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뛰어난 천재 시인 이언진(1740-1766)님께서
일본에 역관으로 갔다가 풍속을 빈정댄 한시,,,,< 海覽篇>
其民裸而冠 발가숭이에 갓만 얹은 무리
外蟄中卽蝎 밖으로는 독충이고 안은 전갈이라.
遇事卽미沸 일 생기면 죽 끓는 것처럼 소란하다가
謀人卽鼠할 남 해칠 때는 쥐새~끼처럼 교활하구나
구利卽역射 구차히 이익을 탐할 때는 사람을 해치는 불여우,
小拂卽豕突 자그마한 일로 소란떠는 것이 돼지처럼 충돌한다
婦女事戱謔 여인들은 희롱을 일삼고,
童子設機括 아이놈은 덫을 놓는다
背先而淫鬼 조상잊고 귀신 믿기
嗜殺而녕佛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게는 아첨하고
書未離鳥乙 써 놓은 글씨는 제비 꼴이고,
詩未離격舌 시 읊으면 때까치 지저귀는 소리
이언진 [李彦瑱
조선 영조 때의 역관(譯官)(1740~1766). 자는 우상(虞裳). 호는 송목관(松穆館)·창기(滄起). 1759년에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1763년에 통신사 조엄(趙曮)의 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788년 이에나리(家齊)의 중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오사카를 순시하던 중 주자학자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을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는 조선 통신사 문제에 대해
”우리쪽에서 스스로를 낮춰가며 막대한 비용(1764년의 경우 87만 2900냥)을 들여 응대할 필요가 없다,
통신사 행렬은 순시(巡是)·청도(淸道)·영(令)의 깃발을 내걸고 오는데 순시는 국내를 돌아보는 것이며 청도는 길을 비키라는 것이며 영은 일본에 호령하는 것이니 이는 곧 국가의 치욕이다” 라고 설명했다.
일본에 다녀간 한 화가의 기록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지만, 그 기쁨 또한 금할 수 없다.”
17세기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간 한 화가의 기록이다.
조선통신사에는 학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예술인들도 포함됐는데 그중 화가의 인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괴로울’ 정도로 대단했다.
‘통신사 일행이 머무른 숙소에 찾아가 몰려든 인파 속에서 소품 4장을 입수했는데 하나는 인물이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는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 아사히 시게아키(朝日重章)의 기록은 당시 조선 화가의 그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최근 발표한 ‘17·18세기 한·일 회화 교류의 관계성-에도시대의 조선화 열기와 그 관련 양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17세기 미술 한류에 대해 설명했다.
홍 교수는 “관료나 귀족 등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민중까지도 조선화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라며 “기복 신앙의 영향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1764년 조선통신사였던 갑신사행의 정사 조엄이 “한국인의 묵적을 얻어서 간직해 두면 복리(福利)가 있다고 한다”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의 그림은 기복적인 효험성이 있다고 믿어졌다.
이들이 구한 그림은 대부분 호랑이, 까치, 매 등 이른바 영모도라 불리는 그림. 홍 교수는 역관들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일본에 없는 호랑이 등의 동물 그림이 이들에게는 신성시됐다”고 밝혔다.
조선후기 뛰어난 천재 시인 이언진(1740-1766)님께서
일본에 역관으로 갔다가 풍속을 빈정댄 한시,,,,< 海覽篇>
其民裸而冠 발가숭이에 갓만 얹은 무리
外蟄中卽蝎 밖으로는 독충이고 안은 전갈이라.
遇事卽미沸 일 생기면 죽 끓는 것처럼 소란하다가
謀人卽鼠할 남 해칠 때는 쥐새~끼처럼 교활하구나
구利卽역射 구차히 이익을 탐할 때는 사람을 해치는 불여우,
小拂卽豕突 자그마한 일로 소란떠는 것이 돼지처럼 충돌한다
婦女事戱謔 여인들은 희롱을 일삼고,
童子設機括 아이놈은 덫을 놓는다
背先而淫鬼 조상잊고 귀신 믿기
嗜殺而녕佛 살생을 즐기면서 부처에게는 아첨하고
書未離鳥乙 써 놓은 글씨는 제비 꼴이고,
詩未離격舌 시 읊으면 때까치 지저귀는 소리
이언진 [李彦瑱
조선 영조 때의 역관(譯官)(1740~1766). 자는 우상(虞裳). 호는 송목관(松穆館)·창기(滄起). 1759년에 역과(譯科)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다.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1763년에 통신사 조엄(趙曮)의 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788년 이에나리(家齊)의 중신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오사카를 순시하던 중 주자학자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을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다.
그는 조선 통신사 문제에 대해
"우리쪽에서 스스로를 낮춰가며 막대한 비용(1764년의 경우 87만 2900냥)을 들여 응대할 필요가 없다,
통신사 행렬은 순시(巡是)·청도(淸道)·영(令)의 깃발을 내걸고 오는데 순시는 국내를 돌아보는 것이며 청도는 길을 비키라는 것이며 영은 일본에 호령하는 것이니 이는 곧 국가의 치욕이다" 라고 설명했다.
일본에 다녀간 한 화가의 기록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지만, 그 기쁨 또한 금할 수 없다.”
17세기 조선통신사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간 한 화가의 기록이다.
조선통신사에는 학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예술인들도 포함됐는데 그중 화가의 인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어 ‘괴로울’ 정도로 대단했다.
‘통신사 일행이 머무른 숙소에 찾아가 몰려든 인파 속에서 소품 4장을 입수했는데 하나는 인물이 거꾸로 그려져 있었다”는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 아사히 시게아키(朝日重章)의 기록은 당시 조선 화가의 그림이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홍선표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는 최근 발표한 ‘17·18세기 한·일 회화 교류의 관계성-에도시대의 조선화 열기와 그 관련 양상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통해 17세기 미술 한류에 대해 설명했다.
홍 교수는 “관료나 귀족 등 지배계급뿐 아니라 일반 민중까지도 조선화에 대해 ‘뜨거운’ 반응을 보인 것은 좀처럼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례”라며 “기복 신앙의 영향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1764년 조선통신사였던 갑신사행의 정사 조엄이 “조선인의 묵적을 얻어서 간직해 두면 복리(福利)가 있다고 한다”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의 그림은 기복적인 효험성이 있다고 믿어졌다.
이들이 구한 그림은 대부분 호랑이, 까치, 매 등 이른바 영모도라 불리는 그림. 홍 교수는 역관들의 기록을 토대로 “당시 일본에 없는 호랑이 등의 동물 그림이 이들에게는 신성시됐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