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광개토대왕비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 내용은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내용
이죠
이 내용을 1972년 이진희라는 사학자가 그 글이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 다는 점을 지적하고,같은 해에 사에키 유
우키라는 일본 참모본부가 일제때 자신이 비문을 수정하
는데에 참여 했다고 발언하게 되고 한국의 본격적인 사
실 확인 작업이 시작 됩니다
정인보라는 사람은 그 내용이 비문 전체와 일치 하지 않
는다고 주장하고
이진희는 3번의 비석 수정작업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비석에 써진 한자중 4자가 다른 한자와 균형을 갖추지 못
했다고 하여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
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
로 백제,일본인,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죠.
일제의 또 하나 역사조작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沙月 李 盛 永(增補)
● 임나일본부설의 경위와 내용
일본인들의 임나(任那) 연구는 에도시대(서기1603-1867년)의 국학자(國學者)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때 국학자들은 전대에 선호했던 주자학(朱子學)을 외면하고 기기(記紀: 古事記, 日本書紀의 약칭)나 기타 일본 고전을 비판 없이 추종하면서 신국(神國) 일본의 자랑으로 삼아 ‘일본의 조선지배’를 주장하게 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는 (管政友), (津田左右吉), 이마니시(今西龍), (鮎貝房之進) 등이 ‘일본의 임나지배(任那支配)’를 전제해 놓고 임나 관련 문헌과 지명고증에 치중했다. 이를 이어받은 (末松保和)는 1949년에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체계를 완성하여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내용(요약)
근거 |
연대 |
내용 |
三國志魏志倭人傳序頭 (삼국지위지왜인전서두) |
3세기중엽 |
일본은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왜왕은 그 중계지(中繼地)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
日本書紀神功王后 (일본서기신공왕후)49년조 7국4읍평정기사 |
서기369년 |
일본은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 일부를 복속(服屬)시켜 임나지배체제를 구축하고 백제왕의 조공을 약속 받아냈다 |
廣開土王陵碑文 (광개토왕릉비문) 기사 |
서기400년 |
일본은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려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
宋書倭國傳(송서일본전), 倭五王爵號(왜5왕작위) |
5세기 |
일본은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고,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 하여금 인정시키고자 하였다 |
南齊書(남제서)伽羅國傳(가라국전)및 日本書紀繼體 天皇代(일본서기계체천황대) |
5세기후반 6세기초반 |
5세기후반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6세기 초반 백제에게 전남북 땅을 할양해 주고, 신라에게 남가라를 약탈당하면서 임나는 쇠퇴해졌다 |
日本書紀欽明天皇代 (일본서기흠명천황대) |
서기540년대 이후 |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562년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토멸함으로써 임나는 멸망하였다 |
|
서기646년 |
일본은 임나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신라에게 임나조(任那調: 조공)를 요구하였다 |
위 표의 내용을 축약(縮約)하면 일본은 서기 369년에 신라를 치고 낙동강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를 평정한 후 서기 56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남제서(南齊書), 송서(宋書) 등을 그 근거 사료로 들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의 일본 교과서 반영 예
또 일본 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 몇 가지만 예시하면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정권(大和政權)은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대화정권은 가라지방(加羅地方)에 세력을 떨쳐 그 세력 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任那)라 불렀다.
5세기초부터 거의 1세기 동안 5대의 왜왕(倭王: 倭의 五王은 중국의 남조(南朝)에 조공했고 조선 남부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표시하는 높은 칭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4세기 말엽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어진 변한을 발판으로 하여 신라에 침입, 고구려와도 싸운 것으로 생각된다.
대화정권은 그 후에도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변한의 땅을 임나라고 칭하면서 세력하에 넣었다
대화정권이 거의 국토(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반도의 제 민족 사이에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서 통일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들은 동경서적(東京書籍), 실교출판사(實敎出版社), 자유서방(自由書房), 삼성당(三省堂) 등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일본사 교과서에는 하나같이 똑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사료(根據史料)에 대한 비판
▲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냈다는 보도(寶刀)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글 중에서 일본 사학계는「供侯王(공후왕)」과「故爲倭王旨造(고위왜왕지조)」의 해석에서 ‘일본의 백제 지배’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있다.
즉 ‘供侯王(공후왕: 侯王에게 供했다)’을‘백제왕이 상국인 왜왕에게 바쳤다’로 해석하고, ‘爲倭王旨(위왜왕지)’를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라고 해석하여 ‘백제왕이 보도(寶刀)를 왜왕에게 봉헌(奉獻)한 것은 백제가 왜에게 신속(臣屬: 신하의 나라처럼 복속) 해 있던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供侯王(공후왕)’은 ‘속국의 왕에게 보낸다’ 는 뜻이지 결코 ‘상국의 왕에게 바친다’는 뜻이 될 수 없다. 또 ‘爲倭王旨(위왜왕지)’는 ‘왜왕 지를 위해’로 해석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석이지 결코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 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명문(七支刀銘文)은 백제가 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왜(倭)가 백제의 하위(下位)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다.
2004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한일간에 역사의 쟁점이 되어 온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가 10년 만에 공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길이 75Cm의 양날 도검으로 좌우에 세 개씩의 가지가 돋아 있는 신통력을 부르는 주술의 신검(神劒)이다.
이 칼은 일본 나라(奈良) 이시가미(石上)신궁의 신체(神體)로 이를 모신 성역에 금줄을 쳐놓고 접근만 하려 해도 신발을 벗게 하는 등 일본에서 이를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소중히 여겨온 귀물이다.
이 칠지도의 도신(刀身)에는 금박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워낙 오래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있고 또 글자를 조작한 흔적도 완연하여 백제와 일본 간의 역사 해석에 문제를 제기해온 백제 신검이다
탈락문자가 있는 고대 금석문이나 명문(銘文)은 여러 갈래 해석이 가능하게 마련이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한두 글자만 변조하면 고대사를 유리하게 변조할 수가 있다.
일본의 한국침략 아래 그 명분으로 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반부를 지배했었다는 역사변조에 눈이 어두웠을 때 이 칠지도의 명문이 부각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이 칼을 백제왕과 세자가 왜왕(倭王)에게 헌상한 것으로 해석, 일본의 모든 책에서 이를 따르게 해왔다.
한데 양심적인 일본 학자는 헌상했으면 그 말투가 위로 바친다는 공손한 상행(上行)문서형식이어야 할 텐데 칠지도 명문은 “이를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할지어다”—-하는 아래로 내리는 하행(下行)문서양식에 주의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로 보아 백제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아래로 내리니 받들어 모시라는 이 하행 어투가 창피했던지 일본 어용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명문에 나오는 “성음(聖音)”을 “성진(聖晉)”으로 해석, 중국의 동진(東晉)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내렸다고 궁색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일본인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우월사상이 올 정초에 일본 전통옷인 하오리 입은 일본 총리로 하여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시킨 것이다.
▲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릉비문)
일본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제시하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의 문제의 부분은「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波百殘□□□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이다.
이 부분을 일본 사학계는 ‘백제와 신라는 본시 속민이었음으로 조공을 해 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서기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무찌르고 그로써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억지 해석을 해 온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제기 된다.
① 광개토왕 비문에 나온 왜(倭)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체가 되어 있는 일본 의 대화정권(大和政權)이 아니고 가야민족 일부가 서일본과 구주 일원에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설사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에 쳐들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늘 있어온 왜의 노략질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일본의 대화정권이 조선경영을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② 위 구절의 해석에서 ‘而倭以辛卯年來渡’(이왜이신묘년래도해) 의 앞과 뒤에 구두점을 찍어 떼어내고 보면 그 다음 문장의 주체(주어)는 이 비를 만든 고구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波百殘□□□羅以爲臣民」의 해석은 ‘(고구려는) 백제를 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간의 관계이지 결코 왜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비문을 쓰면서 고구려와 관계가 없는 백제, 신라, 왜 간의 하찮은 사건을 비문에까지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③ 비문의 문장 중 마멸된 부분은 비의 발견자 일본군 (酒勾景信)중위에 의하여 개삭(改削)된 것으로 의심되어 왔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일본 사학계 일부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일본 사람들의 잠재한 의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문장을 다시 새겨보면 ‘백제와 신라는 전에는 속민으로서 (고구려에)조공을 받쳐왔었다.(그러나 그 후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신묘년(서기391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조공 해)왔다. (고구려는) 백제를 치고, 신라를 □□(설득, 협박)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된다.
이상의 제 의문점으로 볼 때 광개토왕릉비문의 내용이 일본의 대화정권에 의하여 전개되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말 해 주는 것이다.
▲ 南齊書(남제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중국의 남제서(南齊書) 東南夷傳(동남이전) 倭國(일본) 편에
「使持節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武」(사지절도독왜신라임나가라진한육국제군사안동대장군왜왕무)라는 문장이 있는데 이를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등 6국의 제 군사를 통괄하는 지절도독에 안동대장군 왜장 무를 임명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이 문장에서 왜왕은 조선의 신라군사와 가야군사까지 지휘하였다 하여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이다.
이는 후술하는 ‘임나본부설의 역설’에서 자연히 이해될 것이다. 여기 기술된 신라, 가야는 조선의 신라와 가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가야, 신라, 백제 사람들이 대마도, 구주 등 서일본 일대에 이주하여 소국가 형태의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그들을 칭하여 ‘가라사람 집단 또는 소가라국’, ‘신라사람 집단 또는 소신라국’등을 말하는 일본 구주지역의 작은 여러 부족국가의 이름이지 결코 조선에 있는 가야, 신라, 백제를 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 宋書(송서)
송서(宋書: 중국 송나라 역사서)에 나오는 왜왕 무(武)의 상표(上表: 서기478년)에 ‘(왜가) 부조(父祖) 때부터—- 바다 북쪽(海北) 95국(國)을 도평(渡平)했다’는 한 구절에서 ‘왜가 남선(南鮮: 조선의 남부지역 즉 가라와 백제, 신라의 일부지역) 경영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북(海北) 95국 도평(渡平)’은 왜가 늘 상 해온 조선의 남쪽 해안 곳곳에 출몰하여 노략질 하면서 괴롭힌 것을 과장해서 표현한 것일 뿐, 그들이 말하는 임나일본부에 의한 2백년간에 걸친 조직적인‘남선경영’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역설(逆說)
19세기말부터 일본 사학계가 제기한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 1945년까지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간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곧 천황(天皇)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만세일계(萬世一系: 단절없이 한 핏줄로 이어져 온 계통)로 믿었던 천황가의 혈통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일부 양심적인 일본사학가들에 의하여 식민사관(植民史觀)에 의한 임나사(任那史)의 조작, 왜곡에 대한 역설(逆說)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예로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기마민족설(騎馬民族설)’, ‘일본(倭國)은 가야족이 세운 구주왕조(九州王朝)’, ‘건국신화와 언어학에서 밝혀지는 천황가의 실체’ 등의 지론들이 대두되고 있는데 이들 주장은 일본이 가야, 신라, 백제를 200년간이나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거꾸로 뒤집는 즉 일본 열도 내에 가야, 백제, 신라 민족들이 건너 가 분국(分國)을 세웠다거나, 일본 천황가도 가야민족이라는 등의 주장들인 것 이다.
▲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전후 일본은 경제대국의 경제력에 힘입어 ‘원점(原點: 뿌리) 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한일고대사연구 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서양문물에 휩쓸리면서도 ‘조국회귀(祖國回歸)’의 성향을 보인 하나의 흐름이었는데 그 연구의 귀착점은 곧 천황(天皇)이었다. 즉 천황의 뿌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의한 천황상(天皇像)이 무너지고, ‘천황이 조선에서 건너왔다’,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일본과 조선은 한 조상이다)’ 등 야마대국(邪馬台國: 大和政權)에 관한 논문만 해도 5백 여 편이 넘었으며, 또 북한의 김형석(金亨錫)은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分國說)을 내놓았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부분 ‘왜(倭)의 삼국(三國) 지배(支配)’가 아니라 ‘삼국(三國)의 왜(倭) 지배(支配)’가 일치점이다. 임나일본부설과는 정반대 되는 역설(逆說)인 것이다.
대표적 연구인 (江上波夫)교수의「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오호(五胡: 중국 漢, 晉 때 북방의 다섯 이민족 즉 匈奴 흉노, 鮮卑선비, 羯갈, 氐저, 羌강)가 중국의 화북지방에 침입하고, 기마민족인 고구려가 한반도에 강역을 확대했을 때 고구려와 같은 북방 기마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하여 남단의 구야(狗邪: 가야) 지방의 왜(倭)를 정복한 후 일본으로 잠입하였다.
이러한 물결에 따라 4세기 초 천황을 중심으로 한 기마민족은 구주(九州)에 상륙하여 4세기말 내지 5세기 초에는 기내(畿內)에 강대한 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하면서 임나 김해(金海)에서 일본으로 건너 간 것이 실제 인물 숭신천황(崇神天皇)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일본 천황가가 가야족(伽倻族)의 후예라는 주장이다 |
또 북한의 김형석의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설’은 일본의 통일정권 성립시기를 7세기초로 보고, 그 이전에 일본열도에는 왜오왕(倭五王)을 책봉했던 신라(新羅), 백제(百濟), 임나(任那), 가라(加羅), 진한(秦韓), 모한(모한) 등 육국(六國)은 본국(本國: 한반도에 있는)의 동족들이 일본열도 내에 세운 소국(小國)의 명칭이라는 주장이다. 이 또한 ‘왜의 삼 국 지배’가 아니라 ‘삼국의 왜지배’를 주장한 것이다.
▲ 가야족(伽倻族)이 세운 구주왕조(九州王朝)
지금의 광개토대왕비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신묘년 왜가 바다를 건너 와서 백제와 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이 내용은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는 내용
이죠
이 내용을 1972년 이진희라는 사학자가 그 글이 문맥과
일치하지 않는 다는 점을 지적하고,같은 해에 사에키 유
우키라는 일본 참모본부가 일제때 자신이 비문을 수정하
는데에 참여 했다고 발언하게 되고 한국의 본격적인 사
실 확인 작업이 시작 됩니다
정인보라는 사람은 그 내용이 비문 전체와 일치 하지 않
는다고 주장하고
이진희는 3번의 비석 수정작업이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비석에 써진 한자중 4자가 다른 한자와 균형을 갖추지 못
했다고 하여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
쳐 왔는데, 그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
로 백제,왜구,신라를 정복하고 신민으로 삼았다』
이 내용이 맞다고 주장하죠.
일제의 또 하나 역사조작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沙月 李 盛 永(增補)
● 임나일본부설의 경위와 내용
일본인들의 임나(任那) 연구는 에도시대(서기1603-1867년)의 국학자(國學者)들에서부터 비롯되었는데 그 때 국학자들은 전대에 선호했던 주자학(朱子學)을 외면하고 기기(記紀: 古事記, 日本書紀의 약칭)나 기타 일본 고전을 비판 없이 추종하면서 신국(神國) 일본의 자랑으로 삼아 ‘일본의 조선지배’를 주장하게 되었다.
메이지(明治)시대는 (管政友), (津田左右吉), 이마니시(今西龍), (鮎貝房之進) 등이 ‘일본의 임나지배(任那支配)’를 전제해 놓고 임나 관련 문헌과 지명고증에 치중했다. 이를 이어받은 (末松保和)는 1949년에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체계를 완성하여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를 내 놓았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 표와 같다.
임나흥망사(任那興亡史) 내용(요약)
근거 |
연대 |
내용 |
三國志魏志倭人傳序頭 (삼국지위지왜인전서두) |
3세기중엽 |
일본은 이미 변진구야국(弁辰狗耶國)을 점유하고 있으면서 왜왕은 그 중계지(中繼地)를 통해 삼한에 통제력을 미치고 있었다 |
日本書紀神功王后 (일본서기신공왕후)49년조 7국4읍평정기사 |
서기369년 |
일본은 경상남북도 대부분을 평정하고, 전라남북도와 충청도 일부를 복속(服屬)시켜 임나지배체제를 구축하고 백제왕의 조공을 약속 받아냈다 |
廣開土王陵碑文 (광개토왕릉비문) 기사 |
서기400년 |
일본은 고구려군과 전쟁을 벌려 임나를 공고히 하고, 백제에 대한 복속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
宋書倭國傳(송서왜국전), 倭五王爵號(왜5왕작위) |
5세기 |
일본은 외교적인 수단으로 왜·신라·임나·가라에 대한 영유권을 중국 남조로부터 인정받고, 백제의 지배까지 송나라로 하여금 인정시키고자 하였다 |
南齊書(남제서)伽羅國傳(가라국전)및 日本書紀繼體 天皇代(일본서기계체천황대) |
5세기후반 6세기초반 |
5세기후반 임나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어 6세기 초반 백제에게 전남북 땅을 할양해 주고, 신라에게 남가라를 약탈당하면서 임나는 쇠퇴해졌다 |
日本書紀欽明天皇代 (일본서기흠명천황대) |
서기540년대 이후 |
백제와 임나일본부는 임나의 부흥을 꾀하였으나 562년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토멸함으로써 임나는 멸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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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646년 |
일본은 임나의 고지(故地)에 대한 연고권을 가져서 신라에게 임나조(任那調: 조공)를 요구하였다 |
위 표의 내용을 축약(縮約)하면 일본은 서기 369년에 신라를 치고 낙동강유역의 가야 여러 나라를 평정한 후 서기 562년까지 거의 200년 동안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 백제까지도 지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남제서(南齊書), 송서(宋書) 등을 그 근거 사료로 들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의 일본 교과서 반영 예
또 일본 사학계의 임나일본부설이 일본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 몇 가지만 예시하면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에 의하면 대화정권(大和政權)은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고구려와 싸웠다고 볼 수 있다. 이 무렵부터 대화정권은 가라지방(加羅地方)에 세력을 떨쳐 그 세력 하에 들어갔다고 간주한 지역을 임나(任那)라 불렀다.
5세기초부터 거의 1세기 동안 5대의 왜왕(倭王: 倭의 五王은 중국의 남조(南朝)에 조공했고 조선 남부에 대한 군사지휘권을 표시하는 높은 칭호를 얻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를 배경으로 하여 조선의 여러 나라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유리하게 꾀한 것이다.
이러한 조선반도에의 진출에 의해 대화정권은 대륙의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큰 힘을 지니게 되었다.
4세기 말엽부터 5세기에 걸쳐 대화정권은 백제와 연합하여 통일이 늦어진 변한을 발판으로 하여 신라에 침입, 고구려와도 싸운 것으로 생각된다.
대화정권은 그 후에도 백제와는 우호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변한의 땅을 임나라고 칭하면서 세력하에 넣었다
대화정권이 거의 국토(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조선반도에도 세력을 뻗쳤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조선반도의 제 민족 사이에 민족적 자각이 높아져서 통일국가 형성의 기운이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들은 동경서적(東京書籍), 실교출판사(實敎出版社), 자유서방(自由書房), 삼성당(三省堂) 등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일본사 교과서에는 하나같이 똑 같은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 임나일본부설의 근거사료(根據史料)에 대한 비판
▲ 칠지도(七支刀) 명문(銘文)
백제왕이 왜왕에게 보냈다는 보도(寶刀)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글 중에서 일본 사학계는「供侯王(공후왕)」과「故爲倭王旨造(고위왜왕지조)」의 해석에서 ‘일본의 백제 지배’를 주장하는 근거로 삼고있다.
즉 ‘供侯王(공후왕: 侯王에게 供했다)’을‘백제왕이 상국인 왜왕에게 바쳤다’로 해석하고, ‘爲倭王旨(위왜왕지)’를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라고 해석하여 ‘백제왕이 보도(寶刀)를 왜왕에게 봉헌(奉獻)한 것은 백제가 왜에게 신속(臣屬: 신하의 나라처럼 복속) 해 있던 증거’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供侯王(공후왕)’은 ‘속국의 왕에게 보낸다’ 는 뜻이지 결코 ‘상국의 왕에게 바친다’는 뜻이 될 수 없다. 또 ‘爲倭王旨(위왜왕지)’는 ‘왜왕 지를 위해’로 해석하는 것이 정상적인 해석이지 결코 ‘왜왕 지의 명을 받들어’ 라고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칠지도명문(七支刀銘文)은 백제가 왜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왜(倭)가 백제의 하위(下位)에 있었음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다.
2004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한일간에 역사의 쟁점이 되어 온 일본의 국보 칠지도(七支刀)가 10년 만에 공개된다는 보도가 있었다. 길이 75Cm의 양날 도검으로 좌우에 세 개씩의 가지가 돋아 있는 신통력을 부르는 주술의 신검(神劒)이다.
이 칼은 일본 나라(奈良) 이시가미(石上)신궁의 신체(神體)로 이를 모신 성역에 금줄을 쳐놓고 접근만 하려 해도 신발을 벗게 하는 등 일본에서 이를 본 사람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소중히 여겨온 귀물이다.
이 칠지도의 도신(刀身)에는 금박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워낙 오래되어 해독할 수 없는 글자가 있고 또 글자를 조작한 흔적도 완연하여 백제와 일본 간의 역사 해석에 문제를 제기해온 백제 신검이다
탈락문자가 있는 고대 금석문이나 명문(銘文)은 여러 갈래 해석이 가능하게 마련이다. 광개토대왕비처럼 한두 글자만 변조하면 고대사를 유리하게 변조할 수가 있다.
일본의 한국침략 아래 그 명분으로 삼국시대에 일본이 한반도의 남반부를 지배했었다는 역사변조에 눈이 어두웠을 때 이 칠지도의 명문이 부각된 것이다. 그리하여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이 칼을 백제왕과 세자가 왜왕(倭王)에게 헌상한 것으로 해석, 일본의 모든 책에서 이를 따르게 해왔다.
한데 양심적인 일본 학자는 헌상했으면 그 말투가 위로 바친다는 공손한 상행(上行)문서형식이어야 할 텐데 칠지도 명문은 "이를 받들어 후세에 길이 전할지어다"---하는 아래로 내리는 하행(下行)문서양식에 주의 한 것이다. 그리하여 연대로 보아 백제왕인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아래로 내리니 받들어 모시라는 이 하행 어투가 창피했던지 일본 어용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명문에 나오는 "성음(聖音)"을 "성진(聖晉)"으로 해석, 중국의 동진(東晉)이 백제왕을 통하여 왜왕에게 내렸다고 궁색한 해석을 하기도 했다.
예로부터 일본인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한반도에 대한 우월사상이 올 정초에 일본 전통옷인 하오리 입은 일본 총리로 하여금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시킨 것이다.
▲ 廣開土王陵碑文(광개토왕릉비문)
일본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제시하는 고구려 광개토왕릉비문의 문제의 부분은「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波百殘□□□羅以爲臣民」(백잔신라구시속민유래조공이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이위신민) 이다.
이 부분을 일본 사학계는 ‘백제와 신라는 본시 속민이었음으로 조공을 해 왔었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서기391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무찌르고 그로써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억지 해석을 해 온 것이다.
이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제기 된다.
① 광개토왕 비문에 나온 왜(倭)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체가 되어 있는 일본 의 대화정권(大和政權)이 아니고 가야민족 일부가 서일본과 구주 일원에 세운 나라이다.
따라서 설사 왜가 신묘년에 백제와 신라에 쳐들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늘 있어온 왜의 노략질에 불과할 뿐이며 그것이 일본의 대화정권이 조선경영을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 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② 위 구절의 해석에서 ‘而倭以辛卯年來渡’(이왜이신묘년래도해) 의 앞과 뒤에 구두점을 찍어 떼어내고 보면 그 다음 문장의 주체(주어)는 이 비를 만든 고구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구려)波百殘□□□羅以爲臣民」의 해석은 ‘(고구려는) 백제를 치고, 신라를 □□하여 신민으로 삼았다’가 되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 신라간의 관계이지 결코 왜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한정된 공간에 비문을 쓰면서 고구려와 관계가 없는 백제, 신라, 왜 간의 하찮은 사건을 비문에까지 기록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③ 비문의 문장 중 마멸된 부분은 비의 발견자 일본군 (酒勾景信)중위에 의하여 개삭(改削)된 것으로 의심되어 왔는데 이 것이 사실이라면 역사를 조작해서라도 일본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일본 사학계 일부의 생각이 아니라 모든 일본 사람들의 잠재한 의식이 아닌가 생각된다.
전체 문장을 다시 새겨보면 ‘백제와 신라는 전에는 속민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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