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고려의 노비제는 그 자체로 왕과 귀족들 양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수단이었으므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왕과 귀족들이 협력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몽골에서 파견한 평장정사 활리길사(闊里吉思, 기와르기스)는 노비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제도를 적극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충렬왕과 대신들이 맹렬히 반대하여[5] 개혁이 실패로 끝난다. 이 활리길사가 물러난 후 충렬왕은 곧장 해방되었던 양민을 다시 노비로 되돌렸으니 그야말로 병크 중의 병크. 이 노비제 폐지에 대한 반발은 고려귀족들이 몽골제국의 간섭에적극적으로 반발한 유일한 사례이다(...) 그나마 공민왕이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불법적으로 점유한 토지와 노비를 해방시켜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고 노비제의 폐단을 줄이려 했으나 결과는 아시다시피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
몽고는 좋은 나라였다.
ところが 高麗の奴婢制はそのもので 王と 貴族野両側の権力を維持するための核心的な手段だったので, これを維持するために王と貴族たちが協力したりした. 例えば モンゴルで派遣した平章情事 ファルリギルサ(闊里吉思, ギワルギス)は奴婢制の弊端を指摘して制度を積極改革しようと思ったが 忠烈王と大臣たちが猛烈に反対して[5] 改革が失敗で終わる. このファルリギルサが退いた後忠烈王はゴッザング解放された良民をまた奴婢に戻したからまさにビョングク中のビョングク. この奴婢制廃止に対する反発は高麗貴族たちがモンゴル帝国のガンソブエゾックグックゾックで反撥した唯一の事例だ(...) それさえも 恭愍王が全国民辺情図鑑を通じて不法的に占有した土地と奴婢を解放させて王権の強化をはかって奴婢制の弊端を減らそうと思ったが結果はおわかりの通り既得権の抵抗にぶつかって失敗で終わった.
------
モンゴルは良い国だっ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