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는 중원의 세력이 대체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북방 민족의 침입이 골칫거리였다.
오히려 고려초기에는 북방의 해적(거란, 요의 해적이 고려와 일본을 자주 약탈했다.)을 고려군이 토벌하면서
일본에서 납치된 사람들을 일본으로 송환해 주거나 했고, 고려도 북방 방어에 노력해야 했기 때문에 일본과 상당히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우호적 분위기도 쿠빌라이칸의 고려 정벌 이후로 깨졌지만....
몽고가 물러가고 나서도 고려 말에는 알다시피 일본 해적의 발호로 계속 분위기 안좋고...
朝鮮 초기에도 일본은 조선의 건국을 축하해 주는 태도를 취했고, 일부 쇼군들은 조선의 교린 정책에 협조, 朝鮮과의 적극적 교역을 통해
자신의 영지를 강하게 만드려고 적극적으로 외교를 하기도 했다.
세종때에 대마도 정벌을 했지만, 일본 해적이 朝鮮만 괴롭힌 것도 아니고 일본 해안에서도 약탈을 하는 골칫거리였기 때문에, 양국의 중앙정부가 사이가 나쁠 것은 없았다. (단지... 도적들 관리 좀 해줘...라고 朝鮮이 일본에 요구하면... 일본은 그럴 여력까지는 없다... 우리는 시스템이 너희들과 다르다. 나도 힘들어 라고 서로 설전이 오갔던 것 같다.)
朝鮮과 일본의 교류가 얼어붙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도 아니고... 사실 병자호란(청의 침입)으로 조선 정부의 분위기가 중화숭상, 성리학적 교조주의, 그리고 쇄국적 성격이 강해졌는데...
과거 해안 약탈을 대신해 양국간의 생산적인 교역을 유도하고자 설치했던 일종의 국제 자유무역항이었던 지금의 부산, 진해, 울산의 三浦에서 일본인들이 동시에 계획적으로 무력 strike를 일으키고, 仁祖임금은 그 三浦를 폐쇄해 버린다... 그리고 淸과도 明과는 다르게 사이가 불편했기 때문에... 朝鮮은 전반적으로 퇴락해 가기 시작했다.
高麗時代は中原の勢力が大体的に弱かったから, 北方民族の侵入が苦手だった.
むしろ高麗初期には北方の海賊(キタイ, 要義海賊が高麗と日本をよく掠奪した.)を高麗軍が討伐しながら
日本で拉致された人々を日本で送還してくれるとかしたし, 高麗も北方防御に努力し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日本とよほど友好的だったと言う.
もちろんその友好的雰囲気もクビライ・カンの高麗征伐以後に割れたが....
モンゴルが退いてからも高麗言葉には分かるように日本海賊の跋扈でずっと雰囲気良くなくて...
朝鮮 初期にも日本は朝鮮の建国を祝ってくれる態度を取ったし, 一部将軍たちは朝鮮の交隣政策に協助, 朝鮮との積極的交易を通じて
自分の領地を強くマンドリョで積極的に外交をしたりした.
世宗時に対馬島征伐をしたが, 日本海賊が 朝鮮だけ苦しめたのでもなくて日本海岸でも掠奪をする苦手だから, 両国の中央政府の仲が良くないことはなかった. (団地... 盗賊たち管理ちょっとしてくれ...と 朝鮮が日本に要求すれば... 日本はそんな余力まではない... 私たちはシステムが君たちと違う. 私も大変でとお互いに舌戦が行き交ったようだ.)
朝鮮と日本の交流がオルオブッギ始めたことは壬辰の乱でもなくて... 実は丙子胡乱(青衣侵入)で朝鮮政府の雰囲気が中華崇尚, 性理学的教條主義, そして鎖国的性格が強まったが...
過去海岸掠奪の代わりをして両国間の生産的な交易を誘導しようと設置した一種の国際自由貿易港だった今の釜山, 鎭海, 蔚山の 三浦で日本人たちが同時に計画的に無力 strikeを起こして, 仁祖賃金はその 三浦を閉鎖してしまう... そして 清とも 明とは違うように間が不便だったから... 朝鮮は全般的に怪落して行き始め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