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200명을 진실의 역사로 한다.
조선 광복군은 연합국군은 될 수 없었다
1941년이 되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해, 한국 광복군을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참전시켰다」라고 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게다가, 다음과 같이 계속 됩니다.
「영국군의 협력 요청으로 인도,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광복군은 주로 선전 활동이나 포로의 심문을 담당했다.또, 미국과 연합 해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했다.(중략) 그러나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했기 때문에, 국내 진공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의하면, 그 「한국 광복군」되는 것은, 일본군과 전장에서 싸운 것은 아니고, 인도나 미얀마(버마)에 파견되어 「주로 선전 활동이나 포로의 심문을 담당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즉, 항일 세력의 일부가 영미의 첩보 기관(영국 MI6, 특수 공작국〈SOE〉, 미국 전략 정보국〈OSS〉)에 리크루트 되어 일본군안에 있는 한반도 출신자 전용의 선전 제작을 실시하거나 조선어에 의한 심문을 하거나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군」이라고 하는 규모도 아니고, 내용도 군사활동은 아니고 첩보활동이었던 (일)것은 분명합니다.
실제로 미국측의 자료를 읽으면, 「조선 광복군」(Korean RestorationArmy)는 존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쥬우케이를 만나 중국군일위원회(Chinese Military Council)의 지휘하에 있었습니다.즉, 독립의 군사 조직이 아니고, 중국 국민당군 속의 1 조직이었습니다.인원수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이 조직내에서는, 모아도 200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만주에도 별조직의 「조선 광복군」이 있었습니다만, 이쪽은 3천 정도입니다.역시 독립 조직이 아니고, 중국 공산당 게릴라와 함께 되어 있었습니다.아마 이쪽의 「조선 광복군」으로부터 현재의 북한의 주춧돌을 쌓아 올린 지도자가 나왔겠지요.
왜, 「한국 광복군」(교과서에는 그렇게 있다) 되는 것이 일부러 인도나 미얀마에 파견되어 「주로 선전 활동이나 포로의 심문을 담당했다」의 것인지수수께끼를 이것으로 풀 수 있습니다.중국병과 함께 안 되는 한, 만주나 중국의 전장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인원수에 도저히 달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일본과 싸우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이 미국의 입장
たった200名を真実の歴史とする。
朝鮮光復軍は連合国軍とはなりえなかった
1941年になると「大韓民国臨時政府は日本に宣戦布告し、韓国光復軍を連合国の一員として参戦させた」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ます。しかも、次のように続きます。
「イギリス軍の協力要請でインド、ミャンマー戦線に派遣された光復軍は主に宣伝活動や捕虜の尋問を担当した。また、アメリカと連合して国内進攻作戦を計画した。(中略)しかし日本が予想より早く降伏したため、国内進攻作戦は実行されなかった」
またしてもこの教科書は、臨時政府が国家であるとミスリードしています。「宣戦布告」といっているからです。そのずっと前から抗日運動はしていて、日本と戦う意思、その大義は唱えていたのですから、わざわざ1941年になってこれを出したのは、臨時政府が国であり、その軍隊「韓国光復軍を連合国の一員として参加させた」、だから連合国の一員だといいたいのです。
ところが、韓国の歴史教科書によると、その「韓国光復軍」なるものは、日本軍と戦場で戦ったのではなく、インドやミャンマー(ビルマ)に派遣されて「主に宣伝活動や捕虜の尋問を担当した」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抗日勢力の一部が英米の諜報機関(イギリスMI6、特殊工作局〈SOE〉、アメリカ戦略情報局〈OSS〉)にリクルートされ、日本軍の中にいる朝鮮半島出身者向けのプロパガンダ製作を行ったり、朝鮮語による尋問をしたりしたということです。「軍」という規模でもなく、内容も軍事活動ではなく諜報活動だったことは明らかです。
実際にアメリカ側の資料を読みますと、「朝鮮光復軍」(Korean Restoration Army)は存在したのですが、それは重慶にあって中国軍事委員会(Chinese Military Council)の指揮下にありました。つまり、独立の軍事組織ではなく、中国国民党軍のなかの一組織だったのです。人数にいたっては、少なくともこの組織内では、かき集めても200人にしかならなか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
満洲にも別組織の「朝鮮光復軍」がありましたが、こちらは3千ほどです。やはり独立組織ではなく、中国共産党ゲリラと一緒になっていました。おそらくこちらの「朝鮮光復軍」から現在の北朝鮮の礎を築いた指導者が出てきたのでしょう。
なぜ、「韓国光復軍」(教科書にはそうある)なるものがわざわざインドやミャンマーに派遣され「主に宣伝活動や捕虜の尋問を担当した」のか謎がこれで解けます。中国兵と一緒にならない限り、満州や中国の戦場で日本軍と戦う人数にとても達しなかったのです。
「韓国は日本と戦っていない」というのがアメリカの立場
のちにアメリカ国務長官顧問ジョン・フォスター・ダレスは、李承晩が「署名国として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会議に参加したい」と要求したとき「韓国は日本と戦争状態にあったことはなく、連合国共同声明にも署名していない」としてこれを拒否しますが、それがなぜなのかよくわかります。つまり、連合国として日本軍と戦ったというに値する実績が韓国にないのです。だから会議に参加する資格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朝鮮にくらべればフィリピン、ビルマ(現在のミャンマー)、インドネシア、マレーシアの方が日本軍と戦ったしっかりした実績をもって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