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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발굴] 敗戰 직후 日本 정부가 주도한 性접대 기관 RAA의 정체
 
RAA 설립 자금을 지원한 池田勇人은 훗날 일본 총리로 출세
 
[편집자 注] 1945년 8월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직후 日本 정부는, 내무성 관료의 立案(입안)과 대장성의 예산지원으로 娼家(창가)의 포주들을 임원으로 하는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조직케 하고, RAA가 사기 수법으로 가난에 찌든 순진한 일본 여성들을 대거 모집해 점령군 병사들에게 賣春(매춘)행위를 하도록 몰아갔다.
日本은 왜 연합군총사령부(GHQ)에서 요구하지 않은 賣春조직을 자발적으로 만들었으며, 왜 GHQ에 의해 지탄을 받고 해산당하는 국가적 수모를 겪게 된 것일까? 月刊朝鮮은 태평양전쟁 당시 日本帝國 병사를 위해 강제동원된 「從軍慰安婦(종군위안부)」 문제가 국제 이슈로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그 진상, 특히 日本 정부와 매춘업자의 유착 메커니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 반무라 료(半村良)씨가 1994년에 저술한 논픽션 「昭和惡女傳(소화악녀전)」과 관계자료들을 발췌해 소개한다.

번역 : 月刊朝鮮 편집부


皇居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
 五代伊兵衛는 창녀집(女郞屋: 조로야)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遊廓(유곽)의 장소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렵다. 옛날 유곽의 장소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로 지장이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의 유곽 영업지가 西일본 쪽이었다고만 밝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침략해 五代伊兵衛는 그 방면으로 위문을 위해 나갔던 대중예술인들과 친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친교 범위는 대중예술인뿐만 아니었다. 군인 및 정치인·관료 등에서부터 소위 특무기관원들까지 폭넓은 교제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패전時 東京(도쿄)에 올라와 있었다. 1945년 8월28일 정오 무렵, 그는 皇居(황거: 천황이 거주하는 城) 앞 광장에서 동료인 창녀집 주인들을 상대로 일대 난투를 벌여 인근 경시청 본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는 결코 진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름으로는 正義漢(정의한)이었던 듯하다. 전쟁이 멀게 느껴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皇居 앞에서 일어난 大격투의 원인은 「RAA」의 설립을 五代伊兵衛 등이 한사코 저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RAA는 「특수위안시설협회」의 약자다.
 
  1945년 8월28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8월15일)으로,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해 오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콘(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맥아더가 아츠키(厚木) 군용비행장에 도착했을 때의 사진이 유명한데, 8월28일은 그 先遣隊(선견대)가 아츠키 비행장에 도착한 날이다.
 
  RAA는 일본에 진주한 점령군의 병사들을 위해 性的(성적) 위안시설을 만들고, 그것을 관리·운영하기 위한 협회이다. 그것은 일본內 창녀업의 업주(포주)를 불러 모은 조직이었다.
 
  대의명분은 「야마토(大和)의 꽃다운 여자(蕪子)들의 貞操(정조)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RAA의 발족을 준비했던 것은 내무성 관료. 자금은 대장성으로부터 염출했는데, 그 일과 관련했던 主計局長(주계국장)은 훗날 총리(1960.7~ 1964.11)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
 
  무조건 항복은 했지만,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고, 가능한 한 혼혈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日本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자처했던 만큼 창녀집의 업주들은 皇居 앞 광장에 당당하게 모여서 설립식을 거행했다.
 
  五代伊兵衛는 RAA에 반대해서 式典(식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난폭하게 저지하려 했다. 동료 포주들은 설립식의 진행을 방해하는 五代伊兵衛 등에게 맞서지 않아 식전은 해산 직전 상황이 되었는데, 갑자기 사쿠라다몽(櫻田門) 쪽으로부터 달려온 경찰관들에 의해 진압되어 식전은 예정대로 속행했다. 五代 등은 그날부터 다음해 3월 초순까지 경시청의 유치장에 감금된 듯하다. 하지만, 석방된 五代는 戰後(전후)의 혼란기에 裏面(이면) 사회의 名士로서 대단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발족에 반대한 RAA가 7개월 후인 1946년 3월, 연합군총사령부(GHQ)에 의해 부정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연합군총사령부, RAA 시설 출입금지


 

패전 후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일본인들.

  연합군은 점령했던 일본에 대해 그와 같은 性的 위안시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진주군 병사들에게 RAA 시설 출입을 금지했다. 점령한 나라의 국민에 대한 그들의 인도주의적 자세를 일본 정부는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RAA가 유효했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 강간사건이 빈발했던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는 여학생들의 등교를 자숙시키고, 교사가 自警(자경)의 패트롤(순찰)을 하는 시기도 있었다.
 
  RAA는 GHQ가 위안소 출입을 금지한 것으로서 명백해진 국가적 人身供與(인신공여)였다.
 
  東京 긴자(銀座) 7丁目에 본부를 설치해 점령군 병사 상대의 매춘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댄서 및 여자 軍務員(군무원)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을 모집했다. 옷·食料(식료)·숙사 제공은 전쟁 중 공습으로 집을 잃고 기아에 허덕이던 당시의 처녀들로서는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신발도 신지 못했던 처녀들이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그 결과 닷새 만에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이 모여들었다.
 
 
  東京都의 특별배급


 
  東京都도 RAA에 협력했다. 모슬린(얇고 부드럽게 짠 모직물) 등을 RAA에 제공했던 것이다. RAA는 그것으로 나가지반(長�需絆 : 화려한 색깔과 무늬가 있는 여성 속옷)과 코시마키(腰卷: 예복) 등을 만들어 매춘시킨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처녀들에게 배급했다. 그밖에 세면도구와 크리넥스까지 特配(특배)했다.
 
  그러고 나서 점령군 병사들이 찾아오면 젊은 여성들을 특수위안시설에 집어넣어 병사의 상대가 되게 했다.
 
  그 때문에 첫날부터 자살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정부와 관청이, 요구하지도 않은 매춘조직을 만든 非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부 창녀업 포주들까지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분노했다. 皇居 앞 광장에서의 RAA 설립식을 깨버리려고 했던 五代伊兵衛는 그의 정당함이 알려져 석방된 후 그 바닥에서 존경받게 되었다.
 
  속임을 당한 여성들의 성향이지만, 그녀들은 거의 모두 견실한 처녀들이었다. 이미 매춘을 하고 있던 여성들은 RAA의 사기에 넘어가 銀座 7丁目 행렬에 붙지 않고서도 그 나름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불이라도 하고 있는 처지라면 제맘대로 고용주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조신하지만 고지식한 젊은 여성들이 특수위안시설에서 진주군 병사들의 상대가 되어 타락한 생활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性的 위안시설에 진주군 병사의 출입이 금지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연히 食料 배급이 없어지고, 거주 장소를 갑자기 잃은 그녀들은 한꺼번에 거리로 몰려 나와 떠돌게 되었다. 상대는 역시 진주군 병사들이었다.
 
  「팡팡걸」로 불린 여성들의 당돌한 출현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물론 RAA의 경험이 없는 여성들과 더불어 신바시(新橋), 긴자(銀座), 유라쿠초(有樂町) 등지에 출현했다. 진주군 병사를 상대했던 매춘부의 뿌리는 그러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五代伊兵衛는 그녀들의 수호신적 존재였다.
 

패전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일본 여성들.

 
  日本 여성의 방파제 「팡팡걸」


 

1945년 8월28일 아츠키 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元帥.

  終戰 직후 東京에서 속칭 「팡팡걸」 또는 「팡助(스케)」라고 불린 외국병사 전문 매춘부들이 나 보란 듯 거리를 활보한 배경에는 다음의 사정이 있었다. 그녀들은 나라에 고용되어 일본 여성들의 「防波堤(방파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TV·주간지가 없었던 시대에, 이런 사정을 아는 일본인은 적었지만, 그녀들에게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말은 표면화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매춘으로 밀어넣은 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어서 관계없는 체하고, 일반 사람들도 사회의 恥部(치부)로부터 눈을 돌려 잊으려 했다.
 
  『별의 흐름으로 신세를 점치고, 어디가 보금자리, 오늘 밤의 숙소…』
 
  지금 일본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유행했던 사실조차 잊혀졌다. 여기서 당시의 분노를 再生(재생)해 보여도 별 소용 없는 일이다.
 
 
  인종차별 관습


 
  진주군 병사들 중, 특히 미군 병사들은 본국의 인종차별 관습을 그대로 일본에 지니고 들어왔다.
 
  RAA가 그런 물정도 모르고 흑인 병사를 상대시킨 여성은, 그 후 백인 병사가 자신을 기피한다는 것을 느꼈다. 곧 백인은 흑인을 상대했던 여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백인은 백인 전문, 흑인은 흑인 전문이라고 하는 피부색 구별이 일본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확정되고, 그 차별감은 곧 그녀들 사이에 정착되어 갔다.
 
  進駐 직후, 東京都內를 지프를 몰고 돌아다니는 미국 병사의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점령정책이 안정됨에 따라 백인 병사 쪽이 많아지고, 드디어 도심부에서는 흑인 병사의 모습이 드물게 되었다.
 
  그것은 都內의 패트롤이 당초 위험시되었기 때문이다. 例(예)의 「콘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 아츠키 비행장에 내렸던 맥아더는 勝者(승자)답게 의연하게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이 상당히 두려움을 느낀 듯하다.
 
  맥아더가 처음 숙소로 정한 곳은 수도 東京이 아닌 요코하마의 세관빌딩이었지만, 아츠키에서 그곳으로 갈 때 예정된 길을 일부러 피해,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를 선두로 삼아 다른 루트로 요코하마까지 진입했다.
 
  실제 일본 측에 저항의 의지는 없었지만, 맥아더는 그때까지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간토(關東)평야에는, 당시 수십만 병력이 잔존해 있다고 추정되었다. 일본군이 그토록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1945년 9월8일, 美 태평양육군 제8군 제11군단 소속의 제1騎兵師團 8000명이 東京 진주 제1진으로 도착했다. 이 사단은 미군 중에서 군기가 가장 엄정한 부대로 알려져, 그 때문에 맥아더에 의해 선발되었다고 한다.
 
  군복부터 헬멧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품으로 차려입은 미군 병사들은, 騎兵(기병)사단임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말도 보유하지 않고, 차량행렬을 이뤄 현재의 요요기(代代木) 공원 주위로 진입해 캠프를 쳤다. 그곳은 帝國육군의 연병장이었다. 인근 하루주쿠(原宿)에는 지금도 天皇驛(천황역)이 남아 있다. 이제 「貞操방파제」가 된 여성들의 얘기로 되돌아간다.
 

1946년 경시청의 매춘부 단속으로 검거된 매춘부들이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온리」의 出現
 
  RAA 해체 후, 그녀들은 풀려나왔지만, 美 병사들이 지니고 들어온 인종차별 탓에 幸運(행운)과 不運(불운)의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흑인 병사는 이동이 심하며, 東京에 오래 있는 경우가 적었고, 장교들은 대부분 백인으로서 모두 젠틀맨을 자임하고 있었다.
 
  장교 클래스를 상대했던 여성들 중에는 진짜 연애감정을 가지게 된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이른바 「온리(Only)」의 출현이다. 「온리 유(Only You)」의 온리이다. 돈 많은 미국병으로부터 주거와 생활비를 받아 호화스럽게 사는 여성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五代伊兵衛는 결코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西일본 출신으로서 패전 직후 잠시 東京에 거주했기 때문에 뒷골목의 모럴로 말하면 「나와바리(세력범위)」가 다르다. 표면에 나서면 간토(關東: 東京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사람의 나와바리를 침범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그는 RAA로부터 기인된 「팡팡」들의 운명에 깊이 동정하고, 책임을 느낀 것 같다.
 
  美 병사 상대의 매춘행위를 단속하려 했던 官憲(관헌)에게 그는 철저히 저항해 그녀들을 지켜 주었다. 당시 어느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五代伊兵衛에 대해, 이 일과 관련해 불평을 했다.
 
  『팡팡들의 편을 드는 기분은 알겠지만, 그녀들의 존재는 결국 일본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그녀들에게 일찌감치 美 병사 상대의 매춘을 중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五代伊兵衛는 대번에 그 저널리스트를 주먹질해 쓰러뜨렸다. 구타당한 저널리스트가 그 얘기를 훗날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이 外地(외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나는 娼家의 주인이기 때문에 잘 알지만, 너희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덮어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五代伊兵衛는 저널리스트를 한 방 먹여 쓰러트린 후 강한 간사이(關西)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문제가 된 종군위안부의 일을 五代伊兵衛는 그때 이미 지적했던 것이다.
 
  전쟁에 얽힌 매춘문제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본인 모두에게 잊혀져 이제는 「팡팡」의 존재도 없었던 것처럼 거리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五代伊兵衛는 東京을 떠났고,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쓰시마 우츠코(津島暎子)라는 여성만은 최후까지 五代伊兵衛의 幻影에 끌려 살았다. 다음은 쓰시마 우츠코의 이야기이다.
 
  우츠코가 언제부터 밤의 긴자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昭和 20년대(1945~1954년) 긴자 3丁目에 있었던 「클럽 골덴게이드」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으로 「세뇨리타」라는 클럽이 있었고, 우츠코는 그곳의 마담으로서 밤의 긴자에서는 얼굴이 알려진 존재가 되었다.
 
  점포의 영업 형태는 상당히 폐쇄적이어서 출입문 위에는 노란색 페인트로 「OFF LIMITS」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오프 리미츠」는 출입금지의 표시이지만, 美 병사들은 태연히 그런 표시가 있는 점포에 출입하고 있었다.
 
 
  「댄서 및 여자사무원 모집」한다고 광고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RAA에 의해 모집된 여성 1500명 정도가 도쿄 남쪽 타마가와(多摩川) 바로 앞 國道(국도)1호 도로변에 소재한 수개 宿舍(숙사)에 분산 수용된 것이었다. 모집광고에 「被服, 食料, 宿舍 제공」이라는 좋은 조건이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댄서 및 여자사무원 모집」.
 
  달려들지 않은 여성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숙사에서의 좋은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六鄕의 橋」를 건너 진주군의 트럭이 줄지어 오자, 여성들은 느긋하게 그 모습을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군용트럭들이 숙사 앞에 정차하더니 곧, 군인들이 올라왔다.
 
  東京都가 特配(특배)해 주었던 메린스로 만든 나가지반과 코시마키는 制服(제복)이었다. 친절하게도 크리넥스까지 배급해 주었다.
 
 
  첫날 자살한 여성도
 
  첫날 밤, 바로 옆을 통과하는 도쿄-요코하마 급행 노선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성들도 몇 사람 있었다. 도망을 가면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었다. 처음에 私物(사물)은 모두 협회에 맡기고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속옷 차림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곳에 매춘의 프로는 한 사람도 없었다. 프로라면 그런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들에게는 포주가 있었고, 포주들이야말로 RAA의 임원들이었던 것이다. 순진한 여성들을 속이는 일쯤은 아기의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웠을 터이다.
 
  여러 부대가 왔다. 피부색이 하얀 군인, 검은 군인, 육군, 해군, 공군.
 
  아미는 육군, 네이비는 해군이라는 것 등을 곧 알게 되었다.
 
  『아임 카밍』
 
  『오케이, 피니시. 유 아 더 넘버원 솔저』
 
  『플리즈 모어 머니』
 
  『댕큐, 시 어게인』
 
  소위 「팡글리시」였다.
 
  『끝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오래 안아줘. 그러면 곧 다시 와서 너를 指名(지명)해 줄 거야』
 
  당시 「코치」라고 불린 남자가 되풀이해서 그렇게 말했다.
 
  운이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그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음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곧 백인 병사가 흑인 병사와 잠을 잔 여성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극적이지만, 美 본국에서의 그러한 관습이 위안부 동료들 사이에 감염되고 말았다.
 
  하나의 지붕 밑에 생활하면서 그룹이 2개로 나뉘었다. 여성들은 처음엔 피부색 구별 없이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하고 있었는데도….
 
  백인 병사를 상대해 온 동료 중에 제일 운이 좋았던 여자가 쓰시마 우츠코(津島暎子)였다. 첫날 밤 우츠코가 상대했던 것은 장교였다. 그 장교는 돌아갈 때 코치를 불러 軍票(군표)를 한 다발 건네고 우츠코를 買占(매점)했다.
 
  우츠코는 결국 그 장교의 「온리」가 되었다. RAA 시설이 출입금지되기 직전, 우츠코는 그 장교를 따라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
 
  「댄서 및 군무원 모집. 18세 이상 25세까지. 피복 지급, 숙사 완비, 급식 있음」
 
  1945년 여름, 焦土(초토) 속의 거리에 붙은 그 포스터를 보고 꿈결같이 긴자 7丁目의 RAA 본부로 달려가지 않은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 후 RAA의 설립 취지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엔 「帝國의 美風, 순결을 死守하기 위해 官民이 일치해 이것에 대처한다」는 美辭麗句(미사여구)를 거듭 구사하고 있었지만, 「이력서 필요 없고 즉시 오라」고 쓴 포스터에는 취업의 내용이 곧 상륙할 진주군 상대의 위안부라는 것은 단 한 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응모 행렬을 이룬 여성들은 주로 근로노동을 위해 군수공장에 다녔던 여성들로서, 응모자격이 있었던 것은 疏開(소개)의 연령을 넘긴 도쿄 在留者(재류자)였다.
 
  RAA의 주요 운영자는 소위 홍등가의 주인들이며, 협회 설립의 發案(발안)은 내무관료였다고 한다. 그 자금염출을 담당한 것은 당시 대장성 主計局長(주계국장)으로서 훗날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GHQ가 性的 위안시설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 과잉 서비스에 입을 다물었던 GHQ는 7개월 후 그 위안시설에 장병 출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엔(圓) 신권 교체시기와 겹쳤다. 1946년 3월의 일이었다.
 
  GHQ의 출입금지령으로 시설이 폐기되어, 일부는 민간에 불하되었지만, 우츠코의 동료들은 몸을 더럽히면서 번 지폐가 통용되지 않았다. 그녀들은 낯익은 외국 병사의 모습을 쫓아서 도심인 히비야(日比谷), 유라쿠초(有樂町), 긴자(銀座), 신바시(新橋) 주변에 「팡팡걸」로 출몰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그것을 보고 제2波, 제3波로 街娼(가창)이 증가했지만, 그 근본은 우츠코의 동료였던 것이다.
 
 
  폭격받은 관공서 건물 안에서도 賣春


 
  街娼이라고 했지만, 도심부에는 그럴 듯한 賣春宿(매춘) 장소가 없었던 시대다. 泰明小學校 강당 및 불탄 빌딩 안, 심지어 중앙우체국의 카운터 주변에서 잠자는 여성조차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급박해져 도청 및 중앙관청의 직원조차 결근하면서 식량을 구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식량조달을 위한 휴가가 인정되어, 그것이 훗날 有給(유급)휴가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혼란했던 신바시(新橋)의 암시장에서는 기관총까지 동원된 총격전이 발생했고, 술 취한 외국 병사가 數寄屋橋 위에서 街娼을 소도보리(外堀: 바깥 해자) 속으로 집어던지는 사건 등이 일어났다. 우츠코와 그녀의 동료들은 이렇게 험한 시대에 거리에서 살았던 것이다.●
 
 



 

『1억 국민의 純血이 지켜졌다면 값싼 것이다』(池田勇人)
 
  설립자금은 정부·업자가 절반씩 출자


 

RAA 설치 당시 대장성 主計국장으로 나중에 총리를 지낸 이케다 하야토.


  RAA는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on」로서 직역하면 「레크리에이션 및 오락 협회」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매춘업자는 일본어 표기로 「特殊慰安施設協會(특수위안시설협회)」라 하여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일본의 프리 백과사전 「위키페디아(Wikipedia)」는 RAA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만들어진 進駐軍(진주군·정확하게는 占領軍)을 위한 위안소』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RAA에 관한 「위키페디아」의 기재 내용이다.
 
  <내무성이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 위안시설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각 현에 발령하고, 그것을 단서로 해서 점령군 대책의 일환으로서 설립되었다(편집자 注-RAA의 설립은 내무성이 주도했지만, 설립자금 1억 엔은 일본 정부와 매춘업자가 각각 5000만 엔씩 출자했다).
 
  發想(발상)으로서는 전시 중의 위안부시설과 같은 것이지만, 위안부처럼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性의 防波堤(방파제)」라고 하는 슬로건의 公募(공모)에 응해 온 일반여성들을 끌어 모았다.
 
  당초는 접객업의 종사자를 고용할 예정이라 했지만, 생각처럼 모이자 않자 「新일본여성을 구함, 宿舍·衣服·食料 모두 지급」이라 적힌 광고판을 긴자(銀座) 등에 설치하고, 또 신문 광고로 일반여성을 모집했다.
 
  상세한 내용은 광고에 기재되지 않아, 그 광고를 보고 찾아온 여성의 다수는 접객업의 경험이 없었던 것으로서, 태반은 일의 내용을 알고 나서 되돌아갔다.
 
  그러나 다른 생활방편이 없는 전쟁미망인 및 자녀가 많았던 시대 배경도 있어, 최종적으로는 단기간에 1300여 명의 여성이 협회에 등록했다. 속임을 당한 채 항거할 수 없어 취업하게 된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1946년, 直前 미국 대통령 부인 엘리나 루스벨트의 반대와 성병 만연을 이유로 폐지되었지만,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고, 다수는 접객업 등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안시설에 있었던 매춘 여성들은 「아메팡」(아메리카 相對 팡팡)으로 불렸다>
 
  이러한 시설은 실제로 점령군에 의한 강간·폭행 사건을 크게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서 일본 全國 20여 지방도시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예컨대 홋카이도(北海道)의 경우 오타루(小樽)경찰서 관내에서는 RAA 설치를 위해 카시자시키(貸座敷: 公認 유곽)에 있던 前 娼妓(창기)를 중심으로 150~160명의 접대부를 모집했고, 삿포로(札幌)도 마찬가지로 前 娼妓 3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우리들의 증언-北海道 終戰史」에서).
 
  삿포로市교육위원회編 「新札幌市史」(제4권)에 따르면 삿포로경찰서가 白石유곽을 改裝(개장)해 「카시자시키(貸座敷: 公認遊廓)」라 하는 명칭을 폐기하고 「카페리」, 「카바레」, 「바」, 「댄스홀」, 「레스토랑」으로 개칭시켜 환락가를 만들었다.
 
  당시 대장성 主計국장으로서 RAA 설립자금을 지원한 이케다(池田勇人) 총리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1억 국민의 純血(순혈)이 지켜졌다면 값싼 것이다』고 말한 바 있다. 경찰서도 내무성의 「良家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시민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라는 명분하에 설립된 RAA에 대해 이의를 달 수 없었다.
 

중·일 전쟁 중 上海에 설치된 위안소. RAA는 전쟁 중 종군위안부제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公娼제도의 폐지된 후에도 1949년까지 존속한 RAA
 
  RAA의 역할이 전부 부인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吉見周子의 「賣春社會史」(雄山閣)에 의하면 RAA가 존재하고 있던 기간 중 일본 여성에 대한 강간·폭행 건수가 하루 평균 약 40건, 1946년 RAA가 폐쇄된 이후는 하루 평균 330건을 웃돌았다고 한다.
 
  1946년 1월20일, GHQ는 公娼제도는 데모크라시의 理想에 反하는 것이라 하여, 「公娼제도의 폐지에 관한 각서」를 공표했다. 일본 정부는 이 발표에 앞서 동년 1월12일 「公娼제도 폐지에 관한 내무성 通達」을 발해, 동년 1월15일 公的 조직으로서의 RAA 폐지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通達의 내용은 『카시자시키(公認 유곽) 및 娼妓는 폐업시키고, 그 폐업자에 대해서는 私娼(사창)으로서 家業 계속을 인정하고, 公娼제도는 폐지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카시자시키 指定 지역을 그대로 私娼·默認(묵인)지역으로 인정함으로써 RAA의 활동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46년 3월10일, GHQ는 점령군內에 성병이 만연하고 있다는 이유로 장병들에게 RAA 시설에의 출입금지령을 발하고, 일본 정부도 1946년 3월26일 전국 경찰서장 앞으로 「進駐軍의 요릿집, 접대소, 위안소 지역 출입금지에 관한 내무성 보안부장 通牒(통첩)」을 발령했다. 그러나 RAA가 최종적으로 해산한 것은 1949년 4월이었다.
 
  1946년 11월14일, 일본 정부는 公娼제도 폐지 후의 시책으로서 私娼의 단속·발생의 방지보호대책을 차관회의에서 결정, 특정지역에 한해 풍속영업을 인정하는 시책을 취했다. 이것이 그후 「赤線(적선: 옛 公娼지역)」과 「靑線(청선: 私娼지역)」의 탄생을 불러와 현재의 풍속영업지역 규제의 선례가 되었다. ●


RAAは米軍に献上した敗戦国日本の美女たちなのか ??

[현대사 발굴] 敗戰 직후 日本 정부가 주도한 性접대 기관 RAA의 정체
 
RAA 설립 자금을 지원한 池田勇人은 훗날 일본 총리로 출세
 
[편집자 注] 1945년 8월15일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 직후 日本 정부는, 내무성 관료의 立案(입안)과 대장성의 예산지원으로 娼家(창가)의 포주들을 임원으로 하는 「특수위안시설협회(RAA)」를 조직케 하고, RAA가 사기 수법으로 가난에 찌든 순진한 일본 여성들을 대거 모집해 점령군 병사들에게 賣春(매춘)행위를 하도록 몰아갔다.
日本은 왜 연합군총사령부(GHQ)에서 요구하지 않은 賣春조직을 자발적으로 만들었으며, 왜 GHQ에 의해 지탄을 받고 해산당하는 국가적 수모를 겪게 된 것일까? 月刊朝鮮은 태평양전쟁 당시 日本帝國 병사를 위해 강제동원된 「從軍慰安婦(종군위안부)」 문제가 국제 이슈로 확대되고 있는 가운데 그 진상, 특히 日本 정부와 매춘업자의 유착 메커니즘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본인 반무라 료(半村良)씨가 1994년에 저술한 논픽션 「昭和惡女傳(소화악녀전)」과 관계자료들을 발췌해 소개한다.

번역 : 月刊朝鮮 편집부

皇居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
 五代伊兵衛는 창녀집(女郞屋: 조로야)의 주인이었다. 지금은 遊廓(유곽)의 장소를 공개적으로 밝히기 어렵다. 옛날 유곽의 장소를 말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로 지장이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의 유곽 영업지가 西일본 쪽이었다고만 밝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중국대륙을 침략해 五代伊兵衛는 그 방면으로 위문을 위해 나갔던 대중예술인들과 친교가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친교 범위는 대중예술인뿐만 아니었다. 군인 및 정치인·관료 등에서부터 소위 특무기관원들까지 폭넓은 교제를 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패전時 東京(도쿄)에 올라와 있었다. 1945년 8월28일 정오 무렵, 그는 皇居(황거: 천황이 거주하는 城) 앞 광장에서 동료인 창녀집 주인들을 상대로 일대 난투를 벌여 인근 경시청 본부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는 결코 진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름으로는 正義漢(정의한)이었던 듯하다. 전쟁이 멀게 느껴지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皇居 앞에서 일어난 大격투의 원인은 「RAA」의 설립을 五代伊兵衛 등이 한사코 저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RAA는 「특수위안시설협회」의 약자다.
 
  1945년 8월28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8월15일)으로, 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해 오기 직전의 시점이었다. 「콘(옥수수) 파이프」를 입에 문 맥아더가 아츠키(厚木) 군용비행장에 도착했을 때의 사진이 유명한데, 8월28일은 그 先遣隊(선견대)가 아츠키 비행장에 도착한 날이다.
 
  RAA는 일본에 진주한 점령군의 병사들을 위해 性的(성적) 위안시설을 만들고, 그것을 관리·운영하기 위한 협회이다. 그것은 일본內 창녀업의 업주(포주)를 불러 모은 조직이었다.
 
  대의명분은 「야마토(大和)의 꽃다운 여자(蕪子)들의 貞操(정조)를 지킨다」는 것이었다. RAA의 발족을 준비했던 것은 내무성 관료. 자금은 대장성으로부터 염출했는데, 그 일과 관련했던 主計局長(주계국장)은 훗날 총리(1960.7~ 1964.11)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
 
  무조건 항복은 했지만,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고, 가능한 한 혼혈아를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日本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자처했던 만큼 창녀집의 업주들은 皇居 앞 광장에 당당하게 모여서 설립식을 거행했다.
 
  五代伊兵衛는 RAA에 반대해서 式典(식전)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난폭하게 저지하려 했다. 동료 포주들은 설립식의 진행을 방해하는 五代伊兵衛 등에게 맞서지 않아 식전은 해산 직전 상황이 되었는데, 갑자기 사쿠라다몽(櫻田門) 쪽으로부터 달려온 경찰관들에 의해 진압되어 식전은 예정대로 속행했다. 五代 등은 그날부터 다음해 3월 초순까지 경시청의 유치장에 감금된 듯하다. 하지만, 석방된 五代는 戰後(전후)의 혼란기에 裏面(이면) 사회의 名士로서 대단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발족에 반대한 RAA가 7개월 후인 1946년 3월, 연합군총사령부(GHQ)에 의해 부정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연합군총사령부, RAA 시설 출입금지
 
패전 후 배급을 타기 위해 줄을 선 일본인들.

  연합군은 점령했던 일본에 대해 그와 같은 性的 위안시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뿐인가, 진주군 병사들에게 RAA 시설 출입을 금지했다. 점령한 나라의 국민에 대한 그들의 인도주의적 자세를 일본 정부는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RAA가 유효했던 측면이 없지 않았다. 강간사건이 빈발했던 가나가와(神奈川)현에서는 여학생들의 등교를 자숙시키고, 교사가 自警(자경)의 패트롤(순찰)을 하는 시기도 있었다.
 
  RAA는 GHQ가 위안소 출입을 금지한 것으로서 명백해진 국가적 人身供與(인신공여)였다.
 
  東京 긴자(銀座) 7丁目에 본부를 설치해 점령군 병사 상대의 매춘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댄서 및 여자 軍務員(군무원) 모집」이라는 명목으로 젊은 여성들을 모집했다. 옷·食料(식료)·숙사 제공은 전쟁 중 공습으로 집을 잃고 기아에 허덕이던 당시의 처녀들로서는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좋은 조건이었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신발도 신지 못했던 처녀들이 그곳으로 달려갔다는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그 결과 닷새 만에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이 모여들었다.
 
 
  東京都의 특별배급
 
  東京都도 RAA에 협력했다. 모슬린(얇고 부드럽게 짠 모직물) 등을 RAA에 제공했던 것이다. RAA는 그것으로 나가지반(長�需絆 : 화려한 색깔과 무늬가 있는 여성 속옷)과 코시마키(腰卷: 예복) 등을 만들어 매춘시킨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처녀들에게 배급했다. 그밖에 세면도구와 크리넥스까지 特配(특배)했다.
 
  그러고 나서 점령군 병사들이 찾아오면 젊은 여성들을 특수위안시설에 집어넣어 병사의 상대가 되게 했다.
 
  그 때문에 첫날부터 자살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정부와 관청이, 요구하지도 않은 매춘조직을 만든 非도덕적 행위에 대해서는, 일부 창녀업 포주들까지 한 사람의 일본인으로서 분노했다. 皇居 앞 광장에서의 RAA 설립식을 깨버리려고 했던 五代伊兵衛는 그의 정당함이 알려져 석방된 후 그 바닥에서 존경받게 되었다.
 
  속임을 당한 여성들의 성향이지만, 그녀들은 거의 모두 견실한 처녀들이었다. 이미 매춘을 하고 있던 여성들은 RAA의 사기에 넘어가 銀座 7丁目 행렬에 붙지 않고서도 그 나름으로 먹고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가불이라도 하고 있는 처지라면 제맘대로 고용주를 바꿀 수도 없었다.
 
  그 때문에 조신하지만 고지식한 젊은 여성들이 특수위안시설에서 진주군 병사들의 상대가 되어 타락한 생활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性的 위안시설에 진주군 병사의 출입이 금지된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당연히 食料 배급이 없어지고, 거주 장소를 갑자기 잃은 그녀들은 한꺼번에 거리로 몰려 나와 떠돌게 되었다. 상대는 역시 진주군 병사들이었다.
 
  「팡팡걸」로 불린 여성들의 당돌한 출현은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물론 RAA의 경험이 없는 여성들과 더불어 신바시(新橋), 긴자(銀座), 유라쿠초(有樂町) 등지에 출현했다. 진주군 병사를 상대했던 매춘부의 뿌리는 그러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五代伊兵衛는 그녀들의 수호신적 존재였다.
 
패전 후 직장을 구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일본 여성들.

 
  日本 여성의 방파제 「팡팡걸」
 
1945년 8월28일 아츠키 비행장에 내린 맥아더 元帥.

  終戰 직후 東京에서 속칭 「팡팡걸」 또는 「팡助(스케)」라고 불린 외국병사 전문 매춘부들이 나 보란 듯 거리를 활보한 배경에는 다음의 사정이 있었다. 그녀들은 나라에 고용되어 일본 여성들의 「防波堤(방파제)」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TV·주간지가 없었던 시대에, 이런 사정을 아는 일본인은 적었지만, 그녀들에게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말은 표면화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을 매춘으로 밀어넣은 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입을 다물어서 관계없는 체하고, 일반 사람들도 사회의 恥部(치부)로부터 눈을 돌려 잊으려 했다.
 
  『별의 흐름으로 신세를 점치고, 어디가 보금자리, 오늘 밤의 숙소…』
 
  지금 일본에서는 이러한 노래가 유행했던 사실조차 잊혀졌다. 여기서 당시의 분노를 再生(재생)해 보여도 별 소용 없는 일이다.
 
 
  인종차별 관습
 
  진주군 병사들 중, 특히 미군 병사들은 본국의 인종차별 관습을 그대로 일본에 지니고 들어왔다.
 
  RAA가 그런 물정도 모르고 흑인 병사를 상대시킨 여성은, 그 후 백인 병사가 자신을 기피한다는 것을 느꼈다. 곧 백인은 흑인을 상대했던 여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이 알려졌다. 백인은 백인 전문, 흑인은 흑인 전문이라고 하는 피부색 구별이 일본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확정되고, 그 차별감은 곧 그녀들 사이에 정착되어 갔다.
 
  進駐 직후, 東京都內를 지프를 몰고 돌아다니는 미국 병사의 대부분이 흑인이었다. 점령정책이 안정됨에 따라 백인 병사 쪽이 많아지고, 드디어 도심부에서는 흑인 병사의 모습이 드물게 되었다.
 
  그것은 都內의 패트롤이 당초 위험시되었기 때문이다. 例(예)의 「콘 파이프」를 입에 물고서 아츠키 비행장에 내렸던 맥아더는 勝者(승자)답게 의연하게 보이긴 했지만, 실제로는 그 자신이 상당히 두려움을 느낀 듯하다.
 
  맥아더가 처음 숙소로 정한 곳은 수도 東京이 아닌 요코하마의 세관빌딩이었지만, 아츠키에서 그곳으로 갈 때 예정된 길을 일부러 피해, 기관총을 거치한 지프를 선두로 삼아 다른 루트로 요코하마까지 진입했다.
 
  실제 일본 측에 저항의 의지는 없었지만, 맥아더는 그때까지 그것을 확인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간토(關東)평야에는, 당시 수십만 병력이 잔존해 있다고 추정되었다. 일본군이 그토록 빠르게 해체되고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1945년 9월8일, 美 태평양육군 제8군 제11군단 소속의 제1騎兵師團 8000명이 東京 진주 제1진으로 도착했다. 이 사단은 미군 중에서 군기가 가장 엄정한 부대로 알려져, 그 때문에 맥아더에 의해 선발되었다고 한다.
 
  군복부터 헬멧에 이르기까지 모두 신품으로 차려입은 미군 병사들은, 騎兵(기병)사단임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말도 보유하지 않고, 차량행렬을 이뤄 현재의 요요기(代代木) 공원 주위로 진입해 캠프를 쳤다. 그곳은 帝國육군의 연병장이었다. 인근 하루주쿠(原宿)에는 지금도 天皇驛(천황역)이 남아 있다. 이제 「貞操방파제」가 된 여성들의 얘기로 되돌아간다.
 
1946년 경시청의 매춘부 단속으로 검거된 매춘부들이 경찰서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

 
  「온리」의 出現
 
  RAA 해체 후, 그녀들은 풀려나왔지만, 美 병사들이 지니고 들어온 인종차별 탓에 幸運(행운)과 不運(불운)의 차이가 생기고 말았다. 흑인 병사는 이동이 심하며, 東京에 오래 있는 경우가 적었고, 장교들은 대부분 백인으로서 모두 젠틀맨을 자임하고 있었다.
 
  장교 클래스를 상대했던 여성들 중에는 진짜 연애감정을 가지게 된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이른바 「온리(Only)」의 출현이다. 「온리 유(Only You)」의 온리이다. 돈 많은 미국병으로부터 주거와 생활비를 받아 호화스럽게 사는 여성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五代伊兵衛는 결코 표면에 나서지 않았다. 그는 西일본 출신으로서 패전 직후 잠시 東京에 거주했기 때문에 뒷골목의 모럴로 말하면 「나와바리(세력범위)」가 다르다. 표면에 나서면 간토(關東: 東京을 중심으로 하는 지방) 사람의 나와바리를 침범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그는 RAA로부터 기인된 「팡팡」들의 운명에 깊이 동정하고, 책임을 느낀 것 같다.
 
  美 병사 상대의 매춘행위를 단속하려 했던 官憲(관헌)에게 그는 철저히 저항해 그녀들을 지켜 주었다. 당시 어느 유명한 저널리스트가 五代伊兵衛에 대해, 이 일과 관련해 불평을 했다.
 
  『팡팡들의 편을 드는 기분은 알겠지만, 그녀들의 존재는 결국 일본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그녀들에게 일찌감치 美 병사 상대의 매춘을 중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五代伊兵衛는 대번에 그 저널리스트를 주먹질해 쓰러뜨렸다. 구타당한 저널리스트가 그 얘기를 훗날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이 外地(외지)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아느냐. 나는 娼家의 주인이기 때문에 잘 알지만, 너희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덮어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
 
  五代伊兵衛는 저널리스트를 한 방 먹여 쓰러트린 후 강한 간사이(關西)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문제가 된 종군위안부의 일을 五代伊兵衛는 그때 이미 지적했던 것이다.
 
  전쟁에 얽힌 매춘문제는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일본인 모두에게 잊혀져 이제는 「팡팡」의 존재도 없었던 것처럼 거리에서 지워지고 말았다.
 
  五代伊兵衛는 東京을 떠났고, 그가 어떻게 됐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쓰시마 우츠코(津島暎子)라는 여성만은 최후까지 五代伊兵衛의 幻影에 끌려 살았다. 다음은 쓰시마 우츠코의 이야기이다.
 
  우츠코가 언제부터 밤의 긴자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昭和 20년대(1945~1954년) 긴자 3丁目에 있었던 「클럽 골덴게이드」에 찰싹 달라붙은 모습으로 「세뇨리타」라는 클럽이 있었고, 우츠코는 그곳의 마담으로서 밤의 긴자에서는 얼굴이 알려진 존재가 되었다.
 
  점포의 영업 형태는 상당히 폐쇄적이어서 출입문 위에는 노란색 페인트로 「OFF LIMITS」라 쓰여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오프 리미츠」는 출입금지의 표시이지만, 美 병사들은 태연히 그런 표시가 있는 점포에 출입하고 있었다.
 
 
  「댄서 및 여자사무원 모집」한다고 광고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RAA에 의해 모집된 여성 1500명 정도가 도쿄 남쪽 타마가와(多摩川) 바로 앞 國道(국도)1호 도로변에 소재한 수개 宿舍(숙사)에 분산 수용된 것이었다. 모집광고에 「被服, 食料, 宿舍 제공」이라는 좋은 조건이 추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댄서 및 여자사무원 모집」.
 
  달려들지 않은 여성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숙사에서의 좋은 꿈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六鄕의 橋」를 건너 진주군의 트럭이 줄지어 오자, 여성들은 느긋하게 그 모습을 창문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군용트럭들이 숙사 앞에 정차하더니 곧, 군인들이 올라왔다.
 
  東京都가 特配(특배)해 주었던 메린스로 만든 나가지반과 코시마키는 制服(제복)이었다. 친절하게도 크리넥스까지 배급해 주었다.
 
 
  첫날 자살한 여성도
 
  첫날 밤, 바로 옆을 통과하는 도쿄-요코하마 급행 노선에 뛰어들어 자살한 여성들도 몇 사람 있었다. 도망을 가면 먹을 것도 없고 잘 곳도 없었다. 처음에 私物(사물)은 모두 협회에 맡기고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속옷 차림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곳에 매춘의 프로는 한 사람도 없었다. 프로라면 그런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들에게는 포주가 있었고, 포주들이야말로 RAA의 임원들이었던 것이다. 순진한 여성들을 속이는 일쯤은 아기의 손목을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웠을 터이다.
 
  여러 부대가 왔다. 피부색이 하얀 군인, 검은 군인, 육군, 해군, 공군.
 
  아미는 육군, 네이비는 해군이라는 것 등을 곧 알게 되었다.
 
  『아임 카밍』
 
  『오케이, 피니시. 유 아 더 넘버원 솔저』
 
  『플리즈 모어 머니』
 
  『댕큐, 시 어게인』
 
  소위 「팡글리시」였다.
 
  『끝나더라도 될 수 있으면 오래 안아줘. 그러면 곧 다시 와서 너를 指名(지명)해 줄 거야』
 
  당시 「코치」라고 불린 남자가 되풀이해서 그렇게 말했다.
 
  운이 좋다는 것과 나쁘다는 것은 그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음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곧 백인 병사가 흑인 병사와 잠을 잔 여성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비극적이지만, 美 본국에서의 그러한 관습이 위안부 동료들 사이에 감염되고 말았다.
 
  하나의 지붕 밑에 생활하면서 그룹이 2개로 나뉘었다. 여성들은 처음엔 피부색 구별 없이 미군 병사들을 상대로 하고 있었는데도….
 
  백인 병사를 상대해 온 동료 중에 제일 운이 좋았던 여자가 쓰시마 우츠코(津島暎子)였다. 첫날 밤 우츠코가 상대했던 것은 장교였다. 그 장교는 돌아갈 때 코치를 불러 軍票(군표)를 한 다발 건네고 우츠코를 買占(매점)했다.
 
  우츠코는 결국 그 장교의 「온리」가 되었다. RAA 시설이 출입금지되기 직전, 우츠코는 그 장교를 따라 어딘가로 자취를 감췄다.
 
  「댄서 및 군무원 모집. 18세 이상 25세까지. 피복 지급, 숙사 완비, 급식 있음」
 
  1945년 여름, 焦土(초토) 속의 거리에 붙은 그 포스터를 보고 꿈결같이 긴자 7丁目의 RAA 본부로 달려가지 않은 여성은 거의 없었다. 그 후 RAA의 설립 취지서가 발견되었고, 거기엔 「帝國의 美風, 순결을 死守하기 위해 官民이 일치해 이것에 대처한다」는 美辭麗句(미사여구)를 거듭 구사하고 있었지만, 「이력서 필요 없고 즉시 오라」고 쓴 포스터에는 취업의 내용이 곧 상륙할 진주군 상대의 위안부라는 것은 단 한 자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응모 행렬을 이룬 여성들은 주로 근로노동을 위해 군수공장에 다녔던 여성들로서, 응모자격이 있었던 것은 疏開(소개)의 연령을 넘긴 도쿄 在留者(재류자)였다.
 
  RAA의 주요 운영자는 소위 홍등가의 주인들이며, 협회 설립의 發案(발안)은 내무관료였다고 한다. 그 자금염출을 담당한 것은 당시 대장성 主計局長(주계국장)으로서 훗날 총리가 된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GHQ가 性的 위안시설을 요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 과잉 서비스에 입을 다물었던 GHQ는 7개월 후 그 위안시설에 장병 출입을 금지시켰던 것이다. 그것이 엔(圓) 신권 교체시기와 겹쳤다. 1946년 3월의 일이었다.
 
  GHQ의 출입금지령으로 시설이 폐기되어, 일부는 민간에 불하되었지만, 우츠코의 동료들은 몸을 더럽히면서 번 지폐가 통용되지 않았다. 그녀들은 낯익은 외국 병사의 모습을 쫓아서 도심인 히비야(日比谷), 유라쿠초(有樂町), 긴자(銀座), 신바시(新橋) 주변에 「팡팡걸」로 출몰하는 처지가 되었다.
 
  물론 그것을 보고 제2波, 제3波로 街娼(가창)이 증가했지만, 그 근본은 우츠코의 동료였던 것이다.
 
 
  폭격받은 관공서 건물 안에서도 賣春
 
  街娼이라고 했지만, 도심부에는 그럴 듯한 賣春宿(매춘) 장소가 없었던 시대다. 泰明小學校 강당 및 불탄 빌딩 안, 심지어 중앙우체국의 카운터 주변에서 잠자는 여성조차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식량난은 날이 갈수록 급박해져 도청 및 중앙관청의 직원조차 결근하면서 식량을 구하러 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식량조달을 위한 휴가가 인정되어, 그것이 훗날 有給(유급)휴가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혼란했던 신바시(新橋)의 암시장에서는 기관총까지 동원된 총격전이 발생했고, 술 취한 외국 병사가 數寄屋橋 위에서 街娼을 소도보리(外堀: 바깥 해자) 속으로 집어던지는 사건 등이 일어났다. 우츠코와 그녀의 동료들은 이렇게 험한 시대에 거리에서 살았던 것이다.●
 
 

  『1억 국민의 純血이 지켜졌다면 값싼 것이다』(池田勇人)
 
  설립자금은 정부·업자가 절반씩 출자
 
RAA 설치 당시 대장성 主計국장으로 나중에 총리를 지낸 이케다 하야토.

  RAA는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on」로서 직역하면 「레크리에이션 및 오락 협회」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매춘업자는 일본어 표기로 「特殊慰安施設協會(특수위안시설협회)」라 하여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
 
  일본의 프리 백과사전 「위키페디아(Wikipedia)」는 RAA를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만들어진 進駐軍(진주군·정확하게는 占領軍)을 위한 위안소』라고 밝히고 있다. 다음은 RAA에 관한 「위키페디아」의 기재 내용이다.
 
  <내무성이 「외국군 주둔지에 있어 위안시설에 관한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을 각 현에 발령하고, 그것을 단서로 해서 점령군 대책의 일환으로서 설립되었다(편집자 注-RAA의 설립은 내무성이 주도했지만, 설립자금 1억 엔은 일본 정부와 매춘업자가 각각 5000만 엔씩 출자했다).
 
  發想(발상)으로서는 전시 중의 위안부시설과 같은 것이지만, 위안부처럼 중개업자를 통하지 않고 「性의 防波堤(방파제)」라고 하는 슬로건의 公募(공모)에 응해 온 일반여성들을 끌어 모았다.
 
  당초는 접객업의 종사자를 고용할 예정이라 했지만, 생각처럼 모이자 않자 「新일본여성을 구함, 宿舍·衣服·食料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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