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증후군
프랑스를 ‘유행의 발신지’ 라는 이미지로 동경해서 파리에서 살기 시작한 외국인(주로 일본인)이 현지의 관습이나 문화 등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정신적 균형감각이 붕괴되고, 주요 우울증에 가까운 증상을 보이는 상태를 가리키는 정신의학 용어이다
때는 바야흐로 중일전쟁의 시기.
일본은 기세 좋게 중국에 들어가 상하이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중국을 상당히 만만하게 바라봤기 때문에,
수달내에 중국대륙을 모두 점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요.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각종 기술을 배워온 소위 엘리트들이 많았고,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효율로 일본을 막아내려 했죠.
그중 대표적인 것은 철조망이었습니다.
심지어 이것은 독일식 철조망이었기에 그 튼튼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죠.
중국은 자신의 진영에 일본을 포격하는 전술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일본 입장에서는 이 거추장스러운 철조망들을 어떻게 해서든 치워내고자 했는데요.
당시 이러한 철조망 지대를 파훼(破毁)하기 위해 가장 많이 쓰던 방식은 “파괴筒”이었습니다.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먼저 길쭉한 원통 안에 폭탄을 집어넣습니다.
그리고 그 원통은 파괴하고자 하는 철조망 밑에 설치하죠.
원통의 끝에는 불을 붙일 수 있는 도화선이 있는데, 마지막으로 그곳에 불을 붙이고 최대한 멀리 도망칩니다.
도화선이 다 타들어가서 불씨가 원통 안의 폭탄에 다다르면
결국 폭탄이 터져 철조망을 폭파시키는 원리죠.
폭탄으로부터 도망가는 시간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원통을 여러개 결합하여 도화선이 타들어가는 시간을 연장해야 했기에,
이것은 조립식이었고, 생각보다 정교한 물건이었습니다.
.이 말은 곧, 병사들이 안전하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원통을 준비하여 병사들이 폭탄으로부터 도망갈 시간을 버는 것이 중요했죠.
하지만, 전술마저 거침없이 전개하던 일본 군부에게 병사들의 목숨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효율을 내길 원했던 일본 군부는
일본의 감성에 맞게(?) 새로운 장비를 만들어냈는데요.
그것이 바로, 대나무製 파괴筒입니다.
일본에서 대나무를 공수하여 만드는 것도 아니고, 상하이 현지에 있는 대나무를 잘라다가 만든 장비였죠.
이렇게 조잡한 장비에 조립식 기능따위가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처음에 만들어진 대나무 원통 길이, 그대로 사용해야 했기에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나면, 병사들이 도망갈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죠.
여기서 황당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도화선도 조잡하기 그지없어서
파괴筒을 설치한 후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도화선에 붙을 붙인 채 들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철조망 밑에 파괴筒을 꽂고 도망쳐야 하죠.
불붙은 폭탄을 들고 달려야 하는 행동이기에 누가 이런 행동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 뿐인데,
놀랍게도 당시 일본 사회는 이러한 행동을 “용기”라고 치켜세우며 자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몰던 시기였기에
자랑스럽게 자원자들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주인공 3인방이 등장하는데요. 다케지, 스스무, 이노스케 입니다.
이들은 야밤의 작전에 투입되어 중국의 철조망을 파괴하는 것이 임무였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제일 앞에서 달려가던 다케지가 진흙에 미끄러져 넘어진 것입니다.
앞서 설명드렸듯이, 이 장비는 도화선에 미리 붙을 붙이고 적에게 돌진하는 것이기 때문에
넘어졌다고 우왕좌왕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폭탄을 앞에 두고 이 세명은 도화선에 붙은 불을 끄고 대나무 파괴筒을 버린 채 줄행랑치는 선택을 했죠.
사실, 사건이 이렇게 끝났다면 그래도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은 역시나 상상 이상이었죠.
원래대로라면 중국의 철조망을 폭파시키고 돌아와야했을 3인방이
맨몸으로 돌아오자, 일본군의 부대장은 이들을 매우 나무랐다고 합니다.
아직 앳된 나이에 불과했던 3인방은 부대장에게 겁을 먹었고, 어쩔 수 없이 작전을 다시 수행하기 위해
놓고 온 대나무 파괴筒으로 돌아갔죠.
그런데 이미 한참 타버린 도화선은 짧아질 대로 짧아져 있었고, 그들이 작전을 위해 다시 도화선에 붙을 붙이자,
대나무 파괴筒은 순식간에 폭발해버렸습니다.
이렇게 1932년 2월 22일
황당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멍청한 작전으로 인해 젊은 청년 3명이 허망하게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일제의 본격적인 삽질(호르홀)이 시작됐습니다.
당시 상하이의 전시상황을 취재하러 왔던 일본의 기자가 이 사건에 대해 질문을 하였는데,
자신의 무능함을 알릴 수 없었던 부대장은 “3명의 용감한 용사들이 대나무 폭탄을 껴안고 적진에 뛰어들었다!”
라며 영웅담을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이후 오사카와 아사히 신문 등에서는 이 사건을 일본 전역에 대서특필하여 알렸고,
일본 군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죽은 3명을 2계급 특진까지 시켰습니다.
3인방은 맥주 광고에 활용되기도 하고, 조선에 있는 학교에서는 이 3인방을 주제로 어린이 논술 문제를 출제하기도 했죠.
“3인방은 어떤 심정으로 적진에 돌격했을지 서술하라”
cho/sen의 어린이들도 일본의 신민으로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상으로 만들어졌고 군가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부실한 병기를 만들어서 안타까운 희생을 초래해놓고, 그 사실을 왜곡하여 신성시하는 모습이 소름 그 자체인데요.
.이 3인방은 이후 75년간 일본사회에서 우상화되다가 2007년 6월 13일
아사히 신문에서 이 사실에 대해 정정보도를 냅니다.
“폭탄 3용사 일화는 진실이 아니다”라며 사실을 왜곡한 그들의 잘못을 꺼내 알리고 용서를 빈다고 했는데요.
오랫동안 용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3인방의 일화가 그저 날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일본 사회에서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사건이었습니다.
※ パリ症侯だね
フランスを ‘流行の発信地’ というイメージで憧れてパリで住み始めた外国人(主に日本人)が現地の慣習や文化などによく適応することができなくて精神的均衡感覚が崩壊されて, 主要鬱病に近い症状を見せる状態を示す精神医学用語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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焚く今こそ日中戦争の時期.
日本は勢い良く中国に入って行って上海に駐屯していました.
当時日本は中国をよほど甘く眺めたから,
かわうそ内に中国大陸を皆占領することができると思ったんです.
現実はやさしくなかったです.
各種技術を学んで来たいわゆるエリートたちが多かったし,
劣悪な状況の中でも最善の效率で日本を受け止めようと思ったんです.
なかでも代表的なことは鉄條網でした.
甚だしくはこれはドイツ式鉄條網だったからその丈夫さが他の追随を許さなかったんです.
中国は自分の陣営に日本を砲撃する戦術を使っていました.
のため日本立場(入場)ではこの面倒な鉄條網たちをどのようにしても片付け出そうとしたんです.
当時このような鉄條網地帯をパフェ(破毀)するために一番多く書いた方式は "破壊筒"でした.
これを使う方法は簡単です.
先に長めな円筒中に爆弾を入れます.
そしてその円筒は破壊しようとする鉄條網下に設置します.
円筒の終りには火を付けることができる口火があるのに, 最後にその所に火を付けて最大限遠く逃げます.
口火がすべて燃え上がって火種が円筒中の爆弾に至れば
結局爆弾が爆発して鉄條網を爆破させる原理ですよ.
爆弾から逃げだす時間をたくさん儲けるためには
円筒をいくつか結合して口火が燃え上がる時間を延ば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
これは組み立て式だったし, 思ったより精巧な品物でした.
.この言葉はすぐ, 兵士らが安全に作戦を遂行するためには
最大限多い円筒を準備して兵士らが爆弾から逃げだす時間を儲けることが重要だったんです.
しかし, 戦術さえ通すことなしに展開した日本軍部に兵士らの命は全然眼中にもなかったです.
最小限の費用で最大限の效率を賭がほしかった日本軍部は
日本の感性に当たるように(?) 新しい装備を作り出したんです.
それがちょうど, 竹製 破壊筒です.
日本で竹を空手して作ることでもなくて, 上海現地にある竹を切って来て作った装備でした.
こんなに粗っぽい装備に組み立て式機能なんかがあるわけがなかったです.
初めに作られた竹円筒長さ, そのまま使わ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から
口火に火を付けてからは, 兵士らの逃げだす時間があまりにも不足だったんです.
ここで荒唐な事実がもう一つあるのに, 口火も粗っぽいこと言い尽くせなくて
破壊筒を設置した後口火に火を付けるのではなく, 先に口火に付く付けたまま入って駆け付けます.
そして鉄條網下に破壊筒をさして逃げなければならないでしょう.
火が付いた爆弾を持って走らなければならない行動だから誰がこんな行動をするかという気がするだけなのに,
驚くべきことに当時日本社会はこのような行動を "勇気"とおだてて自国民たちを戦地で追い払った時期だったから
誇らしく資源者たちを募集しました.
そしてもう今日の主人公 3人方が登場しますよ. ダケだ, Susumu, 李ノースするようにです.
これらはヤバムの作戦に投入されて中国の鉄條網を破壊するのが任務でした.
ところでここで問題が発生します.
一番前で駆け付けたダケジが泥に滑って倒れたのです.
前に説明させていただいたように, この装備は口火にあらかじめ付く付けて敵に突進することだから
倒れたと右往左往する時間もなかったです.
すぐでも裂けるような爆弾を前に置いてこの三名は口火に付いた火を消して竹破壊筒を捨てたまま高飛びをする選択をしたんです.
事実, 事件がこんなに終わったらそれでも正常だと話せたはずです.
しかし日本はやっぱり想像以上でした.
元々とおりなら中国の鉄條網を爆破させて帰って来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3人方が
空身に帰って来ると, 日本軍の部隊長はこれらを非常に咎めたと言います.
まだ子供っぽい年に過ぎなかった 3人方は部隊長に怖がったし, 仕方なく作戦をまた遂行するため
おいて来た竹破壊筒に帰ったんです.
ところでもうずいぶん乗ってしまった口火は短くなるとおり短くなっていたし, 彼らが作戦のためにまた口火に付く付けると,
竹破壊筒はあっという間に爆発してしまいました.
こんなに 1932年 2月 22日
荒唐だという話では不足な位にあほうな作戦によって若い青年 3人がいつわりでむなしく去ってしまいました.
ところが, この時から日製の本格的なシャベルですくい出し(ホルホル)が始まりました.
当時上海の戦時状況を取材しに来た日本の記者がこの事件に対して質問をしたが,
自分の無能さを知らせ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部隊長は "3人の勇ましい勇士たちが竹爆弾を抱えこんで敵陣に跳びこんだ!"
と言いながら英雄談を作ってしまったのです.
以後大阪と朝日新聞などではこの事件を日本全域に特筆大書して知らせたし,
日本軍部ではもう一さじすくい取って死んだ 3人を 2階級特進までさせました.
3人方はビール広告に活用されたり, 朝鮮にある学校ではこの 3人方を主題で子供論述問題を出題したりしたんです.
"3人方はどんな心情で敵陣に突撃したのか敍述しなさい"
cho/senの子供たちも日本の臣民で洗脳させるための目的でした.
これだけだけではないです.
彼らは銅像で作られたし軍歌でも作られました.
不実な兵器を作って切ない犠牲をもたらしておいて, その事実を歪曲して神聖視する姿が鳥肌そのものですよ.
.この 3人方は以後 75年間日本社会で偶像化されている途中 2007年 6月 13日
朝日新聞でこの事実に対して訂正報道を出します.
"爆弾 3勇士エピソードは真実ではない"と言いながら事実を歪曲した彼らの過ちを取り出して知らせて容赦を謝ると言ったんです.
長い間勇気の象徴で思われた 3人方のエピソードがただ捏造に過ぎなかったという事実が知られると,
当時日本社会では大きい衝撃に近付いた事件で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