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정치」의 조선 총독, 사이토마코토(마코토)의 후임으로서 제6대 총독(쇼와 611년)으로 취임한 우가키 카즈나리(가 나무·수 무성해)(18681956년)가 진행한 조선의 농업 진흥책에 「남면북양」이 있다.
남부에서는, 면화의 재배를 촉진.북부에서는, 면양(째응나름)(가축용의 양)를 길러 부가가치가 높은 농, 축산품인 면사·양모의 생산 확대를 도모하는 정책이다.
고래, 조선에서 재배를 하고 있던면화는,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남부 6개의 길을 중심으로대증산 계획이 진행되었지만,면양의 사육에 대해서는, 거의 실적이 없다(쇼와 8년의 전조선으로의 면양의 수는 2700마리미만).이 때문에, 면양의 일대 생산지인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배편으로 수입을 도모하는 플랜을 세울 수 있었다.
면양을 실은 화물선이, 먼길 멀리 태평양을 북상해, 조선 동해안의 웅기, 기요쓰, 원산등의 항구에 양륙.철도로, 북부·함경북도의 국책 회사·동양 척식 회사 목장등에 옮겨 사육해, 양모를 벤다 .
이 조선 전용의 면양의 수출을 취급한 것은 일호 무역에 실적이 있던 종합상사의 카네마츠였다.제1선의 「자오양환」이 약 2700마리의 면양을 쌓아 호주 시드니를 출발한 것은, 쇼와 9년 4월 24일의 일로 있다.
첫 일인 만큼, 만전을 기한 것일 것이다.「자오양환」에는 당시 , 카네마츠의 호주·현지 법인에서 양모 담당의 책임자였던 소노근일(킹이치)(18991943년)가 타, 조선까지 시중들고 있다.
품종은, 양모의 질이야말로 중간 정도면서 적응력이 뛰어난 코리데이르종.근일의 장남으로, 역시 카네마츠 OB의 소노 고 남편(타케오)(84)가 쓴 「사진으로 말하는 일호사 쇼와 전쟁 전편」에 의하면, 고생이 많았던 것 같다.적도 직하를 가는 배의 데크로 열기에 당해 죽어 버리는 면양도 있었다.제2선 이후는 항해시의 기후를 고려하거나 데크에 좋아 두를 치거나 하는 궁리를 겹쳤다고 한다.
이렇게 해 스타트한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조선에의 면양의 수출은, 순조롭게 회를 거듭해 대 영미 전쟁이 시작된 쇼와 16년에 중단을 피할 수 없게 될 때까지 약 4만 5 천마리가 태평양을 넘어 간다.
조선에서 총독의 우가키에 면회한 근일은, 이렇게 역설했다고 한다.《(조선) 각지에서의 양목장 경영이의료급(야)식료의 양면으로부터민생의 안정과 향상에 많이 도움이 되는》( 「사진으로 말하는 일호사 쇼와 전쟁 전편」)와.
◆수탈 하는 것이 없다
2년전, 한국의 미디어는, 이 「남면북양」에 대해서,일본 통치 시대의 기록 영화 「북조선의 양은 말한다」(쇼와 9년)등의 영상 자료가 발견되었다고 하는 뉴스를 일제히 알렸다.
영화에는, 소노근일이 동행한 루트 그대로,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배로 수입된 면양이 짐싣기 되어 목장에서 사육된 것, 털을 베고 천을 짜는 님 아이등이 기록되고 있었다.「양모 수입을 위해서, 매년 2억엔이 사용된다.수입 대체를 위해서 노력하자」라고 하는 자막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국 미디어의 톤은, 물론(?) 네가티브다.내지(일본)에서도 거의 양모의 생산을 하지 못하고, 대부분을 수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그러니까, 조선의 싼 노동력을 이용해 일본 제조업의 원료 공급지로 하는 목적으로, 남쪽에서는 면화를, 북쪽에서는 양을 기르도록(듯이) 한 즉, 뭐든지 물어도 일제에 의한 수탈로 해 버리지만, 과연 정말로 그런가?
한일합방(메이지 43년) 이전의조선에는 산업인것 같은 산업도 없었다.유교의 사상에 의해서 상공업은 멸시 되어 농업에서는 숲을 구워 비료로 하는 「화전민」(화전 농업)이라고 하는 전근대적인 농법을 많이 볼 수 있었다.즉,「수탈」하고 싶어도 하는 것이 없다.일본이 한 것은 「공여」해 「육성」하는 것이었다.내지의 일반회계로부터도 거액의 자금을 돌려, 우수한 인재와 기술을 공급해, 빨리 근대화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제1차 산업분야에서는,대머리산에 식림을 해, 관개(감개) 설비를 만들어, 간척이나 개간으로 경지를 늘린다.동양1의 화학 비료 공장을 건물 수량을 올린다.특히, 미는 「조선산 쌀 증식 계획」을 정하고 증산에 노력해 타이쇼 10년의 년산액은 약 1430 망고쿠(병합 당시의 약 40%증), 품질도 향상했다.조선의 농업은 효율화, 근대화 되어 모든 지표가 비약적으로 성장한 것인다.
거기에, 조선을 병참(에 있던 ) 기지로 하는 국책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하지만, 한일합방전의 돈·커넥션의 정치 부패에 의해서, 그야말로 조선의 관리등에 「수탈」되고 있던농민의 생활은 아득하게 개선되었다.그 증거로 일본 통치 시대의 사이에 농민이 약 8할을 차지하는 조선의 인구는 급증(2배 미만)하고 있다.
인구증가에는, 영국의 여류 여행 작가의 「조선 기행」으로중국의 도시에 뒤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심하다라고 혹평되고 있던거리나 주민의 「위생 환경 개선」도 공헌하고 있다.근대 의학의 의사등 거의 있지 않고, 감염증의 만연(만인연(테))에 가끔 괴로워하고 있던조선 전 국토에 병원을 지어 각 도시에 상수도를 마련했던 것도 일본이다.예를 들면 끝이 없다.
◆아버지의 「추억의 신사복」
조선의 목장에서 자란 첫 호주 면양의 양모는, 기요쓰에서 입찰을 해 4사가 응찰 했지만, 면양의 수출을 하청받은 카네마츠가 체면에 걸쳐 낙찰했다.
「사진으로 말하는 일호사 」에 의하면, 그 양모는 내지에서 방출되어 차, 초록 등 4 계통의 모직물이 되고, 조선 총독등에 주어졌다고 한다.제1선에 동승 한 시드니의 소노근일에도, 그 천이 보내져 왔다.
후에, 상사 맨이 된 장남 고 남편은, 그 천으로 지은 신사복을 입고, 세계를 이리저리 다녔다.헤세이 2년에 호주 카네마츠가 100주년을 맞이했을 때의 기념식전에도 그 신사복을 입고 갔다고 한다.고 남편은 말한다.「해군의 군속으로서 아버지가 전사(쇼와 18년)했을 때는 아직 국민 학교(초등학교) 생이었습니다.아버지의 추억이 별로 없는 나에게 있어서, 이 신사복은 정말로 중요한 것으로, 장수 해 주었어요」
해협을 넘어 조선의 근대화에 공헌한 것은 사람 만이 아니었다.=경칭생략, 토요일 게재(문화부 편집 위원 키타유호)
「文化政治」の朝鮮総督、斎藤実(まこと)の後任として第6代総督(昭和6~11年)に就任した宇垣一成(うがき・かずしげ)(1868~1956年)が進めた朝鮮の農業振興策に「南綿北羊」がある。
南部では、綿花の栽培を促進。北部では、緬羊(めんよう)(家畜用の羊)を育て、付加価値の高い農、畜産品である綿糸・羊毛の生産拡大を図る政策だ。
古来、朝鮮で栽培が行われていた綿花は、全羅南道、慶尚南道など南部6つの道を中心に大増産計画が進められたが、緬羊の飼育については、ほとんど実績がない(昭和8年の全朝鮮での緬羊の数は2700頭弱)。このため、緬羊の一大生産地であるオーストラリアから船便で輸入を図るプランが立てられた。
緬羊を乗せた貨物船が、遠路はるばる太平洋を北上し、朝鮮東岸の雄基、清津、元山などの港に陸揚げ。鉄道で、北部・咸鏡北道の国策会社・東洋拓殖会社牧場などへ運んで飼育し、羊毛を刈る…。
この朝鮮向けの緬羊の輸出を扱ったのは日豪貿易に実績があった総合商社の兼松だった。第1船の「朝陽丸」が約2700頭の緬羊を積んで豪シドニーを出発したのは、昭和9年4月24日のことである。
初めてのことだけに、万全を期したのであろう。「朝陽丸」には当時、兼松の豪・現地法人で羊毛担当の責任者だった曽野近一(きんいち)(1899~1943年)が乗り込み、朝鮮まで付き添っている。
品種は、羊毛の質こそ中程度ながら適応力に優れたコリデール種。近一の長男で、やはり兼松OBの曽野豪夫(たけお)(84)が書いた『写真で語る日豪史 昭和戦前編』によれば、苦労が多かったらしい。赤道直下を行く船のデッキで熱気にやられ、死んでしまう緬羊もいた。第2船以降は航海時の気候を考慮したり、デッキによしずを張ったりする工夫を重ねたという。
こうしてスタートしたオーストラリアから朝鮮への緬羊の輸出は、順調に回を重ね、対英米戦争が始まった昭和16年に中断を余儀なくされるまで約4万5千頭が太平洋を越えてゆく。
朝鮮で総督の宇垣に面会した近一は、こう力説したという。《(朝鮮)各地での羊牧場経営が衣料及(およ)び食料の両面から民生の安定と向上に大いに役立つ》(『写真で語る日豪史 昭和戦前編』)と。
◆収奪するものがない
2年前、韓国のメディアは、この「南綿北羊」について、日本統治時代の記録映画『北鮮の羊は語る』(昭和9年)などの映像資料が見つかったというニュースを一斉に報じた。
映画には、曽野近一が同行したルートそのままに、オーストラリアから船で輸入された緬羊が荷揚げされ牧場で飼育されたこと、毛を刈って生地を織る様子などが記録されていた。「羊毛輸入のために、毎年2億円が使われる。輸入代替のために努力しよう」という字幕もあったという。
ただし、韓国メディアのトーンは、もちろん(?)ネガティブだ。内地(日本)でもほとんど羊毛の生産ができず、多くを輸入に頼るしかない。だから、朝鮮の安い労働力を利用して日本製造業の原料供給地にする目的で、南では綿花を、北では羊を育てるようにした…つまり、何でもかんでも日帝による収奪にしてしまうのだが、果たして本当にそうか?
日韓併合(明治43年)以前の朝鮮には産業らしい産業もなかった。儒教の思想によって商工業は蔑視され、農業では森を焼いて肥料にする「火田民」(焼き畑農業)という前近代的な農法が多くみられた。つまり、「収奪」したくともするものがない。日本がやったのは「供与」して「育成」することだった。内地の一般会計からも巨額の資金を回し、優秀な人材と技術を供給し、せっせと近代化を進めたのである。
第1次産業分野では、はげ山に植林をし、灌漑(かんがい)設備をつくり、干拓や開墾で耕地を増やす。東洋一の化学肥料工場を建て収量を上げる。とりわけ、米は「朝鮮産米増殖計画」を定めて増産に努め、大正10年の年産額は約1430万石(併合当時の約40%増)、品質も向上した。朝鮮の農業は効率化、近代化され、あらゆる指標が飛躍的に伸びたのである。
そこに、朝鮮を兵站(へいたん)基地とする国策がなかったとは言わない。だが、日韓併合前のカネ・コネの政治腐敗によって、それこそ朝鮮の官吏らに「収奪」されていた農民の暮らしははるかに改善された。その証拠に日本統治時代の間に農民が約8割を占める朝鮮の人口は急増(2倍弱)している。
人口増には、英国の女流旅行作家の『朝鮮紀行』で中国の都市に次ぎ世界で2番目にひどいと酷評されていた街や住民の「衛生環境改善」も貢献している。近代医学の医師などほとんどおらず、感染症の蔓延(まんえん)にたびたび苦しんでいた朝鮮全土に病院を建て、各都市に上水道を設けたのも日本である。例を挙げればキリがない。
◆父の「思い出の背広」
朝鮮の牧場で育った初めての豪州緬羊の羊毛は、清津で入札が行われ、4社が応札したが、緬羊の輸出を請け負った兼松がメンツにかけて落札した。
『写真で語る日豪史…』によれば、その羊毛は内地で紡出され、茶、緑など4系統の毛織物となって、朝鮮総督らに贈られたという。第1船に同乗したシドニーの曽野近一にも、その生地が送られてきた。
後に、商社マンとなった長男の豪夫は、その生地で仕立てた背広を着て、世界を駆け回った。平成2年に豪州兼松が100周年を迎えたときの記念式典にもその背広を着ていったという。豪夫はいう。「海軍の軍属として父が戦死(昭和18年)したときはまだ国民学校(小学)生でした。父の思い出があまりない私にとって、この背広は本当に大切なもので、長生きしてくれましたよ」
海峡を越えて朝鮮の近代化に貢献したのは人だけではなかった。=敬称略、土曜掲載(文化部編集委員 喜多由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