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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1)

Lawrence H. Summers(로런스 서머스) 하버드대 총장이 지난 1일, 한 공식석상에서 연설 중 “1970년(70년대) 서울엔 미성년 창녀들(child prostitutes)이 100 만에 달했다. 오늘날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굉장한 기회 때문”이라는 발언을 했다고 인터넷 dkbnews.com(도깨비뉴스)이 9일 보도했다.
우리나라 문제가 언급된 것은, 그가 한창 세계화로 인해 달라진 인간생활에 대해 역설하고 있던 중이었다 (70년대 서울 소녀는 모두 창녀였다, 2004-07-09, 한국일보).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이다. 日本의 賣春史는 헤이안(平安)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戰後 日本 에서는 賣春이 國策 이었다. 후지메 유끼(藤目ゆき)의 ‘帝國主義와 性暴力’에도 戰後 賣春 실상이 소개되어 있다. 1945년 8월 26일자 日本의 主要新聞에는 駐屯軍을 위한 慰安婦 참가를 독려하는 광고가 일제히 떴다.

광고주는 RAA였다. 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의 약자로 오락 및 위락 협회 즉 日本女子를 메군(米軍)의 오락과 위락으로 제공하는 단체라는 의미이다. RAA 간부들은 皇宮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新日本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 삼창까지 했다. 그러나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킨다는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 未婚, 旣婚을 불문하고 모든 일본여자들이 賣春에 발벗고 아니 옷벗고 나섰다.

서머스(Lawrence H. Summers)의 경력에 비추어볼 때, 日本의 賣春史와 戰後 賣春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저 발언은 의도적으로 日本을 韓國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서머스는 문제가 커지자 “문제의 발언은 통계를 잘못 기억한 탓으로 한 세대가 바뀌면서 미성년 매춘이 빠르게 줄었음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도 안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1970 년 한국에는 未成年 賣春이 없었다. 1990 년대 日本에서 원조교제가 수입 되면서 한국에서 미성년 매춘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미성년 매춘은 번창일로에 있지, 세대가 바뀌면서 줄어 들지도 않았다.

일본은 난잡한 성 개방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나라이다. 일본이 만든 상품 중에서도 가장 추잡하고 성공한 상품이 성(性)이다. 이런 자신들의 더러운 반인륜적인 행동을 타당화하기 위해 ‘색을 밝힌다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과 같이 자연적인 욕구다’라고 애써 변명한다.

◀ 일본의 춘화도에서

日本史는 곧 賣春史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모든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도 그것만은 자신들 스스로 개발, 발전시킨 것이다. 일본의 매춘사는 中國倭가 이주 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2차 대전 당시 日本은 한국인, 중국인, 기타 국가들의 소녀들을 종군 위안부로 강제 연행 하면서 자국의 여자 수십만은 本土의 賣春婦로 만들었다. 이것은 2차 대전의 배경을 설명하는 책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일본인(倭寇), 임진왜란 등으로 누천년 우리나라의 國富를 빼앗아 수백 년간 자신들을 살찌운 일본은 그것도 모자라 자국의 여자들 까지 상품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에서 賣春의 역사는 그야말로 오래 되었다고 한다. 그저 유구한 전통을 발전 시키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2 차 대전 전후에 부모가 자식의 손을 잡고 매춘소굴에 팔아 넘기는 것은 일본에서 공공연히 벌어졌던 풍속이다.

서양인이 일본을 맨 처음 방문한 1543 년 부터 시작된 일본민족과의 생물학적 교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확대되어 갔다. 처음 400 년간 일본민족에게 유전자를 제공한 유럽 국가는 특정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을 오가며 무역하던 유럽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 순간 메국(米國)과 유럽 각국은 일본민족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리라 본다. 우리의 유전자가 저 민족에게 이식 되었구나 하고 말이다.

메이지(明治) 이후 공개장소 에서의 집단섹스를 금지시키는 대신 매춘조직을 거대화 하기 시작했다. 이들 매춘부의 상당수가 서양인들을 상대했다. 중세부터 개별적으로 해온 일본민족 개량 사업이 뚜렷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자, 국가 주도로 더욱 확대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아울러 국가 재원까지 챙기는 이점이 있었다. 어쩌면 한민족 에게서 더욱 떨어져 나간다는 생각에서 일본민족 개량 사업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는지도 모르겠다.

패전 이후 메군(米軍)이 일본에 진주 하면서 메국은 列島의 일본민족에게 유전자를 제공하는 주류국가로 떠올랐다. 일본은 한국 전쟁에서 메국의 병참기지이자, 메군의 휴양기지로서 그 기능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메군의 휴양기지란 매춘시설이다. 매춘은 전후 일본의 최대국책 사업이다. 여기서 벌어들인 달러가 오늘날의 일본 경제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賣春으로 벌어들인 달러가 오늘날 세계 일본사 전공자들의 연구비로 제공되고 있는 셈이다. 2 차 대전 동안 히로히토(裕人)의 지시로 수행한 생체실험의 결과도 이때 이시이(石井) 등이 메국에 넘겼다. 한국전쟁 에서의 경제 성장을 발판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고도성장을 달성해 일본은 경제부국으로 올라섰다. 한국전쟁이 있었기에 패전 후 최빈국의 나락에서 일본이 빠져나오고 오늘날의 일본 경제가 부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하늘이 돕고 신이 도왔다고 한다.

저 민족은 20 세기 후반에도 우리민족을 등쳐먹고 살았던 것이다. 메국은 지난 수 십 년간 피, 땀 흘려 전쟁 하면서 엉뚱한 인간들을 살찌웠다는 것을 간신히 자각 했는지, 요즘은 아무리 먼 곳에서 전쟁을 해도 무기 및 전쟁물자를 모두 다 메국에서 수송한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그런 추잡한 일본이 한일병탄 이후 한국에다 일본식 매춘을 도입 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한국의 妓女는 높은 교양과 학식으로 지배계층과 학문과 예술을 논하는 여자들 이었다. 이것이 日本式 賣春의 도입으로 오늘날과 같은 單純娼女로 전락한 것이다.




6.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2)

일본이 메이지(明治) 때에 와서야 겨우 공개적인 성 문화(기모노섹스, 혼욕, 요바이)를 근절 시키려고 한 것은, ‘우리나라의 유구한 전통을 흉보는 것은 高麗, 朝鮮만은 아니구나. 세계가 다 우리의 전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나’하는 생각에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남 보지 않는 곳에서 해야 한다는 서양의 성관습 조차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서 였을까. 이 시기 일본은 서양의 모든 것을 광적으로 흉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외국에 수출한 일본의 성문화가 인류를 타락의 극치로 내몰고 있다.

메이지 때의 일본이 얼마나 기를 쓰고 서양을 모방 하려고 했는지 알려주는 얘기가 라이프 2 차 대전에 나온다.

조정의 신하들의 복장도 양복을 모방하려고 애썼다. 그런 모습이 당시 일본을 방문한 잉글랜드 여자에게는 신기한 웃음거리로 비쳤다. “거의 모든 양복이 기성복이라 그들의 몸에는 너무나 컸다. 바지를 헐렁한 부츠 안으로 한껏 쑤셔 넣었으며 가장자리에 주름을 단 모자는 귀까지 내려 왔거나 머리 뒤통수에 간신히 얹혀 있었다.”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일본인들은 서양 문물을 흉내내는 데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본이 서양문물만 미친 듯이 모방했는 줄 아는가? 우리나라가 應神에게 옷을 하사한 그 순간부터 우리민족의 문화를 그렇게 광적으로 모방해왔다.

모방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대대로 百濟寺, 百濟宮을 짓고 살고, 百濟寺는 큰 곳만 5 곳을 짓는 것. 역대 倭王들 가운데 처음으로 왕도에 백제궁이라는 왕궁을 지은 것은 비다쓰(敏達)이었다. 34 대 죠메이(舒明)는 ‘百濟川’이 흐르는 ‘백제”땅에다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짓고 百濟大宮에서 살았다. 죠메이는 죽어서도 ‘백제대빈(百濟大殯)’에 가매장됐다. 왜곡하기 일쑤인 日本書紀에 남겨놓은 기록이다.

조선통신사로 부터 온갖 것을 모방[그래도 천문학은 어려웠던지 배우지 못하고, 나중에 서양인 으로부터 배웠다. 천문학은 왕보손(王保孫), 관륵(觀勒), 고려 천문관, 이씨조선 천문관에 이어 다섯 번 째서야 간신히 배웠다]한 결과, 드디어 20 세기 초반에는 이런 말을 듣게 되었다.

노기(乃木希典 : 메이지가 죽었을 때 따라서 자살했다)는 일본정신을 나타내는 서도, 분재기술, 지성을 고루 갖춘 군인의 대표였다(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이제 일본사에 있어서 매춘의 실태를 살펴보자.

일본 에서는 매춘의 범람이 최근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오랜 뿌리를 갖고 있다. 일본은 오랫동안 공창(公娼)제도를 유지해온 나라이다. 공창을 사창(私娼), 즉 밀매춘과 구별하는 기준은 운영 주체가 아니라 당국의 인허가 여부이다.
일본 역사상 유카쿠(遊廓)의 설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시절인 1585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집권이후 에도(江戶 : 현재의 東京)를 비롯한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유카쿠의 이용은 비용이 비쌌던 데다 나름대로의 격식이 강조되는 바람에 서민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단속의 틈을 비집고 밀매춘이 성행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지위를 잃어갔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숙박업소나 사창가에도 면허를 내주어 유카쿠의 확대를 꾀해 1924 년 일본 전국의 유카쿠는 545 개로 불어났고 1 만 1,200 개 업소에서 5 만 2,200 명의 공창이 일할 정도로 번창했다.
유카쿠를 없애자는 ‘하이쇼(廢娼)”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46 년 1 월 공창 폐지령이 발동될 때까지 유카쿠는 살아 남았다. 군대의 존재가 주된 방패막이였다.
일본군의 유카쿠 옹호는 전국시대 무장이 몸종을 겸한 유녀를 진중에 두었던 전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니 2 차대전 당시 가는 곳마다 위안소를 설치하고 갖은 방법으로 위안부를 동원했던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8 세기 중반의 시가집 ‘만요슈(万葉集)”에는 노래와 춤으로 남자를 유혹해 몸을 파는 ‘우카레메(遊行女婦)”가 등장한다.
10~12 세기에는 ‘아소비메(遊女)”란 고유어가 나타났다. 16 세기에는 “조로(女郞)”라는 호칭도 쓰였다. 유녀가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여겨지기까지 한 것도 남성 우위 사회의 상징적 단면이다 (재미있는 일본⑮, 후조쿠(風俗)①, ②, 한국i닷컴) ( http://www.goodlove.pe.kr/bbs/zboard.php?id=japa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90 참조).

여기의 인용문(후조쿠(風俗)①, ②, ③)은 문장 단위(문장을 훼손하지 않고)로 발췌한 것이다. 너무 길어서 도저히 전체를 인용을 할 수 없었다. ④는 50 년대 이후 일본 매춘에 대한 몇몇 기술이다.

일본정부가 메군을 위한 매춘을 주도한 것은 1945 년 8 월 26 일 부터다. 일본이 항복한 날은 1945 년 8 월 15 일이다. 국가 계획을 시행에 옮기자면, 시간을 요한다는 사실로 볼 때, 항복 이전부터 메군을 위한 공창(公娼)을 논의하고 계획 했음을 알 수 있다.

항복 전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놓고 몇 달 동안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메국과 밀고 당기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무래도 그때 생각할 시간이 많았을 것이다. 메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하고. 유구한 성상품화 전통을 가진 나라에서 당연하지 않은가.

1945 년 8 월 26 일 일본의 주요 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 “전후 처리를 위한 국가 긴급시설의 하나로서 주둔군 위안의 대사업에 참가한다. 신일본 여성의 솔선참가를 바란다. 여자 종업원 모집. 나이 18~25 세. 숙식·의복 제공.” 광고주는 긴자(銀座)에 본부를 둔 RAA라는 단체였다.
화류계 대표들이 만든 ‘특수 위안부 설비협회’의 영어 약자라는 사실은 나중 에서야 드러났다. 자본금 1 억엔 가운데 5,500 만엔은 대장성(大藏省)의 보증으로 당시 강교(勸業)은행이 융자해 주었다. 앞서 8 월 18 일 경찰청은 곧 진주할 메군 전용의 위안소 설치 문제를 화류계 대표들과 협의했다.
8 월 27 일 도쿄 오타(大田)구 오모리(大森)의 요정 “고마치엔(小町園)”이 1 호 메군 전용 위안소로 지정 되었다. 이튿날 RAA 간부들은 황궁 앞에서 선서식을 갖고 “신일본 재건과 일본 여성의 순결을 지킬 초석 사업임을 자각, 멸사봉공의 결의를 다진다”고 선언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수백 년 전통의 유곽에 이어 새로운 국책 매춘이 시작되는 순간 이었다.
국책 매춘의 양상은 도쿄도(東京都)가 전후 처음으로 제정한 조례 성병예방 규칙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연합군사령부(GHQ)의 요청에 따라 1945 년 10 월에 만들어진 이 규칙은 점령군 병사를 상대하는 여성의 청결과 정기 검진 의무가 골자였다.
RAA의 위안소는 메군 진주와 함께 전국적으로 45 개로 늘어 났으며 위안부는 4,000 여명에 달했다. 메군을 상대하는 사창(私娼) “요팡(洋パン)”은 순식간에 40 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GHQ는 1 월 24 일 공창제도의 폐지를 명령하자, 일본 정부는 2 월 2 일 전국 경찰에 ‘공창제도에 관한 지시’를 내렸고 2 월 20 일 공창제도를 정식으로 폐지했다. 이때 인신매매 금지 규칙이 제정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때 까지도 유곽의 공창 등은 인신매매를 통해 공급됐다. 피폐한 탄광 지대나 흉작에 휩쓸린 농촌의 딸들이 알선꾼을 통해 1 만~2 만 엔에 업소에 팔렸다.
공창제도가 폐지 됐다고는 하지만 수백 년간 이어진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는 없었다. 유곽의 업소는 ‘특수음식점’으로, 창부는 ‘여급’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경찰 당국은 전통 유곽 지대를 지도 위에 붉은 선으로 표시해 두고 이 지역 에서의 매춘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적 자유연애의 결과’로 해석 하면서 묵인했다. ‘적선(赤線)지대’가 사실상 공인된 매춘지역을 뜻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패전 후의 경제적 피폐로 곳곳에 늘어 선 거리의 여자를 제대로 단속 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다. 온갖 수법의 사창이 거리에 넘쳤다. (재미있는 일본(17), 후조쿠(風俗)③, 한국i닷컴)

위에 기술한 내용은 ‘제국주의와 성폭력’이라는 후지메 유끼(藤目ユキ : 大阪外語大)의 논문 에서도 뒷받침 되고 있는 사실이다. ‘제국주의와 성폭력’은 메군과 일본의 협동으로 매춘이 제도화 되고 폐창령의 미명에 새로운 집창지구(集娼地區)가 만들어 졌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제국주의란 일본이 아니고, 메국을 가리킨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국주의와 성폭력’은 일본의 이중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글이라 하겠다.




▲ 일본의 춘화도 중에서


“여성의 해방자·몸을 파는 여성의 구제자 라는 유포된 이미지와는 반대로, GHQ에 의하여 일본여성은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조직적 성폭력 피해에 직면하게 되었다”에 이르면, 우리나라에서 자신들이 ‘전에 경험한 적 없는 성폭력’을 자행한 사실은 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주장이다.

메군보다 더한 “조직적 성폭력 피해”가 이미 천 년전 부터 일본에서 만연했다. 中國倭 이주 후 사무라이라는 계급에 의해, 신분의 귀천을 불문하고 일본 여자들은 저항이 차단된 채, 성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다. 저항할 경우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사무라이에게는 그런 특권이 주어져 있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에 와서야 겨우 사무라이가 이유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사람을 살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성관습은 사고 마저도 전환시켜 여자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나오는, 급기야 일본남자 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서양인의 배에 뛰어오르고, 마을로 끌어 들이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6.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3)

프랑스 작가 피에르 로티(Pierre Loti, 1850-1923)는 19 세기 말 여러 번 일본에 다녀 갔었다는 데, 그는 두 권의 “일본일기”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에 대해 언급한 다른 문헌에 의하면 그 책은 거의 일본 여자들과의 성행위의 기록 이라고 한다. 대낮에 떼거지로 배로 찾아온 일본 처녀들과 프랑스 선원들의 선상 난교, 저녁이면 아무 마을이나 찾아가도 반겨 주는 마을 처녀들의 ...... 한 마디로 일본은 서양인들도 이해 못하는 성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터키탕”도 “도로꾸 탕”이라는 일본의 매춘 목욕탕이 원조이다. “도로꾸”는 터키를 가리키는 일본 말이다. 어쨌든 일본에서 한때 이 “도로꾸 탕”의 유행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일본의 한 가운데쯤에 닛꼬(日光)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온천과 더불어 아름다운 호수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이 닛꼬 호숫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호텔과 도로꾸 탕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 많은 도로꾸 탕에서 닛꼬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남성들의 체액의 양을 계산해 보았다고도 한다. 그런데 이 우스워 보이는 계산이 더 이상 우습지 않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15살짜리 여자 중학생이 가족과 함께 닛꼬에 가서, 아름다운 닛꼬 호수에서 수영도 하며 잘 놀다 갔는데, 덜커덕 임신을 했다. 결백을 주장하는 그 여중생을 검사(?)한 의사는 확실한 처녀임을 보증해 주었다. 결국 닛꼬 호수로 흘러든 뭇 남성들의 정액에 의한 임신 이라는, 화학적, 생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결론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이 되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로꾸 탕의 유행에 몰입 했으면, 그 넓은 호수가 “물 반, 정액 반”이었겠는가? 이렇듯 일본인은 오래 전부터 성을 상품화 하는데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 하였고, 유행에 대하여 집단 최면적으로 추종하는 국민성은 그런 새로운 성상품을 폭발적으로 보급, 확대 재생산 하였다.
(http://tango.kist.re.kr/..0602.htm)

GHQ의 일본 민주화 5 대 지침의 하나였던 「부인참정권 부여에 의한 일본여성의 해방」지침이나, GHQ에 의한 여성단체의 육성 및 활동의 장려, 또 「폐창령(廢娼令)」의 포고 등, 메국에 의한 일본 점령은 여성해방을 가져온 것이라는 이미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점령이 시작된 1945 년부터 매춘 방지법이 제정되는 1956 년까지의 일본인 여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체험은 그와 같은 해방군 으로서의 메군상(美軍像)이나 「해방된 일본여성」이란 여성사상의 일면성, 혹은 허구성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매춘을 강요한 일본도 강간과 매춘이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라는 사실을 안다는 실토다.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그런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를 전일본 국민이 하나되어 천 년 넘게 거듭해온 것이다.

점령초기의 혼란이 진정 되어도 메군병사의 성범죄는 끊이지 않아, 오히려 「여자사냥」이라 불리는 집단강간 범죄가 늘고 흉포화하는 지경에 이른다. 성윤리의 이중 기준이 여자에게 엄격히 「정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는 이 피해를 일생의 오명으로 짊어지고 가게 된다. 당시의 일본 에서도 성폭력 피해는 주위에서 감추는 것이 다반사이고 피해를 신고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마치 난잡한 성문화의 전통을 가진 일본이 아니라, 정조관념을 중시하는 우리나라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대목이다. 中國倭 이주 후 일본 에서는 여자에게 정조를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일본은 지난 천 수백 년 간 이렇게 살았다.

여체를 잘 드러내도록 꽉 동여맨 듯한 기모노의 또 한 가지 비밀은 “속”에 있다.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기모노(きもの)를 입을 때 항상 노팬티 였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여체의 선에 포인트를 맞춘 이들은 팬티 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아예 생략 했다는 말도 있고, 종족번식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책” 이었다는 분석도 있다. 바쿠후(幕府) 시대 들어 파벌간의 싸움이 심해 지면서 남자들의 씨가 점점 말라가자, 여성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다녔다는 얘기도 그럴듯 하다.(기모노는 움직이는 침대…혼욕은 에도시대 환락의 상징, 굿데이, 2003. 3. 10.)

요바이(よばい)란 밤에 애인 침실로 찾아가는 풍속을 가리키는 것이다. 옛날 일본에서 결혼은 집안 끼리의 결합으로 성립되는 것으로 결혼 전 남·녀의 성교제는 별개의 문제였다. 과거 성교제와는 상관없이 부모가 정해 준 남자에게 시집가서 새롭게 부부 생활을 시작한다.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녀보다는 성경험자이길 바라는 경향이 강했다.
처녀는 결혼 전에 남자들 사이에 인기가 없었거나, 신체적·성격적으로 어떤 결함이 있지 않나 의심했다. 이러니 나이 찬 딸을 가진 부모는 밤에 찾아오는 남자 친구가 없을까 봐 걱정 이었다. 요바이는 단순히 미혼 남녀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과부나 기혼녀, 소박맞은 여자에게 까지 허락되었다.
1800 년 이후 일본에는 신앙 행사나 마을 전체 행사를 주관하고 화재나 홍수 등 재난에 대비한 구조와 난파선 구조 등을 하는 일종의 청년회가 있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 청년회가 부락 미혼 남녀의 성문제와 결혼 문제, 요바이 풍속에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간혹 딸이 임신 이라도 할까 우려한 부모가 문단속을 엄중히 하면 청년회에서 나온 사람들이 갖은 행패를 부렸다. 요바이의 근절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메이지 시대에는 국민에게 특별히 수신(修身)을 내세우며 유교적 윤리를 강조했고, 문란한 성풍속을 근절 하려는 정책상의 노력도 있었다. 사회교육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민간단체에 의한 계몽운동도 전개 되었다. 그러나 마을축제(まつり) 기간 중에는 여지없이 성이 개방 되었다.
국가 법률과 민간운동 까지 동원해도 성과가 없던 요바이 풍속은 물질문명에 의한 생활환경의 변화로 자연적으로 소멸되어 갔다.
(http://www.paichai.ac.kr/)

기모노섹스, 혼욕(混浴), 요바이로 난잡해 질대로 난잡해진 사회에서 여자가 남의 자식을 낳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래서 “가계 계승에 있어서도 혈통에 구애되지 않았다.” 一夫多妻制도 부정 되었으며 서로의 정절을 요구 하지도 않았다.” 제 자식임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모든 아이의 이름은 반드시 모(母)가 지”어야 했던 것이다. “人生의 意義와 理想으로 한 것이 異性과의 性關係, 즉 사랑에 전념하는 것”이 된 것은 中國倭 이주 이래로 日本의 性風俗이다.

긴 공창제도(公娼制度)의 역사를 가지고 전시에는 「위안부」 연행을 국책으로 해 온 일본 정부측은 능동적으로, 혹은 이렇다할 저항도 없이 메군의 매춘과 성병 예방을 보장했다. 그 양자의 협력에 의하여 메군병사가 성병에 걸릴 염려없이 매춘을 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의 기초가 점령개시 후 반년 정도 사이에 만들어지게 된다.

倭奴政府의 주도로 종군 위안부를 국책으로 실시 했다고 실토 하지 않는가. 제 버릇을 못 버리고 패전 후에도 메군을 위한 매춘이 이루어 졌음을 말하는 도입부다. 아래는 왜노정부에 의해 어떤 식으로 매춘이 확대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 : 오락 및 위락 협회, 일본여자를 메군의 오락과 위락으로 제공하는 단체라는 의미)의 위안소가 일본군의 병참 사령부에서 고안했던 종군위안소 규칙을 전부 참고 했다는 기술이다.

일본 정부는 항복하여 불과 3 일째인 8 월 18 일, 점령군용으로 성적 위안시설을 준비하여 그 영업을 적극적으로 지도하며 빠르고 충실한 설비를 도모 하도록 전국에 지시, 이어서 유곽과 기생집, 요정, 카페, 또 산업전사 위안소의 업자들에게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를 결성시켜 1 억엔의 예산을 투입 관계관청을 동원 하였다. 최초로 개점한 RAA의 위안소 에서는 일본군의 병참 사령부에서 고안했던 종군 위안소 규칙을 전부 참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점령 2, 3 개월 사이에 매춘 전문점이나 캬바레, 댄스홀, 맥주홀 등 점령군에게 여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전국 각지에서 지방청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전후 처리의 국가적 시설의 일단으로서 진주군 위안의 대업에 참가하는 신일본여성의 솔선협력을 구함」이라 하여 숙소·피복·식량지급을 약속하는 RAA의 공고에 패전 직후 아사상태에 있던 많은 여성이 모여들어, 최성기에는 7 만명, 이듬해 봄의 폐쇄시에는 5 만 5 천명의 여성이 일하고 있었다. 메군은 이와 같이 일본측 으로부터 제공받은 성적 「위안」을 향유 하면서, 댄서나 맥주홀 종업원까지 포함하여 실제로 메군병사와 관계를 갖든 갖지 않든 간에 RAA의 여자들에게 강제적인 성병검진을 시켰다.

폐창령(廢娼令)에 따라 창기단속 규칙 등은 폐기 되었지만, 말뜻 그대로의 의미로서 공창제도, 즉 공권력에 의한 관리매춘 제도의 폐기를 GHQ도 추구했던 것은 아니고, 일본 정부에도 그러한 생각은 없었다. 머지않아 구 기생집이 접대소, 구 창기가 접객부, 유곽이 특수음식점가·아카센(赤線) 등으로 호칭은 바뀌었지만, 전쟁 전부터 있었던 공창제도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집창(集娼)·매춘부로 부터의 세금징수·성병검진의 강제는 계속 되었다. 공창제도는 철폐는커녕 전후에는 메군용의 새로운 공창지구 마저 만들어지고 있던 것이 진상이다.

「가리꼬미(Round Up)」라 불리웠던 일제검거에 의한 강제 성병검진, 강제치료의 피해이다. 검진이란 말은 위생적인 일, 혹은 본인을 위한 일이 실시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집창지구의 여자들에게 실시된 성병검진의 실태는 그것 자체가 잔인한 성폭력 이었다. 메군과 그 지시를 받은 일본정부·지방청은 메군병사를 성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집창지구 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그 폭력을 가두로 까지 확대 하였다. 거리에서 여성을 다짜고짜 납치하여 강제적인 검진을 실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폭력을 합법화한 것이 앞서 언급한 성병 예방법이다. 최초의 「가리꼬미」는 폐창령의 4 일 뒤인 1 월 28 일에 동경에서 실시되어 그 후 전국에서 거듭 실행 되었다. 3 월의 RAA 폐쇄는 수많은 여자들의 일거리를 빼앗았지만, 그 대부분이 노상 매춘(街娼) 이외에 따로 살 길을 마련할 수 없었다. 각지에 노상 매춘이 급증하고 더우기 성병이 만연하여, 8 월의 전국적인 「가리꼬미」에서는 대략 만 5 천명이 체포 되었다. 「가리꼬미」는 49 년 9 월 까지 미 헌병의 지휘로 이루어지고, 그 이후는 일본측이 일체를 인수 하였다. 미 헌병이나 일본관헌이 거리에서 매춘을 한다고 의심하는 것만으로 저항도 못하고 폭력적인 연행이 자행 되었다.

자국민 한테도 저러는 倭奴政府가 타국민 한테는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갈 거다. 아래는 해외 주둔 메군에 의한 매춘의 유래와 실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판할 수 없는 강간사건과 표리일체였던 것이 매춘의 제도화였다.
다른 제국주의 군대와 마찬가지로 메군 에서도 강간과 함께 압도적인 물질력으로 식민지·점령지의 여자들을 굴복시켜 「매춘」하는 일은 긴 세월의 관행 이었다. 「매춘」을 전제로 한데다가 메군이 중시한 것은 성병에 의한 군대의 전력 저하이며, 그 대책이 여자들에 대한 관리―강제 성병검진의 제도화이다. 해외에 주둔하는 메군의 매춘관리는 1898 년의 필리핀 점령 직후부터 시작된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세계 각지에서 메군은 현지의 매춘시설을 직접·간접으로 관리하고 여자들에게 성병검진을 강제하고 있었다.

메군은 길거리 매춘부와 노는 일이나 집창지역 에서의 매춘을 막지도 않았고, 메군기지 주변에는 새로운 공창지구 까지도 생겨나게 하였다. 후생성이 발표한 1952 년의 메군병사 상대의 노상 매춘은 7∼8 만명 이상 이었다.

한국전쟁 시기에는, 일본은 메군의 성적 「위안」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것을 두고 因果應報라고 하는가. 이때 까지는 한국에서 떨어져 나간 이래, 일본이 우리나라에 자행한 온갖 만행에 대한 응징이 전무 했었다. 지난 6, 7 백년간 한국은 미개 일본이 필요로 하는 온갖 물건을 빼앗고 심지어는 세계적인 문화재까지 약탈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낙토였다.



6. 일본사는 곧 매춘사 이다 (4)

메군장교는, 가해자인 메군병사가 피해자를 범하기 전에 「쵸코렛과 1달러의 군표를 주었기」 때문에 「강간이 아니라 매춘이다. 오히려 소녀들을 단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종군 위안부에 대한 倭奴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순결한 어린 소녀들이 어떻게 일본군에 납치되고 끌려 갔던가. 친구 집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출소 앞을 지나다가 순경에게 붙들려 그 길로 강제로 끌려갔다. 학교 담임 선생이라는 자가 정신대에 나가라고 했다.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속였다.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며 소녀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하여 끌려간 소녀들 중에는 11 세의 어린아이 까지 있었다.

”慰安所”라는 것을 처음으로 설치한 시기는 1931 년 滿州 侵略 때라고 한다. 당시에는 적은 수의 위안소를 설치해 이 지역 에서만 제한적으로 운영 하다가 1937 년 南京大虐殺 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이 주둔한 모든 지역으로 확대 설치했다. 南京을 점령한 일본군들이 약탈과 방화를 일삼고 수많은 中國人을 학살했다. 특히 점령지 여자들을 무자비하게 강간했다. 이러한 일본군들의 만행에 中奴들의 심한 반발로 反日感情이 격해지자 일본군은 점령지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컸다.

그러자 일본정부(일본은 자발적인 참여 라거나 기껏해야 일본군 자체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발적인 참여는 일본같이 유구한 매춘사를 가진 나라 에서만 가능하다. 전시에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연행을 국책으로 해왔다고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는 군대가 주둔하는 모든 지역에 성적 위안시설을 하루속히 정비 하도록 지시했다. 일본, 이씨조선, 대만, 만주, 중국, 남양군도와 동남 아시아의 여러 나라 어느 곳에서나 일본군 주둔지에는 반드시 위안소가 설치 되었다.

일본군 내에서 자체적으로 한 것이라고 전가하면, 일본 정부와는, 倭奴 히로히토와는 무관해지는가.

◀ 자살기도를 시도했던 도죠 히데끼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국민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A급 전범이자 2차 대전 중 倭奴 首相 이었던 도조 히데끼(東條英機)의 말이다. 전후 일본이 메군을 상대로 벌인 매춘은 倭奴 히로히토가 전범 처벌을 면탈코자 광적으로 실시한 국책 사업이었다.

정말 도조 히데끼는 메국이 말하는 전쟁광이자 악의 화신인가. 라이프 2차대전은 도조 히데끼가 ‘고귀한 가문 출신’이라고 했지만, 멀어도 한참 먼 얘기다. 도조 히데끼는 倭奴의 노예가 되어 착취당한 朝鮮 陶工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壬辰倭亂 당시 李氏朝鮮을 침략한 倭奴들이 倭城까지 쌓아서 우리나라 문화재며, 동물,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갈 때, 0순위로 혈안이 되어 모조리 찾아내 끌고 간 陶工의 후손이다. 하긴 中國倭 출신의 倭奴 입장에서는 李氏朝鮮의 陶工은 고귀한 출신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들 도공들이 倭奴 땅에 끌려가서 어떻게 살았나. 감금되어 바깥구경 조차 못하고 평생을 도자기만 만들어야 했다. 임진왜란 직후 도요토미가 죽자,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는 신분까지 고정 시키면서 도공들을 착취하고 또 착취했다. 도공들의 후손들까지 대대로 도자기만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지금 그 후손들이야 선조가 원해서, 자신들이 원해서 도자기를 만드는 줄 알겠지만, 에도시대(江戶時代) 이후로 직업을 바꿀 수도, 거주를 이전할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 것으로 볼 때, 도조 히데끼의 가계에는 倭奴에게 특별 충성한 자가 나왔나 보다.

제 조상을 본받아 도조 히데끼 역시 히로히토가 시키는 대로 충실히 따른 꼭두각시였다. 그래서 2차 대전 대부분의 기간 동안 首相으로 장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히로히토 자신이 일본의 유일, 최고의 통치권자이자 일본의 유일, 최고의 통수권자였다. 히로히토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금치산자 같던 제 아비 다이쇼(大正)를 대신해 15살 때부터 섭정노릇을 하면서 일본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천황의 신적 권력을 마음껏 행사하던 자였다.

패전 으로부터 1 년 정도의 사이에는, 일본사회에 매춘부가 만연했던 시기이다. 앞에서 말한 노동성의 조사 에서는 54 년 전국의 집창지역 1775 개소 중에는, 여성 12 만 4289 명이라 한다. 55 년∼56 년에는 노상 매춘이나 숨어서 하는 매춘부를 포함하여, 1955 년 전후의 매춘부는 총수 50 만∼60 만명이라 얘기되고 있다.

전후 일본 매춘부가 50 만∼60 만명 밖에 안됐다는 것은 과소평가 되어도 너무나 과소 평가된 것이다. 족히 그 열배는 되었을 것이다.

飢餓와 정부의 대기업에 대한 막대한 전시보상, 군의 물자은닉·부정방출, 식량이나 생활물자의 결핍, 폭발적인 인플레, 실업자의 격증으로 일본에서 賣春이 불가피하게 일어 났다고 변명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매춘을 들여오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일본 같은 상황으로 걸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性 가치가 땅에 떨어진 일본 이기에 발생한 상황이다. 남의 나라에 반인륜적인 매춘이라는 성 문화를 도입하고 어린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고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일본 이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기야 매춘은 일본이 저지른 만행의 빙산의 일각에 일각도 안된다.

‘제국주의와 성폭력’에서는 패전 후 일본의 매춘 성행을 일본 정부와 메국의 책임으로 결론 내리고 있다. “메군에 의한 일본여성 강간사건은 점령 직후부터 빈발한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실제로 일본에서 일본 여자들에게 대한 강간은 천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 일본여자의 성적 유린은 메군정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모노섹스와 혼욕, 요바이를 즐길 때부터 이미 일본 남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자행되어 온 전통이다. 이들 3 대 성문화가 일본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이러한 사실은 고작 한, 두 줄로 축소하고 마치 메군에 의해 강요된 매춘으로 말미암아 현대 일본 매춘의 토양이 다져졌다는 식으로 호도하는 것은 진실을 은폐하는 수작이다.

설령 일본정부가 매춘을 국책으로 하지 않았다 해도 유구한 賣春史와 公娼史, 그리고 불특정 다수가 함께 하는 공개 성문화를 가진 일본 이기에 패전 후에도 매춘이 극성을 부렸을 것은 틀림없다.

뭐가 억울하다는 것인가. 남의 나라도 아닌, 자국 정부에 의해 행해졌고, 자발적인 참여에, 대가도 받았고, 출퇴근도 가능했다. 무엇보다 찬란한 일본의 전통 문화를 계승한 것이 아니던가. 이것은 인간사냥을 해서 매춘을 강요한 종군 위안부도 아니고 일본 나름의 당당한 직업 이었다.

그 후 일본의 상황은 어떠한가. 물론 유구한 매춘의 전통을 계승, 발전 시키고 있다. 일본 여자들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온갖 형태의 매춘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것 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외국여자와 위장결혼을 해서 매춘조직에 팔아 넘기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도처로 매춘관광에 나서고 있다. 2차 대전 후 차마 입에 담기도 거북한 온갖 난잡한 性文化가 일본에서 생겨나 그 중 일부는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일본의 성문화는 미성년의 여자들과 폭력조직이 주도하고 있다.

중국으로 원정 가서 호텔을 통째로 빌려 섹스파티를 한 사건은 어떤가. 2003 년 9 월 16일, 광둥성(廣東省)의 주하이(珠海)에서 3 백 80 여 명의 倭奴가 떼거리로 5 星級 특급 호텔에 묵으면서 3 백 80 여 명도 아닌, 5 백 명이 넘는 여자를 한꺼번에 불러 광란의 섹스 파티를 벌였다. 오늘날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온갖 새로운 매춘 형태(정상인의 정서를 해하는 변태 수준이다. 패전 직후에는 메군을 상대로 성냥불이 다 탈 동안, 못 볼 것을 보여 줬다던가)가 일본에서 생겨나, 전세계로 수출되고 있다.

요컨대 일본의 매춘 내지 공창은 일본 자신의 책임일 뿐, 다른 어느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제국주의와 성폭력’은 거짓과 위선과 허구로 가득 차 있다. 읽으면서 솔직히 일말의 동정심도 생기지 않았다. 그 반인륜적인, 유구한 매춘사와 공창사를 가진 일본이 우리나라에 한 짓을 보라. 우리나라 사람들을 從軍 慰安婦로 끌고 간 것 말고도 우리나라에 일본식 매춘을 이식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는 매춘을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매춘부가 들어온 것은 일본과 체결한 1876 년 병자수호늑약에 의해서였다. 배달 건국을 기점으로 해도 4022년 후에 倭奴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공창이 처음 생긴 곳은 부산으로 1902 년 7 월 일본인 거류지 바로 옆이었다. 처음에는 일본 여자들을 데려 왔으나,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곧 한국 여자들에게 마수를 뻗쳤다.

이처럼 倭奴 강점기 때 생긴 매춘이 광복 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미군정 주도 하에 계속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만일 일본이 우리나라에 매춘 내지 공창을 들여오지 않았다면, 純潔思想이 지배하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을 메군정이 매춘부로 전락시킬 수 있었을까. 倭奴가 우리나라에 매춘을 이식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수 없었다. 아무리 자국과 해외를 불문하고 메군 주둔지마다 매춘시설을 만들기에 급급한 메군정 이라할 지라도 양의 탈을 쓰는 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매춘부로 만들고도 이 땅에 발붙이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매춘부가 필요한 메군정은 그 대안으로 유구한 매춘과 공창의 역사를 가진 일본에서 매춘부를 공수 해왔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일본은 전인류를 겨냥해서 새롭고 교묘해지는 매춘및 성문화를 전파해 오고 있다.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하류 들에 대한 남다른 사대성에서 탈피하여 우리민족 고유의 문화를 꽃피우는 것은 우리들 각각의 마음자세로 부터 기인된다. 또한 이는 한민족이 가질 수 있는 세계사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日本史はすぐ売春社だと言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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볷{럍궼궥궶귦궭 봽뢶럍궬. 궩귢궳듰뜎궳궥귊궲궻빒븿귩롷궚볺귢궶궕귞귖궩귢궬궚궼렔빁궫궭렔귞둎뵯, 뵯밯궠궧궫궻궬. 볷{궻봽뢶롊궼 뭷뜎`궕댷뢟궢궲궔귞럑귏궯궫.

2렅묈먰뱰렄 볷{궼뮝멞릐, 뭷뜎릐, 궩궻뫜뜎갲궻룺룛궫궭귩]똓댱댝븏궳떗맕쁀뛱궢궶궕귞렔뜎궻룛릶뼔궼 {뱘궻 봽뢶븏궳띿궯궫. 궞귢궼 2렅묈먰궻봶똧귩먣뼻궥귡{궟궴궸뵴궚궶궋궳뱋뤾궥귡뚺멢궻럷렳궬.

`썑(`썑), 릔묬궻뿉궶궵궳쀝먪봏됦궕뜎궻 뜎븑귩묭궯궲릶뷨봏듩렔빁궫궭귩긖깑`긂깛볷{궼궩귢귖뫉귟궶궘궲렔뜎궻룛묪귏궳룮뷼돸궢럑귕궫궻궬. 볷{궳 봽뢶궻쀰럍궼궩귢궞궩뚀궔궯궫궴뙻궎. 궫궬뾋땦궶`뱷귩뵯밯궠궧귝궎궴럙궯궫궞궴궸됡궗궶궋. 2 렅묈밹멟뚣궸릂궕럔궻롨귩닾궯궲봽뢶몕똀궸봽궯궲궢귏궎궞궴궼볷{궳쁈궸딳궯궫븮뫋궬.

맻뾪릐궕볷{귩띍룊뻂뽦궢궫 1543 봏궔귞럑귏궯궫볷{뼬뫎궴궻맯븿둾밒뚴봹궼, 렄듩궕똮궭궶궕귞귖궯궴둮궕궯궲뛱궯궫. 룊귕궲 400 봏듩볷{뼬뫎궸댿`럔귩믯떉궢궫깉[깓긞긬뜎됄궼벫믦궠귢궲궋궶궔궯궫. 볷{귩뛱궖뚴궋궶궕귞뻜댲궢궫깉[깓긞긬뫝궘궻뜎궻릐갲궕궥귊궲듵귏귢귡궔귞궬. 궞궻뢷듩긽긐긞긏(빫뜎)궴깉[깓긞긬둫뜎궼볷{뼬뫎궸둰빶궻닩륃귩뒾궣귡궴뙥귡. 럡궫궭궻댿`럔궕궇궻뼬뫎궸댷륚궸궶궯궫궶궴뙻궯궲뙻뾲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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봲먰댥뚣뭆궙궺(빫똓)궕볷{궸릋뮄궢궶궕귞긽긐긞긏궼 쀱뱡궻볷{뼬뫎궸댿`럔귩믯떉궥귡롥쀞뜎됄궳븖귂뤵궕궯궫. 볷{궼듰뜎먰몚궳긽긐긞긏궻빜궫귪딈뭤궴벏렄궸, 긽긐깛궻땨{딈뭤궴궢궲궩궻@귩뒶星궸릩뛱궢궫. 긽긐깛궻땨{딈뭤궴뙻궎(궻궼)봽뢶{먠궬. 봽뢶궼멟뚣볷{궻띍묈뜎랉럷떾궬. 궞궞궳먑궋궬긤깑궕뜞볷궻볷{똮띙귩띿귡뙰붿궸궶궯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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궞궞궳덇궰럚밇궢궲럙궎궞궴궼 궩귪궶덝귞궶볷{궕듰볷빘볒댥뚣듰뜎궸볷{렜봽뢶귩롦귟볺귢궫궴궋궎궻궬. 궩궻멟귏궳듰뜎궻 딾룛궼뛼궋떝{궴둾렞궳럛봹둏몏궴둾뽦궴|뢱귩_궦귡룛묪궳궇궯궫. 궞귢궕 볷{렜 봽뢶궻벑볺궳뜞볷궻귝궎궶 뭁룂룴룛궴]뿇궢궫궻궬.




6. 볷{럍궼궥궶귦궭봽뢶롊띦궧귡 (2)

볷{궕뼻렊(뼻렊) 렄궸뿀궲궔귞궞궩귘궯궴뚺둎밒궶맜빒돸(뭶븿긜긞긏긚, 뜫뾹, 깉긫귽)귩뜧먥궠궧귝궎궴럙궯궫궞궴궼, 갻됦궕뜎궻뾋땦궶`뱷귩덦뚿귩@궘궞궴궼 뛼쀭, 뮝멞궬궚궳궼궶궋궺. 맊둉궕궥귊궲럡궫궭궻`뱷귩뿚됶궥귡궞궴궕궳궖궶궋귅귡귏궎궔갽궥귡뛩궑궳(궔귞)궕궶궔궯궫궬귣궎궔. 궳궼궶궚귢궽뭞뙥궶궋룋궳궢궶궚귢궽궶귞궶궋궴궋궎맻뾪궻깛긐긐@깛긚긳궠궑뼰륆뙊]귦궶궚귢궽궶귞궶궋궴궋궎뛩궑궳궳궇궯궫궬귣궎궔. 궞궻렄딖볷{궼맻뾪궻궥귊궲궻귖궻귩떢밒궸^럸궯궲궋궫. 궢궔궢궞궻궟귣궼둖뜎궸뾃뢯궢궫볷{궻맜빒돸궕릐쀞귩뫢뿇궻뗂뭭궳믁궋븼궯궲궋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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볷{궕맻뾪빒븿궬궚떢궯궫귝궎궸긾긫깛긐긶긞긧깛뛼빁궔귡궔? 됦궕뜎궕 돒_궸븵귩돷럲궢궫궩궻뢷듩궔귞됦궕뼬뫎궻빒돸귩궩궻귝궎궸떢밒궸뽎뺥궢궲뿀궫.

뽎뺥궴뙻궎(궻궼)궞궻귝궎궸궥귡궻궬. 묆묆궸 뷨띙럾, 뷨띙{귩띿궯궲뺡궢궲, 뷨띙럾궼묈궖궋룋궬궚 5 깣룋귩띿귡궞궴. 쀰묆 `돞귞궻뭷룊귕궲돞벞궸긫긞긏[긐깛긐궴궋궎돞{귩띿궯궫궞궴궼긮_긚(븇)궬궯궫. 34 묇긙깈긽귽(삷뼻)궼 갻뷨띙먯갽궕뿬귢귡 갻뷨띙"뭤궸 갻뷨띙궧귟귅(뷨띙묈럾)갽귩띿궯궲 뷨띙묈{궳뺡궢궫. 긙깈긽귽궼귪궳귖 갻뷨띙묈븄(뷨띙묈웥)갽궸돹뻹몤궠귢궫. 쁟뗁궥귡궻궕륂궶 볷{룕딬궸럄궢궲궓궋궫딯^궬.

뮝멞믅륪럊궔귞궇귞귚귡궞궴귩뽎뺥[궩귢궳귖밮빒둾궼볩궢궔궯궫궻궔둾귆궞궴궕궳궖궦궸, 뚣궳맻뾪릐궔귞둾귪궬. 밮빒둾궼깗깛긐{깛(돞뺎뫕), 긐@깛깑긞긏(듡腕), 뛼쀭밮빒뒸, 뿘럞뮝멞밮빒뒸궸덙궖뫏궖뚙붥뽞궳릈궎궣궲둾귪궬]궢궫뙅됈, 궋귝궋귝 20 맊딬룊붦궸궼궞귪궶뙻뾲귩빓궘귝궎궸궶궯궫.

{딠(봗뽜딍밫 : 뼻렊궕귪궬렄귝궯궲렔랤궢궫)궴뙻궎볷{맱_귩뙸귦궥룕벞, ~띗땆뢱, 뭢맜귩궥귊궲뱳궢궘롦귟뫓궑궫똓릐궻묆궬궯궫(긭깓긭긣_쁞궻뿞롨).

궞귢궔귞볷{럍궸궓궋궲봽뢶궻렳뫴귩귝궘뙥귝궎.

볷{궳궼봽뢶궻붌뿏궕띍뗟궻뙸뤭궳궼궶궘쀰럍밒궸뮮봏궻뜧귩렃궯궲궋귡. 볷{궼뮮궋듩뚺룴(뚺룴)맕뱗귩댸렃궢궲뿀궫뜎궬. 뚺룴귩럡룴(럡룴), 궥궶귦궭~깑긽긟깛궴뗦빶궥귡딈궼^뎑롥뫬궳궼궶궘맠{궻봃떀됀됀붬궬.
볷{쀰럍뤵깇[긇뗦(뾙둭)궻먠뭫궼뻃륿뢋땑(뻃륿뢋땑) 렄묆궻 1585 봏궳궠궔궻귍귡. 벩먯됄뛐(벩먯됄뛐) 뢜뙛댥뚣]뚈(]뚈 : 뙸띪궻 뱦떈)귩듵귕궫멣뜎둫뭤궳둮랼궢궫.
깇[긇뗦궻뿕뾭궼뷂뾭궕뛼궔궯궫궴궞귣궸궩귢궶귟궻둰렜궕떗뮧궠귢귡궧궋궳룑뼬궴궼떁뿣(믅귟)궕궇궯궫. 궞궻궫귕궸롦귟믵귏귟궻륶귡궞궴귩궔궖귦궚궲~깑긽긟깛궕맰귪궳렄듩궕똮궭궶궕귞궩궻뭤댧귩렪궯궲뛱궯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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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 맊딬궸궼 갻귺긮긽(뾙룛)"궴뙻궎(궻궼)뚂뾎뚭궕뙸귦귢궫. 16 맊딬궸궼 "몓쁖(룛쁚)"궴궋궎뚁뤝귖럊귦귢궫. 뾙룛궕뿚몒밒궶룛맜몴궳럙귦귢귡귏궳궢궫궞궴귖뭞맜뾆댧롊됵궻뤭뮙밒뭚뽋궬 (뽋뵏궋볷{놬, 뚷뮰뗦(븮뫋)@, 놞, 듰뜎i긤긞긣긓) ( http://www.goodlove.pe.kr/bbs/zboard.php?id=japan&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90 랷뤖).

궞궞궻덙뾭빒(뚷뮰뗦(븮뫋)@, 놞, 놟)궼빒뤞뭁댧(빒뤞귩싇뫗궢궶궋궳)궳뵴純궢궫궻궬. 궴궲귖뮮궘궲뱸믨멣뫬귩덙뾭궕궳궖궶궔궯궫. 놠몵궑궫 50 봏묆댥뚣볷{봽뢶궸뫮궥귡궋궘궰궔궻땆뢱궬.

볷{맠{궕긽긐깛궻궫귕궻봽뢶귩롥벑궢궫궞궴궼 1945 봏 8 뙉 26 볷궔귞궬. 볷{궻~븱궢궫볷궼 1945 봏 8 뙉 15 볷궬. 뜎됄똶됪귩{뛱궸댷궩궎궴궥귡궴, 렄듩귩뾴궥귡궴궋궎럷렳궳뙥귡렄, ~랷댥멟궔귞긽긐깛궻궫귕궻뚺룴(뚺룴)귩_땉궢궲똶됪궢궫궞궴귩빁궔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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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봏 8 뙉 26 볷볷{궻롥뾴륷빓궸궼궞귪궶뛎뜍궕띦궧귞귢궫. 갾멟뚣룉뿚궻궫귕궻뜎됄뗙}{먠궻덇궰궴궢궲뮄볇똓댱댝궻궧귟귅떾궸랷돿궥귡. 륷볷{룛맜궻뿦먩랷돿귩]귔. 룛]떾덒뺝뢜. 봏 18~25 띘. 뢧뵎갋댼븵믯떉.갿 뛎뜍롥궼뗢띆(뗢띆)궸{븫귩뭫궋궫 RAA궴궋궎뭖뫬궬궯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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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뙉 27 볷뱦떈뚮뫥(묈밹)궳Omori(묈륺)궻긦깛긲 "뚉귏귡궳궸궼(룷뮠)"궕 1 뜂뭆궙궺먭뾭댱댝룋궴럚믦궸궶궯궫. 뼻궘귡볷 RAA 뒼븫궫궭궼뛠{궻멟궳먬맽렜귩뛱귦귢궲 갾륷볷{띋뙕궴볷{룛맜궻룂뙃귩롧귡멳먐럷떾궶궻귩렔둶, 뽅럡뺫뚺궻뙂댰귩뚂궘궥귡갿궴먬뙻궢궲 갻밮뛠빩돷뼔띘갽귩랳룯궢궫. 릶뷨봏`뱷궻뾙둺궸덙궖뫏궖륷궢궋뜎랉봽뢶궕럑귏귡뢷듩궳궇궯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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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A궻댱댝룋궼뭆궙궺^롮궴궴귖궸멣뜎밒궸 45 뙿궳몵궑궫궢댱댝븏궼 4,000 릐]귟궸묪궢궫. 긽긐깛귩몜뫮궥귡럡룴(럡룴) "깉긬깛긐(뾪긬깛)"궼궇궯궴궋궎듩궸 40 ]뼔릐궳몵궑궫.
GHQ궼 1 뙉 24 볷뚺룴맕뱗궻봯~귩뙻궋븊궚귡궴, 볷{맠{궼 2 뙉 2 볷멣뜎똸@궸 갻뚺룴맕뱗궸듫궥귡럚렑갽귩돷궢궫궢 2 뙉 20 볷뚺룴맕뱗귩맫렜궳봯~궢궫. 궞궻렄릐릆봽봼뗕~딮뫁궕맕믦궠귢궫궞궴궳빁궔귡귝궎궸궇궻렄뵇궘궻귖뾙둺궻뚺룴궶궵궼릐릆봽봼귩믅궣궲떉땵궠귢궫. 붹빢궢궫뭑뛺뭤뫱귘븉띿궸뛯궠귢궫_뫚궻뼷궫궭궕댋먿럗귩믅궣궲 1 뼔~2 뼔~궸떾밲궸봽귢궫.
뚺룴맕뱗궕봯~궸궶궯궫궴궼뙻궎궕릶뷨봏듩뫏궚궫`뱷궕덇뢷궸뤑궑귡궞궴궼궳궖궶궔궯궫. 뾙둺궻떾밲궼 갻벫롪덚륣밲갽궳, 룴븏궼 갻룛땵갽궳뼹멟궬궚빾귦궯궫. 똸@맠{궼`뱷뾙둺뭤뫱귩뭤}궻뤵궸먗궋멄궳렑궢궲궓궋궲궞궻뭤덃궳궻봽뢶뛱댴궸뫮궢궲궼 갻뙿릐밒렔뾕쀶닩궻뙅됈갽궳됶롛궢궶궕귞뙥벀궢궫. 갻뫍멏(먗멄)뭤뫱갽궕럷렳뤵뚺봃궠귢궫봽뢶뭤덃귩댰뼞궥귡귝궎궸궶궯궫궞궴귖궞궻궫귕궬.
봲먰뚣궻똮띙밒붹빢궳궇궭궞궭궸뛼궬믅귟궻룛귩귏궴귖궸롦귟믵귏귡궻궼궼궣귕궔귞뼰뿚궬궯궫. 궇귞귚귡롨@궻럡룴궕떁뿣(믅귟)궸궇귅귢궫. (뽋뵏궋볷{(17), 뚷뮰뗦(븮뫋)놟, 듰뜎i긤긞긣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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뙅_궔귞뙻귦궽, 갻믧뜎롥`궴맜뛱갽궼볷{궻볫뢣맜귩먗뾿뾿궸뙸귦궥빒궴궥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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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뚈렄묆(]뚈렄묆)궸뿀궲궔귞궞궩귘궯궴궠귔귞궋궕뿚뾕궻궶궘딠렃궭딠궕뛀궖렅묉궸릐귩랤둙궥귡궞궴귩뗕~궢궫. 궞궻귝궎궶깛긐긐@깛긚긳궼봼궯궲}[긙긿[뱡]듂궠궧궲룛궻뺴궳귖궯궴먑뗂밒궸뢯귡, 궴궎궴궎볷{뭞궬궚궳궼뼖뫉궥귡궞궴궕궳궖궦궸맻뾪릐궻궓븷궸뷅귂뤵궕궯궲, 뫚궳덙궖볺귢귡뗰뜃궸귏궳럧귡귝궎궸궶궯궫궻궬.



6. 볷{럍궼궥궶귦궭봽뢶롊띦궧귡 (3)

긲깋깛긚띿됄긯긄[깑깓긡귻(Pierre Loti, 1850-1923)궼 19 맊딬뼎돺됷볷{궸궋귞궯궢귗궯궫궴뙻궎궻궸, 붯궼볫랚궻 "볷{볷딯"궴궋궎{귩럄궢궫. 궩궻{궸뫮궢궲뙻땩궢궫뫜궻빒뙞궸귝귢궽궩궻{궼귌궴귪궵볷{룛묪궴궻맜뛱댴궻딯^궴뙻궎. 볷뭷궸긡긕긙궳궓븷궳릕궺궲뿀궫볷{뼷궫궭궴긲깋깛긚멏덒궫궭궻멏뤵뿉뚴, [뺴궶귞궵귪궶뫚귘릕궺궲귖딆귪궳궘귢귡뫚뼷궫궭궻 ...... 덇먢궳볷{궼맻뾪릐궫궭귖뿚됶궳궖궶궋맟빒돸귩렃궯궲궋궫궴궋궎궻궬.

"긣깑긓븮쁂"귖 "긤깓긏뱬"궴궋궎볷{궻봽뢶븮쁂뤾궕뎴룙궬. "긤깓긏"궼긣깑긓귩렑궥볷{뙻뾲궬. 궴궸궔궘볷{궳궿궴궴궖궞귢 "긤깓긏뱬"궻뿬뛱궕궵궻댧궳궇궯궫궻궔귩뭢귞궧궲궘귢귡긄긯[긤궕궇귡. 볷{궻^귪뭷댧궸볷뛮(볷뚹)궴궋궎룋궕궇귡궻궸, 궞궭귞궼돴먵궴궋궯궢귛궸뷏궢궋뚋궳뾎뼹궶듡뚹뭤궬. 궞궻볷뛮뚋붔궸궼궓귂궫궬궢궘뫝궘궻긼긡깑궴긤깓긏뱬궕궇궯궫. 묿궔궕궩궻뫝궋긤깓긏뱬궳볷뛮뚋궸뿬귢궲뛱궘뭞맜궫궭궻뫬뎥궻쀊귩똶럁궢궲뙥궫궴뙻궯궫귟궥귡. 궴궞귣궳궞궻궓궞궕귏궢궘뙥궑귡똶럁궕궞귢댥뤵궓궞궕귏궢궘궶궘궶궯궫럷뙊궕딳궞궯궫. 15띘궻룛뭷둾맯궕됄뫎궴덇룒궸볷뛮궸뛱궯궲, 뷏궢궋볷뛮뚋궳긚귽~깛긐귖궢궶궕귞귝궘뾙귪궬궕, 궕궫궕궫궴쌟륯귩궢궫. 뼰룤귩롥뮗궥귡궩궻룛럔뭷둾맯귩뙚럷(?)덇댰럙궼둴궔궶뼷궶궻귩뺎뤪궢궲궘귢궫. 뙅떿볷뛮뚋궳뿬귢궞귪궬뫝궘궻뭞맜궫궭궻믦뒂궸귝귡쌟륯궴궋궎, 돸둾밒, 맯븿둾밒궸뿚됶궢궸궘궋뙅_궳궩궻럷뙊궼덇뭝뿇궸궶궯궫. 궵귢궬궚뫝궋릐갲궕긤깓긏뱬궻뿬뛱궸윋볺궢궫귞, 궩궻뛎궋뚋궕 "릣뵾빁, 믦뒂뵾빁"궳궇궯궫궻궔? 궞궻귝궎궸볷{릐궼궦궋귆귪멟궔귞맜귩룮뷼돸궥귡궻궸밮띓맜귩댿듁뼰궘뵯딐궢궫궢, 뿬뛱궸뫮궢궲뢜뭖띊뼭밒궸믁]궥귡뜎뼬맜궼궩귪궶륷궢궋맦몱뷼귩뵚뵯밒궸븕땩, 둮묈띋맯럀궢궫.
(http://tango.kist.re.kr/..0602.htm)

GHQ궻볷{뼬롥돸 5 묇럚릌궻덇궰궬궯궫 걏돏궠귪랷맠뙛븊^궸귝귡볷{룛맜궻됶뺳걐럚릌귘, GHQ궸귝귡룛맜뭖뫬궻덄맟땩귂뒋벍궻룲쀣, 귏궫 걏봷뮣쀌(봯룴쀟)걐궻뺧뜍궶궵, 긽긐긞긏궸귝귡볷{먫쀌궼룛맜됶뺳귩렃궯궲뿀궫궞궴궬궴궋궎귽긽[긙궕덇붗밒궬. 궢궔궢먫쀌궕럑귏궯궫 1945 봏궔귞봽뢶뻞~@궕맕믦궠귢귡 1956 봏귏궳궻볷{릐룛맜궻맜뛱뷀둙궸뫮궥귡뫬뙮궼궩궻귝궎궶됶뺳똓궴궢궲궻긽긐깛긖깛긐(뷏똓몴)귘 걏됶뺳궠귢궫볷{룛맜걐궴뙻궎(궻궼)룛맜럙몒궻덇뽋맜, 궇귡궋궼땿맜귩뼻귞궔궸궥귡궻궬.

됦궕뜎궳봽뢶귩떗뾴궢궫볷{귖떗뒴궴봽뢶궕롷궚볺귢귡궞궴궕궳궖궶궋붏띬뛱댴궴궋궎럷렳귩궰궚궶궋뜍뵏궬. {뱰궸떶궖귊궖궳궼궶궋궔. 궩귪궶롷궚볺귢귡궞궴궕궳궖궶궋붏띬뛱댴귩볷{뭷뜎뼬궕덇궰궸궶궯궲먪봏됡궗귡귝궎궸똉귟뺅궑궢궲뿀궫궻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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룛뫬귩귝궘뙸귦궥귝궎궸궗귙궯궴뵛귟븊궚궫귝궎궶뭶븿궻귏궫덇궰붼뼤궼 "궻뭷"궸궇귡. 볷{릐궫궭궼궦궋귆귪멟궔귞뭶븿(궖귖궻)귩뚿귩렄궋궰귖긩[긬깛궳궇궯궫궴뙻궎. 궞궞궸뫮궥귡궓맫뙉궕귏궭귏궭궬.
룛뫬궻멄궸|귽깛긣귩뜃귦궧궫릐갲궼긬깛긡귻[멄귩뙸귦궠궶궋궫귕궸궲귪궔귞뿪궢궫궴궋궎쁞귖궇궯궲, 롰뫎붖륛궻궫귕궻럅뺴궶궋 "긕깇긞긏`긃긞긏" 궳궇궯궫궴궋궎빁먏귖궇귡. 뼀{(뼀{) 렄묆궸볺궯궲봦뵶듩궻궚귪궔궕궿궵궘궶귟궶궕귞뭞궫궭궻궠귪궕귏궥귏궥뒩궘궴, 룛맜궫궭궼궋궰궵궞궳귖듫똚귩렃궰귝궎궸뼖귩렃궢궲믅궯궫궴궋궎쁞귖귖궯궴귖귞궢궋.(뭶븿궼벍궘긹긞긤갷뜫뾹궼]뚈렄묆듊뒁궻뤭뮙, 긐긞긤긢[, 2003. 3. 10.)

깉긫귽(귝궽궋)궴뙻궎(궻궼)뽭궸쀶릐륰렭궸릕궺귡븮뫋귩렑궥궻궬. 먎궻볷{궳뙅뜢궼됄긌깏궻뙅뜃궸맟뿧궠귢귡궞궴궳뙅뜢궻멟뭞갋룛궻맜뚴맕궼빶뙿궻뽦묋궬궯궫. 됡땸맜뚴맕궴궼귦궦궸릂궕뙂귕궲귘궯궫뭞궸궓됃궸궶궯궲륷궢궘븎븏맯뒋귩럑귕귡. 궵귪궶뽦묋귖뵯맯궢궶궋. 귔궢귣뼷귝귟궼맜똮뙮롌궸궶귡귝궎궸]귔똛뛀궕떗궔궯궫.
뼷궼뙅뜢궻멟궸뭞궫궭궻듩궸릐딠궕궶궔궯궫궴궔, 릆뫬밒갋맜둰밒궸궵귪궶뙁쐜챴궋궕^궯궫. 궞궻귝궎궬궔귞봏궓궔궦뼷귩렃궯궫릂궼뽭궸릕궺궲뿀귡뭞뾈묪궕궋궶궋궔뙥궲륲봹궬궯궫. 깉긫귽궼뭁룂궸뼟뜢뭞룛궸뙽궯궫궻궳궼궶궘궲귘귖귕귘긎긼깛긦깈, 긫긞긏}긞궼룛궸귏궳떀묡궠귢궫.
1800 봏댥뚣볷{궸궼륪떷뛱럷귘뫚멣뫬뛱럷귩롥듡궢궲됌럷귘^릣궶궵띚볩궸뷈궑궫몾궴볩봨멏몾궶궵귩궥귡덇롰궻먃봏됵궕궇궯궫. 궞궞궳뮸궢궋궞궴궼궞궻먃봏됵궕븫뿇뼟뜢뭞룛궻맜뽦묋궴뙅뜢뽦묋, 깉긫귽븮뫋궸뮳먝듫^궢궲궋궫궴궋궎_궬. 궫귏궸뼷궕쌟륯궳궇귡귖궢귝궎궔뾌뿶궢궫릂궕뚈빧귏귟귩뙲궸궥귢궽먃봏됵궔귞뢯궫릐갲궕궋귣궋귣궶뿉귩궼궫귞궋궫. 깉긫귽궻뜧먥궻궫귕궻뜎됄밒뱖쀍궕궶궔궯궫궻궳궼궶궋. 뼻렊렄묆궸궼뜎뼬궸벫빶궸롷륪(뢇릆)귩뿧궲궲롶떝밒쀏뿚귩떗뮧궢궫궢, 뿉귢귡H븮궻뭷귩뜧먥궢귝궎궴궥귡맠랉뤵궻뱖쀍귖궇궯궫. 롊됵떝덄렅뙰궳궬궚궳궶궘뼬듩뭖뫬궸귝귡[뽚^벍귖밯둎궸궶궯궫. 궢궔궢뫚띟귟(귏궰귟) 딖듩궻뭷궸궼]뭤귖궶궘맜궕둎뺳궠귢궫.
뜎됄@뿥궴뼬듩^벍귏궳벍덒궢궲귖맟됈궕궶궔궯궫깉긫귽븮뫋궼븿렲빒뼻궸귝귡맯뒋듏떕궻빾돸궳렔멢밒궸뤑뽅궢궲뛱궯궫.
(http://www.paichai.ac.kr/)

뭶븿긜긞긏긚, 뜫뾹(뜫뾹), 깉긫귽궳뿉랦궳렲궵궓귟뿉랦궸궶궯궫롊됵궳룛궕뫜릐궻럔귩맯귔궞궴궼뱰궫귟멟궳궼궶궋궻궔. 궩궻궫귕 갾됄똶똯룦궸궓궋궲귖뙆뱷궸궞궬귦귞궶궔궯궫.갿 덇븎뫝띐맕귖븉맫궸궶궯궫궢궓뚚궋궻믣먢귩뾴땫궢궶궔궯궫.갿 럡궻럔궶궻귩둴봃궥귡뺴@궕궶궋궔귞, 갾궥귊궲궻럔떉궻뼹멟궼뷠궦^(뺢)}갿뚭궼궢궫궻궬. 갾릐맯궻 댰`궴 뿚몒궸궢궫궞궴궕 댶맜궴궻 맜듫똚, 궥궶귦궭닩궸먭봑궥귡궞궴갿궸궶궯궫궞궴궼 뭷뜎` 댷뢟댥뿀궳 볷{궻 맜븮뫋궬.

궬궴뚺룴맕귖(뚺룴맕뱗)궻쀰럍귩렃궯궲밯렑궸궼 걏댱댝븏걐 쁀뛱귩뜎랉궳궢궲뿀궫볷{맠{뫀궼벍밒궸, 궇귡궋궼궞귢궴궋궯궫믭뛕귖궶궢궸긽긐깛궻봽뢶궴맜뷲뻞귩뺎뤳궢궫. 궩궻{럔궻떐쀍궸귝궯궲긽긐깛긮깈깛긐긖궕맜뷲궸궔궔귡륲봹궶궢궸봽뢶궕궳궖귡귝궎궸궥귡맕뱗궻딈멳궕먫쀌둎럑뚣뵾봏댧궻듩궸띿귞귢귡귝궎궸궶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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볷{맠{궼~븱궢궲귦궦궔 3 볷뽞궳궇귡 8 뙉 18 볷, 먫쀌똓뾭궳맟먓댱댝{먠귩뷈궢궲궩궻뎑떾귩먑뗂밒궸럚벑궢궲몓궘궲[렳궶먠뷈귩궼궔귡귝궎궸멣뜎궸럚렑, 덙궖똯궋궳뾙둺궴|롌뢜, 긦깛긲, 긇긲긃[, 귏궫럀떾먰댱댝룋궻떾롌궫궭궸 RAA(Recreation & Amusement Association)귩뙅맟궠궧궲 1 돪~궻럁귩뱤볺듫똚뒸뮕귩벍덒궢궫. 띍룊궸둎밲궢궫 RAA궻댱댝룋궳궼볷{똓궻빖땸i쀟븫궳뛩댡궢궫]똓댱댝룋딮뫁귩멣븫랷뛩궢궫궴뙻궎. 궩궢궲먫쀌 2, 3 깣뙉궻듩궸봽뢶먭뽩밲귘긌긿긫깒[, _깛긚긼[깑, 긮깂긼[깑궶궵먫쀌똓궸룛맜궻긖[긮긚귩믯떉궥귡{먠궕멣뜎둫뭤궳뭤뺴뮕궻뚣뎴궳띿귞귢궫. 걏멟뚣룉뿚궻뜎됄밒{먠궻덇돒궴궢궲릋뮄똓댱댝궻묈떾궸랷돿궥귡륷볷{룛맜궻뿦먩떐쀍귩땫귕걐궴궋궯궲뢧룋갋뷀븵갋륣쀆럛땵귩뽵뫆궥귡 RAA궻뚺뜍궸봲먰뮳뚣됱륉뫴궸궇궯궫뫝궘궻룛맜궕뢜귏궯궲뿀궲, 띍맰딖궸궼 7 뼔뼹, 뾺봏뢶궻빧띂궻렄궸궼 5 뼔 5 먪뼹궻룛맜궕럅럷궢궲궋궫. 긽긐깛궼궞궻귝궎궸볷{뫀궔귞믯떉롷궚궫맟먓 걏댱댝걐귩떇롷궢궶궕귞, _깛긖[귘긮깂긼[깑]떾덒귏궳듵귪궳렳띧궸긽긐깛긮깈깛긐긖궴듫똚귩렃궯궲귖렃궫궶궘궲귖듩궸 RAA궻룛묪궸떗맕밒궶맜뷲뙚릃귩궠궧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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뫜궻믧뜎롥`똓묂궴벏궣궘뭆궙궺궳귖떗뒴궴궴귖궸댊|밒궶븿렲쀍궳륚뼬뭤갋먫쀌뭤궻룛묪귩뗽븵궠궧궲 걏봽뢶걐궥귡럅럷궼뮮궋띘뙉궻뒿뛱궳궇궯궫. 걏봽뢶걐귩멟믯궸궥귡궎궑긽긐깛궕뢣럨궢궫궞궴궼맜뷲궸귝귡똓묂궻멣쀍믟돷궳궇귟, 궩궻뫮랉궕룛묪궸뫮궥귡듖뿚떗맕맜뷲뙚릃궻맕뱗돸궬. 둇둖궸뮄볇궥귡긽긐깛궻봽뢶듖뿚궼 1898 봏궻긲귻깏긯깛먫쀌뮳뚣궔귞럑귏귡. 묉 2렅맊둉묈먰궻뭷궸귖맊둉둫뭤궳긽긐깛궼뙸뭤궻봽뢶{먠귩뮳먝갋듩먝궳듖뿚궢궲룛묪궸맜뷲뙚릃귩떗맕궢궲궋궫.

긽긐깛궼쁇벆봽뢶븏궴뾙귆럷귘긙긳`@깛긐긙깉긞긏궳궻봽뢶귩멽귏궶궔궯궫궢, 긽긐깛긎궬뢂뺃궸궼륷궢궋뚺룴럮궳뵇궘궻귖궳궖귡귝궎궸궢궫. 뚾맯뤙궕뵯궢궫 1952 봏궻긽긐깛긮깈깛긐긖몜롨궻쁇뤵봽뢶궼 7`8 뼔뼹댥뤵궳궇궯궫.

뮝멞먰몚렄딖궸궼, 볷{궼긽긐깛궻맟먓 걏댱댝걐딈뭤궸궶궯궫귟궢궫.

궞궎궋궯궫궞궴귩뭫궋궲 덓됈돒뺪궴뙻궎궔. 궞궻렄귏궳궼듰뜎궳뿣귢궫댥뿀, 볷{궕됦궕뜎궸귌궢궋귏귏궸궢궫궇귞귚귡붩뛱궸뫮궥귡^뮚궕멣궘궶궔궯궫. 땸귡 6, 7 뷨봏듩듰뜎궼뼟둎볷{궕뾴궥귡궇귞귚귡뷼븿귩묭궯궲궼궶궼궬궢궘궼맊둉밒궶빒돸띭귏궳뿩묭궢궲븑귩~먑궥귡궞궴궕궳궖귡뒁뱘궬궯궫.



6. 볷{럍궼궥궶귦궭봽뢶롊띦궧귡 (4)

긽긐깛긗깛긐긎깈궼, 돿둙롌궳궇귡긽긐깛긮깈깛긐긖궕뷀둙롌귩붏궥멟궸 걏`깈긓깒[긣궴 1긤깑궻똓[귩^궑궫걐 궔귞 걏떗뒴궳궼궶궘봽뢶궬. 귔궢귣룺룛궫궭귩롦귟믵귏귞궶궚귢궽궶귞궶궋걐

]똓댱댝븏궸뫮궥귡 `뱙궻뫴뱗귩럙궋븖궔귆귝궎궸궥귡룕궖볺귢렄궬. 룂뙃궶뾠궋룺룛궫궭궕궵귪궶궸볷{똓궸쓋뭭궠귢궲덙궔귢궲뛱궯궫궻궔. 뾈묪됄궸뛱궯궲궔귞딞궯궲뿀귡뱑뭷궸뚴붥궻멟귩믅궯궲궋귡뱑뭷궓룄귟궠귪궸궰궔귖궎궴궩궻벞궸떗맕궸덙궔귢궲뛱궯궫. 둾뛝롷궚렃궭먩맯궴궋궎롌궕]똓댱댝븏궸뢯궶궠궋궴뙻궯궫. 뺈떗귖궢궲궓뗠귖뽛궚귡궞궴궕궳궖귡룋궳몭궯궲궘귢귡궴궋궎뚿롎궳궋궫. 볷{뛊뤾궸뢅륟궠궧궲궘귢귡궴룺룛궫궭귩뺝뢜궢궫. 궞궻귝궎궸궢궲덙궔귢궲뛱궯궫룺룛궫궭궻뭷궸궼 11 띘궻럔떉귏궳궋궫.

"댱댝룋"궴궋궎궻귩룊귕궲먠뭫궢궫렄딖궼 1931 봏 뼖뢆 륬뿪 궻렄궴뙻궎. 뱰렄궸궼룺궶궋릶궻댱댝룋귩먠뭫궢궲궞궻뭤덃궳궽궔귟맕뙽밒궸^뎑궢궲궋귡뱑뭷 1937 봏 볦떈묈땣랤 럷뙊귩궖궯궔궚궳볷{똓궕뮄볇궢궫궥귊궲궻뭤덃궳둮묈먠뭫궢궫. 볦떈귩먫쀌궢궫볷{똓궫궭궕뿩묭궴뺳됌귩럷궴궢궲딎뫝궻 뭷뜎릐귩땣랤궢궫. 벫궸먫쀌뭤룛묪귩뼰렂붱궸떗뒴궢궫. 궞궻귝궎궶볷{똓궫궭궻붩뛱궸 뭷뱙귞궻궿궵궋뵿뵯궳 뵿볷뒾륃궕똽궢궘궶귡궴볷{똓궼먫쀌뭤귩렊귕귡궻궸볩궢궠궕묈궖궔궯궫.

궥귡궴볷{맠{(볷{궼렔뵯밒궶랷돿궴궔궫궔궕볷{똓렔롥밒궸궢궫궞궴궬궴롥뮗궢궲궋귡. 렔뵯밒궶랷돿궼볷{궻귝궎궸뾋땦궶봽뢶롊귩렃궯궫뜎궳궽궔귟됀궬. 밯렑궸궼볷{맠{궕댱댝븏쁀뛱귩뜎랉궳궢궲뿀궫궴봃귕궲궋궶궋궔)궼똓묂궕뮄볇궥귡궥귊궲궻뭤덃궸맟먓댱댝{먠귩덇볷귖몓궘맢뷈궥귡귝궎궸럚렑궢궫. 볷{, 뿘럞뮝멞, 묇쁯, 뼖뢊, 뭷뜎, 볦뾪똒뱡궴뱦볦귺긙귺궻뫝궘궻뜎궵궞궳귖볷{똓뮄볇뭤궸궼뷠궦댱댝룋궕먠뭫궠귢궫.

볷{똓볙궳렔롥밒궸궢궫궞궴궬궴랢귟궰궚귢궽, 볷{맠{궴궼, `뱙 긭깓긭긣궴궼뼰듫똚궸궶귡궔.

겕 렔랤딃}귩럫귒궫뱦뤻Hideki

볷{궳밮뛠궕빁궔귞궶궋궞궴궼덇궰귖궶궋. 볷{뜎뼬묿귖밮뛠궕궠궧궶궋럷귩궥귡릐궼궋궶궋.

A땳먰붏궴벏렄궸 2렅묈먰뭷 `뱙 롵몜 덙궖똯궋궬벃멵Hideki(뱦엸뎟@)궻뙻뾲궬. 멟뚣볷{궕긽긐깛귩몜롨궸궢궫봽뢶궼 `뱙 긭깓긭긣궕먰붏룉뵳귩묮궢귝궎궴떢밒궸렳{궢궫뜎랉럷떾궬궯궫.

{뱰궸벃멵Hideki궼긽긐긞긏궕뙻궎먰몚떢궴벏렄궸닽댰돸릆궔. 깋귽긲 2렅묈먰궼벃멵Hideki궕 갻딲궋됄뽩뢯릆갽궴뙻궯궫궕, 돀궘궲귖궦궋귆귪돀궋쁞궬. 벃멵Hideki궼 `뱙궻뱙쀪궸궶궯궲랃롦궠귢궫 뮝멞 벃뛊궻럔뫕궬궔귞궬. 릔묬`뿉 뱰렄 뿘럞뮝멞귩륬뿪궢궫 `뱙귞궕 `뤻귏궳먑귪궳됦궕뜎궻빒돸띭궳궇귟, 벍븿, 릐갲귩렅궔귞렅귉쁀귢궲뛱궘렄, 0룈댧궳뙆듻궸궶궯궲멣븫{궢뢯궢궲쁀귢궲뛱궯궫 벃뛊궻럔뫕궬. 궩궎궋궑궽 뭷뜎` 뢯릆궻 `뱙 뿧뤾(볺뤾)궳궼 뿘럞뮝멞궻 벃뛊궼딲궋뢯릆궴뙻궑귡.

궞귢귞벃뛊궫궭궕 `뱙 뭤궸덙궔귢궲뛱궯궲궵궎귘궯궲뺡궢궫궔. 듒뗕궠귢궲둖뙥븿궠궑궳궖궶궘궲덇맯귩벃렏딇궬궚띿귞궶궚귢궽궶귞궶궔궯궫. 릔묬궻뿉뮳뚣뻃륿궕궹궴, 뙛쀍귩롦궯궫긤긏궕궴궼릆빁귏궳뚂믦궠궧궶궕귞벃뛊궫궭귩랃롦궢궲귏궫랃롦궢궫. 벃뛊궫궭궻럔뫕궫궭귏궳묆묆궸벃렏딇궬궚띿귞궶궚귢궽궶귞궶궔궯궫궻궬. 뜞궩궻럔뫕궫궭궼먩멵궕딂궯궲, 렔빁궫궭궕딂궯궲벃렏딇귩띿귡궔궴럙궎궕, ]뚈렄묆(]뚈렄묆) 댥뚣궳륟떾귩빾궑귡궔귖, 땹뢟귩댷]궥귡궞궴귖궳궖궶궔궯궫릐갲궬. 궩귪궶궞궴궳뙥귡렄, 벃멵Hideki궻됄똶궸궼 `뱙궸벫빶뭺맼궢궫롌궕뢯궫귝궎궬.

럡궻먩멵귩뽎붝궴궢궲벃멵Hideki귖긭깓긭긣궕뙻궎궴궓귟궸[렳궸]궯궫뿆똉귟릐`궬궯궫. 궩귢궳 2렅묈먰묈븫빁궻딖듩궻듩 롵몜궳뮮롺(?)궳궖궫.

돺귝귟긭깓긭긣렔빁궕볷{궻뾄덇, 띍뛼궻뱷렊뙛롌궴벏렄궸볷{궻뾄덇, 띍뛼궻뱷릡뙛롌궬궯궫. 긭깓긭긣궼돞댧궸뤵궕귡멟궔귞, 뗕렊럀롌귒궫궋궬궯궫럡궻븗묈맫(묈맫)궻묆귦귟귩궢궲 15띘궻렄궔귞쓲맠뽴귩궢궶궕귞볷{뙖@궕뺎뤳궢궲궋귡밮뛠궻륷밒뙛쀍귩럙궋궖귟뛱럊궢궫륰궫.

봲먰궔귞 1 봏댧궻듩궸궼, 볷{롊됵궸봽뢶븏궕궼귂궞궯궫렄딖궬. 멟궳뙻궯궫쁉벍뤙궻뮧뜽궳궼 54 봏멣뜎궻긙긳`@깛긐긙깉긞긏 1775 깣룋궻뭷궸궼, 룛맜 12 뼔 4289 릐궴뙻궎. 55 봏`56 봏궸궼쁇뤵봽뢶귘덨귢궲궥귡봽뢶븏귩듵귪궳, 1955 봏멟뚣궻봽뢶븏궼몟릶 50 뼔`60 뼔뼹궬궔귞쁞궠귢궲궋귡.

멟뚣볷{봽뢶븏궕 50 뼔`60 뼔뼹궢궔궶귞궶궔궯궫궴궋궎궞궴궼됡룷]돽궸궶궯궲귖궇귏귟궸귖됡룷]돽궠귢궫궻궬. [빁궸궩궻깉깑긹궼궶궯궫궼궦궬.

딷됱궴맠{궻묈딃떾궸뫮궥귡뵜묈궶먰렄뺚룥, 똓덀븿럱덨벥갋븉맫뺳뢯, 륣쀆귘맯뒋븿럱궻뙁뻉, 뵚뵯밒궶귽깛긲깒, 렪떾롌궻똽몵궳볷{궳 봽뢶궕븉됀뷃궸딳궖궫궴뺊됶궢궲궋귡.

볷{궕됦궕뜎궸봽뢶귩렃궭궞귏궶궔궯궫귞, 됦궕뜎궼궵귪궶륉떟궸룉궢궲귖볷{귒궫궋궶륉떟궳뺖궋궲뛱궔궶궔궯궫궼궦궬. 맜 돽뭠궕뭤궸뿇궭궫볷{궳궇귡궻궸뵯맯궢궫륉떟궬. 뫜릐궻뜎궸뵿릐쀏밒궶봽뢶궴궋궎맜빒돸귩롦귟볺귢궲뾠궋룺룛궫궭귩댱댝븏궸쁀귢궲뛱궯궲궔귞귖뵿뤙궠궑궢궶궋볷{궳궇귡궻궸궇귟벦귡럷궬. 궩귟귗봽뢶궼볷{궕귘귞궔궢궫붩뛱궻뷮랹궻덇뜌궸덇뜌귖궶귞궶궋.

갻믧뜎롥`궴맜뛱갽궳궼봲먰뚣볷{궻봽뢶맰뛱귩볷{맠{궴긽긐긞긏궻먖봀궳뙅_돷궯궲궋귡. 갾긽긐깛궸귝귡볷{룛맜떗뒴럷뙊궼먫쀌뮳뚣궔귞븆뵯궥귡갿궴딯뢲궢궲궋귡귖궻궻, 렳띧궸볷{궳볷{룛묪궸묈듰떗뒴궼먪봏댥뤵궻뾋땦궶쀰럍귩렃궰. 볷{룛궻맜밒먺X궼긽긐깛]깛긐궸귝궯궲럑귏궯궫궻궳궼궶궘, 뭶븿긜긞긏긚궴뜫뾹, 깉긫귽귩뒁궢귔렄궔귞귖궎볷{뭞궫궭궸귝궯궲렃뫏밒궸쐯뛱궠귢궲뿀궫`뱷궬. 궞귢귞 3 묇맟빒돸궕볷{궳뤑궑궫궞궴궼귦궦궔 20맊딬궸볺궯궲궔귞궬궯궫. 궞궻귝궎궶럷렳궼귦궦궔궫궋궲궋, 볫궰궻뛼궳뢫룷궢궲귏귡궳긽긐깛궸귝궯궲떗뾴궠귢궫봽뢶궳귝궯궲뙸묆볷{봽뢶궻뱘뤿궕돓궢뙓귕귞귢궫궴궋궎렜궳븹궋덨궥궞궴궼^렳귩덨빦궥귡귏궺궬.

궫궴궑볷{맠{궕봽뢶귩뜎랉궸궢궶궔궯궫궢궲귖뾋땦궶 봽뢶럍궴 뚺룴럍, 궩궢궲븉벫믦뫝릶궕덇룒궸궥귡뚺둎맟빒돸귩렃궯궫볷{궳궇귡궻궸봲먰뚣궸귖봽뢶궕돓궢귩뿕궔궩궎궴궢궫궞궴궼듩댾궋궶궋.

돺궕됽궢궋궴궋궎궻궔. 뫜릐궻뜎궳귖궶궋, 렔뜎맠{궸귝궯궲뛱귦귢궫궢, 렔뵯밒궶랷돿궸, 뫮돽귖롷궚궫궢, 뢯뫿뗈귖됀궬궯궫. 돺귝귟랾薯궫귡볷{궻`뱷빒돸귩롷궚똯궋궬궻궳궼궶궋궻궔. 궞귢궼릐듩롫귟귩궢궲봽뢶귩떗뾴궢궫]똓댱댝븏궳귖궶궘궲볷{궶귟궻벐갲궶륟떾궳궇궯궫.

궩궻뚣볷{궻륉떟궼궵궎궔. 귖궭귣귪뾋땦궶봽뢶궻`뱷귩똯룦, 뵯밯궠궧궲궋귡. 볷{룛묪궕땽뜎밒궸딳궖궲궇귞귚귡`뫴궻봽뢶귩뭆뱰궢궲궋귡궕, 궩귢궬궚궳궼쀍븉뫉궬궔귞둖뜎룛궴딼몧뙅뜢귩궢궲봽뢶멺륟궸봽궯궲궢귏궎궞궴궼뽠_궳맊둉룘룋궳봽뢶듡뚹궸뢯궲궋귡. 2렅묈먰뚣궵궎궢궲귖뚿궸뢯궢궫귟딠귏궦궋궇귞귚귡뿉랦궶 맜빒돸궕볷{궳궳궖궲궩궻뭷덇븫궼멣맊둉궸뾃뢯궠귢궲궋귡. 볷{궻맜빒돸궼뼟맟봏궻룛묪궴쀍멺륟궕롥벑궢궲궋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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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추천
203 문화가 없는 일본 jjangggae 2009-05-21 222 0
202 일본은 병적으로 한국을,,, KimAkiHito 2009-05-21 315 0
201 중국황실도 안 노예 일본 jjangggae 2009-05-21 209 0
200 바퀴벌레같은 왜인들이 우물에 바이....... Wildboy 2009-05-21 56 0
199 日本놈이 한국 상하수도에 바이러스....... Wildboy 2009-05-20 151 0
198 아시아 해방 倭人性器 6cm 大爆笑 ^O^ 2009-05-20 177 0
197 열등 노예 일본 jjangggae 2009-05-20 172 0
196 정당방위 전쟁을 했던 일본..... 倭人性器 6cm 大爆笑 ^O^ 2009-05-20 245 0
195 백제어는 일본어다. arerere 2009-05-19 142 0
194 rock69 는 경영자(CEO)의 일족 ^ ^ rainyseason 2009-05-19 158 0
193 기무치 먹지말고 김치먹어 nakazima 2009-05-19 81 0
192 일본인이 말하는 아시아인 해방 WildBoy6 2009-05-18 174 0
191 아시아를 해방 시키기 위해 싸우는 일....... WildBoy6 2009-05-18 140 0
190 범인은 him7777 lotteria_ 2009-05-18 164 0
189 한국사에서 성매매 합법이 된건 일제 ....... WildBoy6 2009-05-18 186 0
188 일본사는 곧 매춘사라 할 수 있다 WildBoy6 2009-05-18 143 0
187 백제의 노예 일본 wwwwww jjangggae 2009-05-18 63 0
186 백제의 노예 일본 봐라 jjangggae 2009-05-18 153 0
185 분하다! 백제가 일본에게 지배되어서!....... valkyrie20cm 2009-05-17 130 0
184 야마토국을 정복했던 근초고왕 jjangggae 2009-05-17 79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