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입구에서
아우슈비츠와 제2 아우슈비츠인 멸종 수용소 비르케나우의 견학.
게다가 수용소 살아 남을 수 있던 캐롤·텐데라씨와의 귀중한 체험을 (듣)묻는 간담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말해 본 아우슈비츠로부터, 몸의 털의 것다 개 무서움이 체내를 쌌습니다.광대한, 시스템화 된 살인 공장입니다.
많은 중학생이나 고교생 같은 아이들이, 선생님의 인솔로 견학하러 오고 있어 평화의 학습의 장소가 되어 있는 것을 실감했습니다.아우슈비츠를 잊어서는 안되는, 그 쿠가미라고의 대처를 엿보았습니다.
비르케나우 멸종 수용소의 죽음의 문
그런데, 아우슈비츠나 비르케나우 수용소의 잔인한 행위, 상상도 할 수 없는 듯한 사람축에 들지 못한 사람 사이적 대량학살에 대해서는, 여러분용서대로입니다.
오늘 밤은, 거기를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카로르텐데라씨(92세)의 증언을 보고하기로 하겠습니다.
쿠라크후로 태어나 자란 폴란드인입니다.
캐롤씨는, 고등학교 때 독일인이 「30명의 학생을 낼 수 있다」라는 강요로 그 중에 선택되어탄약고의 창고에서 강제 노동으로 일했습니다.
1943년, 아우슈비츠에 보내졌습니다.
가혹한 취급해 , 전기가 개통된 유자 철선에 뛰어들어 자살한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탈주한 동료는 잡혀 처형되었습니다.
아침은 커피의 찌꺼기와 같은 스프, 낮은 야채의 조금 들어간 썩은 것 같은 조림과 같은 것, 빵은 반은 톱밥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카포들이 스프를 나눌 때, 해들 봐가 있다 화도나 검사해, 스프를 채택했습니다.
(변도 일렬에 줄서 10초에 콘크리트에 줄서 열린 구멍으로 할 뿐.변은 쌓인다.처음은 개수대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티푸스에 걸려 죽는다.카포는 그것이 무서워서, 화장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그 만큼, 거기가 죄수의 정보의 교류의 장소나 되었다고 한다)
화장실
복도에서 체육의 점프를시켜, 움직일 수 없으면 살해당했습니다.약해지고 있는 사람은 매우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캐롤씨는 인체실험도 되었다고 합니다.주사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 후, 비르케나우 옮겨졌다.아우슈비츠에서(보다) 지옥이었다.하나의 발락에 500명 정도 수용.화장실은 없고 물통 하나.물도 이루어, 난방도 없음.
이것이 3단 침대, 몸의 약한 사람은 위에 오르지 못하고 최악의 콘크리트 위에서 자고, 빨리 사망 당했습니다.
여름은 37도, 겨울은 영하 20도.
일단에 7명 담겨 난방은 없고, 의류도 죄수옷한 장.여름은 환기가 나쁘게 최악이었다.
언제나 죽음과 이웃하는 생활.
「살아난 것은···?」라고 (들)물으면
운과 사람의 버팀목.
총살의 벽에 언제 데리고 가지는지, 무서웠다.데려가지는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우연히 선택되는 운.
인체실험의 뒤, 중노동이 힘들었다.나카이다가 지탱해 주었다.동료의 버팀목이 없었으면, 나도 자살해 있었다.
어떤 희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성이나 있어 연못인 아이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현재의 독일인에 원한은 없다.
우리에게 메세지는?
「젊은 분에게 아우슈비츠를 전했으면 좋겠다.나쁜 사람은 정치가로 해서는 안된다.세계가 지금 위험하다.배려했으면 좋겠다」
몹시 무거운, 귀중한 체험이었습니다.카를로스씨의 메세지를 확실히 받아 들이고 싶다.
그리고, 아우슈비츠안에서도, 레지스탕스로 싸운 사람이 있던 것은, 위협입니다.나라면 할 수 있었을 것인가.소박한 의문이 머리를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캐롤씨는, 와이셔츠를 걸어, 팔에 붉힐 수 있었던 죄수 번호를 보여주셨습니다.
アウシュビッツ入り口で
アウシュビッツと第二アウシュビッツである絶滅収容所ビルケナウの見学。
さらに、収容所生き残ることができたカロル・テンデラさんとの貴重な体験をお聞きする懇談がありました。
実際にいってみたアウシュビッツから、身の毛のよだつ恐ろしさが体中を包みました。広大な、システム化された人殺し工場です。
たくさんの中学生や高校生らしき子どもたちが、先生の引率で見学に来ており、平和の学習の場になっていることを実感しました。アウシュビッツを忘れてはいけない、その国上げての取り組みを垣間見ました。
事実を隠す日本とは天と地の差です。
ビルケナウ絶滅収容所の死の門
さて、アウシュビッツやビルケナウ収容所の残忍な行為、想像もできないような非人間的ホロコーストについては、皆さん御承知のとおりです。
今晩は、そこを生き抜けたカロルテンデラ氏(92歳)の証言を報告することにします。
クラクフに生まれ育ったポーランド人です。
カロル氏は、高校のときドイツ人が「30人の学生を出せ」との強要でその中に選ばれ、弾薬庫の倉庫で強制労働で働きました。
1943年、アウシュビッツに送られました。
過酷な扱いに、電気の通った有刺鉄線に飛び込んで自殺した人もたくさんいました。
脱走した仲間は捕まって処刑されました。
朝はコーヒーの残りかすのようなスープ、昼は野菜の少し入った腐ったような煮物のようなもの、パンは半分は木屑が入っていました。
食料を与えないのも、殺すため。強制労働も殺すため。「食べないで、きつい労働すれば早く死ぬ。効率的」ということです。
例えばカポたちがスープを分けるとき、しらみがあるかどうか検査し、スープを取り上げました。
(便も一列に並んで10秒でコンクリートに並んで開けられた穴にするだけ。便はたまる。最初は流しもしなかったので、チフスにかかって死ぬ。カポはそれが怖くて、トイレには入らなかった。その分、そこが囚人の情報の交流の場ともなったという)
トイレ
廊下で体育のジャンプをさせ、動けないと殺されました。弱っている人はとてもできることではなかった。
カロル氏は人体実験もされたそうです。注射され動けなくなった。
その後、ビルケナウに移された。アウシュビッツより地獄だった。一つのバラックに500人くらい収容。トイレはなくバケツ一つ。水もなし、暖房もなし。
これが3段ベッド、体の弱い人は上に上がれず最悪のコンクリートの上で寝て、早く死亡させられました。
夏は37度、冬は氷点下20度。
一段に7人詰め込まれ、暖房はなく、衣類も囚人服一枚。夏は換気が悪く最悪だった。
いつも死と隣り合わせの暮らし。
「助かったわけは・・・?」とお聞きすると
運と人の支え。
仕事が台所(まかない)だったのも運。仲間が支えてくれた。3秒違ってあそこにいけば・・・・あの時こっちにいたらいたら・・・・その偶然が運というか、助かった。
銃殺の壁にいつ連れて行かれるか、恐ろしかった。連れていかれる理由は何もない。たまたま選ばれる運。
人体実験の後、重労働がきつかった。仲間が支えてくれた。仲間の支えがなかったら、私も自殺していた。
何の希望も持っていなかった。
女性やいたいけな子どもまで平気でガス室に入れた。神は存在しないと思った。
私は無宗教になった。人が助け合うことが大事、宗教などいらない。神父さんなど、人間として尊敬する人はいるが、宗教からではない。
しかし、現在のドイツ人にうらみはない。
我々にメッセージは?
「若い方にアウシュビッツを伝えて欲しい。悪い人は政治家にしてはいけない。世界が今危ない。気を配って欲しい」
大変重い、貴重な体験でした。カルロスさんのメッセージをしっかり受け止めたい。
安倍政権のやろうとしていることは,この道への復活以外なにものでもない。
そして、アウシュビッツの中でも、レジスタンスで戦った人がいたことは、脅威です。私だったらできただろうか。素朴な疑問が頭を離れませんでした。
最後に、カロルさんは、ワイシャツをまくり、腕に染められた囚人番号を見せてください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