもひざまずくようにした. 教師代わりに教師に酷い目に会っていた学生を暴行をはたらくなど, 柳永哲の暴力性が見え始めた. とうとう世運商店街で不法 LP版を盗んで出る友達には "どうせ不法だから節度ではない"と言う言葉を残した.
その後画家を夢見た柳永哲は芸術高等学校に支援したが落ちると挫折したしその後では国際工業高等学校に入学したが 2年生の時の 1988年 8月 23日節度で拘束されて少年院に入った後結局学校を学校をやめた.
以後 1991年, 何回窃盗罪で刑務所を出入りする雑犯になった柳永哲は 1993年黄氏という女と結婚したが, 結婚数ヶ月ぶりにまた窃盗罪で刑務所に入った.
出所した柳永哲は 1994年 10月息子(現在 28歳)を男の子をもうけた以後朝にはウェディングショップ写真館で働いて夜には不法擾廃事業主たちを相手で警察官を騙りながら金品かっさらいをした. 1994年 11月彼の二番目兄さん(型)が漢江で飛びこみ自殺をしたと記者に話した
1969年 4月 17日, 全羅北道長水郡で農業に携わる家庭の 5男 4女の中で七番目で生まれたし, 中学校を卒業した後一人きり南原で一人暮らしして商業高等学校を通った.
そうして高等学校 2年生の時全家族が仁川広域市に引っ越すようになると栄進商業高等学校に転校した. 彼の学生時代成績は中下位圏にとどまったし, 高等学校卒業後 4ヶ月間飲み物工場に通ったりしたが職場生活に適応ができなくてやめて堂堂と精米所でベダルイルをするとか建築工事現場で仕事をしたりした. 以後軍入隊をしたし陸軍下賜で満期除隊(1992)した. 以後何の職業なしに生活したし, お辞儀もなど犯罪行為で生計を立てて来た.
ゾングナムギュは幼い時代お父さん(1999年死亡)の絶えない暴行と自分を大事にしてくれた町内おじさんからセクハラと性暴行[9], セクハラにあった事で学校生活によく適応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 高等学校在学の中には同級生や先輩たちに集団いじめと学校暴力を経験したし後輩たちに無視される事も頻繁だった. 高等学校在学の中で自炊の部屋横に住んだおじさんに二回も性暴行にあったと言う. 軍隊服務時代にも先任たちに苛酷行為とひどい殴りを経験したし一先任には再び性暴行にあった. 後任たちには騎手列外にあうなど余分の全域後ソーシャルライフを苦しがって社会に対する復讐心で犯罪の沼にはまるようになった.
彼は 1989年 4月特殊鋼盗罪で懲役 2年 6ヶ月, 執行猶予 4年, 1994年窃盗罪で懲役 8ヶ月, 執行猶予 2年及び罰金 20万ウォンなどの宣告を受けた後, 1996年性暴行犯罪の処罰及び被害者保護などに関する法律違反罪で懲役 2年 6月, 1999年性暴行犯罪の処罰及び被害者保護などに関する法律違反罪(節度, 強姦など) 懲役 2年, 2002年窃盗罪で懲役 10月など総 3年 4ヶ月間刑務所に収容された経験があった.
30代時代にはお母さん, 親お姉さんと 3人で一緒に暮したが家族の中で職場を持った人がなくて基礎生活受給者でお母さん名義の古い住宅に付いた部屋を賃貸しして受ける家賃 55万ウォンが収入の全部だった.
要約しようとすると貧乏, 家庭暴力, 性暴行, 学校暴力, 苛酷行為, 集団村八分など無惨な暴力たちを全部経験したとても暗鬱な人生を暮したと言える. 典型的な被害者が加害者になった切ない事例だがそれにもかかわらずこのような過去が自分と何らの関係もない罪のない人々を殺害した彼の罪たちを政党化させることはできない. 快楽殺人は環境の問題では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