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치쿠헤이((안)중글자 거리구에 있어, 메이지 17년(1884년) 1월 1일 - 쇼와 24년(1949년) 10월 29일)은 일본의 해군군인, 실업가, 정치가.
1884년(메이지 17년) 1월 1일, 군마현 닛타군 오지마촌자 오시키리(현재의 군마현 오타시 오시키리마을)의 농가 나카지마구길과 어머니 언제의 장남으로서 태어났다.
1916년(타이쇼 5년) 나카지마 기관 대위와 우마고에희7 중위가, 구미에서 배운 신지식을 기울이고, 복엽의 수상기를 설계했다.이것이 요코스카 해군 공창의 나가우라 무기 제조부에서 완성되어 횡창식과 이름 붙여졌다.나카지마는, 항공의 장래에 착안 해, 항공기는 국산 해야 할것, 그것은 민간 제작이 아니면 불가능이라고 하는 결론을 얻었다.이것을 오오니시 타키 지로 중위에게 몰래 털어 놓았는데, 오오니시도 대찬성으로, 나카지마의 의도를 실현시키려고 자본주를 찾아 분주 했다.오오니시도 군적을 멀어져 나카지마의 회사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지만, 군에 각하 되었다.나카지마의 「비행기 제작 회사 설립 소원」은 해군 부처내에서 문제가 되었다.나카지마는 이 때 「퇴직의 말」로서, 전술상으로부터도 경제상으로부터도 대함 거포 주의를 일척해 신항공 군비로 전환 해야 할것, 설계 제작은 국산 항공기군령과 민영 생산 항공기군령과의 3점을 강조했다.타이쇼 6년(1917년) 12월 1일, 이미 동년 5월에는 「비행기 연구소」(후의 나카지마 비행기 주식회사)을 군마현 오지마마치에 창설하고 있던 나카지마는 해군의 중도 퇴역을 인정받아(예비역 편입.덧붙여 해군의 기관과는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중에 「기관과문제」를 거쳐 병과에 통합되었으므로, 나카지마의 최종 계급은 예비역 편입 후 20년 이상을 거치고, 「해군 기관 대위」로부터 「해군 대위」가 되고 있던), 동년 12월 10일에 형제로 「비행기 연구소」를 군마현 오타쵸에 이전했다.
그 후 입헌 정우회 소속의 국회의원이 되어 풍부한 자금력으로 당중추에 올라, 싱칸료나 군부 가까이의 혁신파를 형성하고 세력을 늘렸다.국정 연구회(쇼와 6년~15년)나 국가경제 연구소(쇼와 7년~18년)를 설립해 학자를 유치 해, 국내외의 정치 경제 상황을 조사 연구시켰다.쇼와 14년(1939년) 3월 28일에는 혁신 동맹이라고 하는 단체를 결성해 나카지마의 총재 취임을 추진했다.분열한 정우회 나카지마파의 총재로 취임했지만, 이것은 오랜 세월동안 정우회를 지배한 스즈키·하토야마파에의 반감으로부터 오는 주위의 권유에 의하는 것이어, 스스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국력을 아는 곳(중)으로부터, 당초는 일·미 개전에는 소극적이었지만, 개전 후는 「미군의 대형 폭격기 하지만 양산에 들어가면 일본은 불탄 들판이 된다」라고 연전 연승의 일본 군부를 비판해, 과다르카낼의 쟁탈전에서는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패세 만회책으로서 Z비행기(이른바 「후가쿠」)를 제언하지만 44년까지 무시되어 시기에 늦어 계획은 방폐되었다.
근위 내각에서는 철도 대신을 맡아 쇼와 13년(1938년) 12월 2일에 철도 간선 조사 분과회를 만들어, 동년에는해저 터널을 위한 지질 조사도 시작하게 해 그 대륙 연락 구상은 전후의 신간선에 영향을 주었다.그 내각 조성 3개월 후 발족한 「대정 익찬회」는 막부적, 파시스트적이고 입헌정치를 침범한다고 하여, 강력한 정당을 만들려고 했지만, 종전까지 완수할 수 없었다.
쇼와 20년(1945년) 8월 17 닛토구이궁내각으로 군수상, 군수성 폐지로 8월 20 닛쇼공상.동년, 전 입헌 민정당 총재의 마치다 추지에게 불러 신당의 설립을 계획하지만, GHQ에 의해 A급 전범으로 지정의 정보(지정은 12월 2일)로 중지.그 이전의 11월 26일에 원내회파의 무소속 클럽의 결성에 참가.다음 쇼와 21년(1946년) 공직 추방이 된다.
쇼와 22년(1947년) A급 전범 지정 해제.
中島 知久平(なかじま ちくへい、明治17年(1884年)1月1日 - 昭和24年(1949年)10月29日)は日本の海軍軍人、実業家、政治家。中島飛行機(のちのSUBARU)の創始者として知られ、政治家に転じてからは大臣や政友会総裁を務めた。
1884年(明治17年)1月1日、群馬県新田郡尾島村字押切(現在の群馬県太田市押切町)の農家中島粂吉と母いつの長男として生まれた。
1916年(大正5年)中島機関大尉と馬越喜七中尉が、欧米で学んだ新知識を傾けて、複葉の水上機を設計した。これが横須賀海軍工廠の長浦造兵部で完成され、横廠式と名づけられた。中島は、航空の将来に着眼し、航空機は国産すべきこと、それは民間製作でなければ不可能という結論を得た。これを大西瀧治郎中尉にひそかに打ち明けたところ、大西も大賛成で、中島の意図を実現させようと資本主を探して奔走した。大西も軍籍を離れて中島の会社に入ろうと思っていたが、軍に却下された。中島の「飛行機製作会社設立願い」は海軍省内で問題となった。中島はこのとき「退職の辞」として、戦術上からも経済上からも大艦巨砲主義を一擲して新航空軍備に転換すべきこと、設計製作は国産航空機たるべきこと、民営生産航空機たるべきことの三点を強調した。 大正6年(1917年)12月1日、既に同年5月には「飛行機研究所」(のちの中島飛行機株式会社)を群馬県尾島町に創設していた中島は海軍の中途退役を認められ(予備役編入。なお、海軍の機関科は太平洋戦争(大東亜戦争)中に「機関科問題」を経て兵科に統合されたので、中島の最終階級は予備役編入後20年以上を経て、「海軍機関大尉」から「海軍大尉」となっていた)、同年12月10日に兄弟で「飛行機研究所」を群馬県太田町に移転した。
その後立憲政友会所属の代議士となり豊富な資金力で党中枢へ登り、新官僚や軍部寄りの革新派を形成して勢力を伸ばした。国政研究会(昭和6年~15年)や国家経済研究所(昭和7年~18年)を設立して学者を招致し、国内外の政治経済状況を調査研究させた。昭和14年(1939年)3月28日には革新同盟という団体を結成して中島の総裁就任を推進した。分裂した政友会中島派の総裁に就任したが、これは長年の間政友会を支配した鈴木・鳩山派への反感から来る周囲の勧めによるものであり、自ら進んでのものではなかった。
アメリカの国力を知るところから、当初は日米開戦には消極的だったが、開戦後は「米軍の大型爆撃機が量産に入れば日本は焼け野原になる」と連戦連勝の日本軍部を批判し、ガダルカナルの争奪戦では日本の敗戦を予想して、敗勢挽回策としてZ飛行機(いわゆる「富嶽」)を提言するが44年まで無視され、時期に遅れて計画は放棄された。
近衛内閣では鉄道大臣を務め、昭和13年(1938年)12月2日に鉄道幹線調査分科会をつくり、同年には海底トンネルのための地質調査も始めさせ、その大陸連絡構想は戦後の新幹線に影響を与えた。その組閣3ヶ月後発足した「大政翼賛会」は幕府的、ファッショ的で立憲政治を侵すとして、強力な政党を作ろうとしたが、終戦まで果たせなかった。
昭和20年(1945年)8月17日東久邇宮内閣で軍需相、軍需省廃止で8月20日商工相。同年、元立憲民政党総裁の町田忠治に呼び掛けて新党の設立を計画するが、GHQによりA級戦犯に指定の情報(指定は12月2日)で中止。それ以前の11月26日に院内会派の無所属倶楽部の結成に参加。翌昭和21年(1946年)公職追放となる。
昭和22年(1947年)A級戦犯指定解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