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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개발에 인생을 바친 핫타여일이 몰

쇼와 17년(1942) 5월 8일, 핫타여일(붙였다한)이 잠겼습니다.카라스야마두(근심응 묻는다) 댐을 건설해, 대만의 사람들로부터 지금도 계속 존경받는 일본인입니다.핫타여일에 대해서는 현재 발매중의 「역사 가도」에서도 총력 특집을 짜고 있습니다만, 여기에서도 조금 소개하겠습니다.

지금도 「대만에서 가장 존경받고 있는 일본인」이라고 칭해지는 핫타여일.그의 공적은 대만의 교과서에, 사진 첨부로 소개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핫타는 메이지 19년(1886), 이시카와현 카호쿠군 하나조노무라(현재의 카나자와시 이마이치)로 태어났습니다.메이지 43년(1910)에 도쿄 제국대학 공학부 토목과를 졸업해, 대만 총독부 내무국 토목과의 기수로서 근무합니다.덧붙여서 당시의 대만은 청일 전쟁 후에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에 의해, 메이지 28년(1895)부터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일본은 대만의 개발과 근대화에, 정면에서 임하고 있습니다.

대만 총독부·초대 민정 장관 고토 신페이의 활약등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입니다.핫타도 그 생애의 대부분을 대만에서 지내, 대만의 개발에 인생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그 최대의 일은, 가미나미히라노에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 관개 공사입니다.15만 헥타르에도 미치는 가미나미히라노는, 하천이 적기 위해(때문에) 심각한 한발의 위험하게 항상 노출된 불모의 토지로 여겨져 왔습니다.농민들은 물부족에 골치를 썩이면서, 궁핍한 생활을 보내지 않을 수 없지 않고, 또 우기에는 반대로 홍수의 위험이 있다라고 하는, 치수 사업이 불가결의 장소에서 만났습니다.

핫타는 그 대규모 수리 공사의 지휘를 했습니다.댐을 건설해 수원을 확보해, 한층 더 수로를 평야에 종횡에 두르게 하고, 불모의 땅을 풍요로운 대지로 변모 시키려고 했습니다. 타이쇼 9년(1920)부터 시작된 공사는, 쇼와 5년(1930)의 완성까지 실로 10년에 달합니다만, 핫타는 선두지휘를 계속 맡았습니다.일본인도 대만인도 함께 되어 임해, 핫타는 스스로 솔선해 위험한 현장에도 발길을 옮기고, 공원들로부터도 독실하게 신뢰 받았다고 합니다.그 결과, 저수량 1억 5 천만 m^3의 대저수지·카라스야마두 댐과 가미나미히라노 일대에 16000 km에도 미치는 세세하게 두르게 한 수로가 마침내 완성, 이것들은 가남대?(도미 사람들)(으)로 불렸습니다.

이것에 의해서 적셔진 가미나미히라노는, 대만 최대의 비옥한 곡창지대로 다시 태어납니다.지금은 미 외에 사탕수수, 망고, 수박, 바나나등이 여물어, 미는 1년에 2 회수확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댐의 건설중, 낙반 사고등에서 134명이 희생이 되었습니다.그 위령비에는, 핫타의 강한 희망에 의해, 전원의 이름이 일본인과 대만인을 구별하는 일 없이, 죽은 차례로 조각해지고 있습니다.대만의 사람들은 핫타에의 감사의 기분을 담고, 댐이 완성한 다음 해에 핫타의 동상을 지었습니다.그 동상은 앉은 모습으로 오른손을 액의 맞아에 따를 수 있고 있습니다.핫타가 걱정거리를 하고 있을 때에, 잘 취하고 있던 포즈였습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중의 쇼와 17년(1942), 필리핀의 면작 관개 조사를 명령받은 핫타는, 「대양환」에 승선해 오도 열도 남방을 항행중, 미군의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배가 침몰, 뜻하지 않은 죽음을 이룹니다.향년 56.

그 3년 후의 쇼와 20년(1945) 8월, 패전을 맞이하고, 일본인은 대만에서 떠나게 됩니다.핫타여일의 처·외대수(와 좋은)는, 상심 중(안)에서, 남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카라스야마두 댐의 방수로에 몸을 던졌습니다.언제까지나 남편과 함께 아프다고 하는 생각으로부터입니까.향년 45.

대만의 사람들은, 핫타 부부의 슬픈 최후를 한탄해, 「핫타여일, 외대수지묘」라고 새겨진 묘석을 세우고, 조상했습니다. 매년, 핫타의 기일의 5월 8일에는 묘전제가 행해져 많은 대만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손을 모읍니다.

전일, 핫타의 동상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만, 대만에서 그 만큼 존경받고 있는 일본인이 있던 것을, 우리 일본인도 명심해 두고 싶은 것입니다.


台湾人は日本に感謝するのに南朝鮮は歴史を捏造して反日するのは何故ですか?

台湾の開発に人生を捧げた八田與一が没

昭和17年(1942)5月8日、八田與一(はったよいち)が没しました。烏山頭(うさんとう)ダムを建設し、台湾の人々から今も慕われ続ける日本人です。八田與一については現在発売中の「歴史街道」でも総力特集を組んでいますが、ここでも少しご紹介いたします。

今も「台湾で最も尊敬されている日本人」と称される八田與一。彼の功績は台湾の教科書に、写真入りで紹介されているそうです。 そんな八田は明治19年(1886)、石川県河北郡花園村(現在の金沢市今市)に生まれました。明治43年(1910)に東京帝国大学工学部土木科を卒業し、台湾総督府内務局土木課の技手として勤務します。ちなみに当時の台湾は日清戦争後に締結された下関条約により、明治28年(1895)から日本の統治下にありました。日本は台湾の開発と近代化に、正面から取り組んでいます。

台湾総督府・初代民政長官の後藤新平の活躍なども知る人は多いでしょう。八田もその生涯のほとんどを台湾で過ごし、台湾の開発に人生を捧げることになりました。 その最大の仕事は、嘉南平野に農業用水を供給するための、灌漑工事です。15万ヘクタールにも及ぶ嘉南平野は、河川が少ないために深刻な旱魃の危険に常にさらされた不毛の土地とされてきました。農民たちは水不足に悩まされながら、貧しい生活を送らざるを得ず、また雨期には逆に洪水の危険があるという、治水事業が不可欠の場所であったのです。

八田はその大規模な水利工事の指揮をとりました。ダムを建設して水源を確保し、さらに水路を平野に縦横に張り巡らせて、不毛の地を豊饒な大地へと変貌させようとしたのです。 大正9年(1920)から始まった工事は、昭和5年(1930)の完成まで実に10年にも及びますが、八田は陣頭指揮を執り続けました。日本人も台湾人も一緒になって取り組み、八田は自ら率先して危険な現場にも足を運んで、工員たちからも篤く信頼されたといわれます。その結果、貯水量1億5千万㎥の大貯水池・烏山頭ダムと、嘉南平野一帯に16,000kmにも及ぶ細かく張り巡らせた水路がついに完成、これらは嘉南大圳(たいしゅう)と呼ばれました。

これによって潤された嘉南平野は、台湾最大の肥沃な穀倉地帯へと生まれ変わります。今では米の他にサトウキビ、マンゴー、スイカ、バナナなどが実り、米は年に2回収穫できるそうです。

ダムの建設中、落盤事故などで134人が犠牲となりました。その慰霊碑には、八田の強い希望により、全員の名前が日本人と台湾人を区別することなく、亡くなった順番で彫られています。台湾の人々は八田への感謝の気持ちを込めて、ダムが完成した翌年に八田の銅像を建てました。その銅像は座った姿で右手を額のあたりに添えています。八田が考え事をしている時に、よくとっていたポーズでした。

しかし太平洋戦争中の昭和17年(1942)、フィリピンの綿作灌漑調査を命じられた八田は、「大洋丸」に乗船して五島列島南方を航行中、アメリカ軍の潜水艦の魚雷攻撃を受けて船が沈没、不慮の死を遂げます。享年56。

その3年後の昭和20年(1945)8月、敗戦を迎えて、日本人は台湾から去ることになります。 八田與一の妻・外代樹(とよき)は、傷心の中で、夫が心血を注いでつくりあげた烏山頭ダムの放水路に身を投げました。いつまでも夫とともにいたいという思いからでしょうか。享年45。

台湾の人々は、八田夫妻の悲しい最期を嘆き、「八田與一、外代樹之墓」と刻まれた墓石を建てて、弔いました。 毎年、八田の命日の5月8日には墓前祭が行なわれ、多くの台湾の人々が訪れて、手を合わせます。

過日、八田の銅像についてはたいへん残念な事件がおこりましたが、台湾でそれだけ慕われている日本人がいたことを、私たち日本人も心に留めておきたいもの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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