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이 뭔지 아냐 ?
일본과 한국 몽골을 중국의 소수민족 취급하는건데
고구려의 존재를 부인한다
왜냐 ?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있어
동시에 이 56개 소수민족이 독립하겠다고 한다면
중국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짐작하지 ?
본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의 비문 조작이나 석회 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믿고 있으며 1900년대 초 일본군들만 진행한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꼭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는 중국에서도 금속학의 열기가 무척이나 높았던 시기이고 일부 지식인들은 고대 석비나 관련 유물의 탁본을 하는 것을 무슨 시대적 유행처럼 생각했던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광개토대왕 비를 포함한 고구려의 문화와 사적은 고구려 멸망(668년)이후 철저하게 파괴되고 외면되어왔다. 신라는 고구려의 대부분을 회복하지 못했고 실제로 평양지역을 수복한 것도 사실은 고려가 되어서야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면 당나라는 이를 충분히 관리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세웠으나 해당 지역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요동의 관문 지역인 옛 고구려의 신성(新城)으로 도호부를 옮겼다가 30년이 못되어서 결국은 폐지하고 만다. 이 시기 이후 당은 임시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의미에서 또 지속적으로 요동과 요서 지역의 일부를 관할권에 넣지 못한다.
고구려의 옛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의 여러 국가와 정권, 그리고 말갈, 여진, 돌궐들의 정권들이 무수히 난립하였던 관계로 당의 영향은 미미했으며, 그마저도 698년 대조영이 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진(발해)를 세우므로 인해서 동 만주의 모든 관할권은 완전히 잃었으며 실제로 713년경에는 당도 발해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전형적인 중국 중앙정부의 행태로서 관리를 못하면 작위를 주어 체면을 차리는 형태라 할 것이다. 당은 문왕 이후 선왕 때까지 계속 발전하여 남으로는 평양 원산 선을 그리고 서로는 요동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발해는 926년에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30여 년을 유지하였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발해 역시 집안의 국내성이나 요동지역의 경우 공고하게 점령을 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였고 일본에 보낸 공식 전문에도 고려국이라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옛 지역을 발전시키고 다시 복구하는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 이후는 거란의 요가, 다음은 금이 그 다음은 원이 지배하였고 잠시간 명나라가 지배권을 가졌다고 보이나 곧 만주(여진)족의 후금과 청에 의해서 다시 복속된다. 그러니까 고구려 집안 일대 즉 국내성 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 한족이 지배한 적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고 뒤로 이어진 정부들이 대부분 이민족인 관계로 거의 버려진 곳이 되었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대왕비가 금나라 황제 혹은 태조 야율아보기의 비라고 전해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인 그가 자신 보다 먼저 연구한 한국인을 고의로 만들어 냈을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60-187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의 누군가가 먼저 탁본을 시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만약 이 탁본이 있다면 학술연구에 더욱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일본의 위조설이나 그 밖의 내용을 밝히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은 ‘광개토왕릉비’를 저술한 북한 학자 박시형의 저서에서 상세하게 나오므로 관심이 있는 경우 상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럼 지금부터 광개토왕비의 번역을 시작해 본다. 본문 해석의 근거와 자료는 한국 금석문 영상종합 시스템(http://gsm.nricp.go.kr)에 등재된 자료 중 국립 중앙박물관 소재의 탁본을 사용하였다. 문장의 맺고 끊음은 본인의 해석 방법에 따라 진행하였다.
1편 서문(제 1면부터)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
오래 전 시조 추모왕의 창업의 기틀을 다지셨는데, (추모왕이 건국한 나라는 혹은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유래한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여식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 세상에 나온 후 성덕이 있어▨▨▨▨▨이다.
1면에 나오는 처음 내용이다. 惟는 문장 앞에서 뜻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볼 때 모든 학자들이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까지는 같은 해석을 하고 차이도 거의 없다. 聖다음의 글자는 탁본에 따라 두인변이 보인다고 하니 아마도 德으로 추정이 될 것이나 정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뒤의 구절은 왼편 하단부로부터 비가 심하게 마모되고 부서져서 전혀 알기 어렵다.
박시형 교수는 剖卵降世, 生而有聖▨▨▨▨▨▨가 아니라 剖卵降出, 生子有聖▨▨▨▨▨▨로 본다. 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중국 대부분의 문헌과 한국, 일본의 학자들도 거의 世生而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내용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고 “성덕이 있어~~~~를 하였다” 혹은 “~~을 하여 성덕이 있었다” 혹은 완전이 다른 문장으로 “성덕이 있었다. 그리고 ~~을 하였다” 정도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뒤에 것은 알을 깨고 나오며 부터 성덕이 있어~~를 하였다가 될 것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聖 이후에 글자가 보이지 않으므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 할 것이다.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 忽本西城, 山上而建都焉
추모왕께서 명하시어 남쪽으로 순행하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왕께서 나루터에서 말하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하백의 여식을 어미로 둔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가 엮어지고 거북이는 떠올라라”라고 하시니 이를 들고 갈대가 엮이고 거북이가 떠올랐다. 이후 강을 건너 비류곡을 지나 홀본서성의 산위에 도읍을 하였도다.”
命駕는 탈 것을 명하여 준비시키는 것을 말하며 앞에 태왕께서를 생략한 것이며 ‘巡幸’이란 말은 말 그대로 왕이 행차하는 것을 순행이라고 고어에서 써 왔으므로 무난하다고 할 것이나 비문을 보면 車라고 볼 수도 있어 박시형은 차로 나머지 일본이나 특히 중국 학자들은 순행으로 해석한다. 굳이 차라고 표현하여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보여진다. 또한 고구려가 기마 민족의 특성과 정복 국가의 특성을 가진 점을 볼 때 또한 건국 초기의 추모왕이 실제로는 부여에 쫓겨서 도망을 갔다고 보거나 혹은 쫓기지는 않았더라도 아직 고구려가 건국되기도 전이고 자신의 가족도 데리고 가지 못한 상태였으며 추모왕이 아직 젊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편안하게 수레를 타고 갔을 이유가 없으니 순행이라고 봄이 오히려 맞는다고 할 것이다. 물론 당시의 작은 규모로 볼 때 순행이란 말도 완전히 맞는 것 같지는 않으나 조상의 위대함을 표현하려 한 것이니까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남하는 말 그대로 남쪽으로 내려 갔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해석은 추모왕이 명하셔서 탈것을 가지고 와서 남쪽으로 순행하였다 정도의 해석이 아닐까 싶다.
路由夫餘奄利大水는 가는 도중 부여의 엄리대수라는 강변에 이르러서 王臨津言曰 왕께서(배가 없었던 이유로) 나루터 앞에서 말하시기를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浮龜 “나는 천황의 아들 즉 하늘의 아들이고 하백의 여식을 어머니로 둔 추모왕이다. 나를 위해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들은 떠오르도록 해라(갈대와 거북이가 같이 다리를 만들어라)”고 하니 이 말이 있자마자(듣자 마자)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이 들이 떠올라서 다리를 이었다.
이 부분은 덮거나 가린다는 뜻의 폐(蔽)라고 하기도 하고 자라를 뜻하는 별(鼈: bie) 혹은 갈대를 뜻하는 가(葭: jia)로 보기도 하는데 폐의 경우는 말의 어감이 좀 이상하고 별이나 갈대는 모두 해석상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대다수의 학자들과 같이 갈대 가로 보는 것이 문맥상 맞지 않나 싶
동북공정이 뭔지 아냐 ?
일본과 한국 몽골을 중국의 소수민족 취급하는건데
고구려의 존재를 부인한다
왜냐 ?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있어
동시에 이 56개 소수민족이 독립하겠다고 한다면
중국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짐작하지 ?
본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구려 광개토대왕 비의 비문 조작이나 석회 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믿고 있으며 1900년대 초 일본군들만 진행한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실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꼭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1860년대부터 1900년대 초까지는 중국에서도 금속학의 열기가 무척이나 높았던 시기이고 일부 지식인들은 고대 석비나 관련 유물의 탁본을 하는 것을 무슨 시대적 유행처럼 생각했던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광개토대왕 비를 포함한 고구려의 문화와 사적은 고구려 멸망(668년)이후 철저하게 파괴되고 외면되어왔다. 신라는 고구려의 대부분을 회복하지 못했고 실제로 평양지역을 수복한 것도 사실은 고려가 되어서야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그러면 당나라는 이를 충분히 관리하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당은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세웠으나 해당 지역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요동의 관문 지역인 옛 고구려의 신성(新城)으로 도호부를 옮겼다가 30년이 못되어서 결국은 폐지하고 만다. 이 시기 이후 당은 임시적으로는 몰라도 실질적인 의미에서 또 지속적으로 요동과 요서 지역의 일부를 관할권에 넣지 못한다.
고구려의 옛 지역은 고구려 유민들의 여러 국가와 정권, 그리고 말갈, 여진, 돌궐들의 정권들이 무수히 난립하였던 관계로 당의 영향은 미미했으며, 그마저도 698년 대조영이 지금의 길림성 지역에 진(발해)를 세우므로 인해서 동 만주의 모든 관할권은 완전히 잃었으며 실제로 713년경에는 당도 발해의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인정하게 된다. 전형적인 중국 중앙정부의 행태로서 관리를 못하면 작위를 주어 체면을 차리는 형태라 할 것이다. 당은 문왕 이후 선왕 때까지 계속 발전하여 남으로는 평양 원산 선을 그리고 서로는 요동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게 된다.
발해는 926년에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30여 년을 유지하였는데 다만 아쉬운 것은 발해 역시 집안의 국내성이나 요동지역의 경우 공고하게 점령을 한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았고 외부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였고 일본에 보낸 공식 전문에도 고려국이라고 하였지만 고구려의 옛 지역을 발전시키고 다시 복구하는 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보인다. 그 이후는 거란의 요가, 다음은 금이 그 다음은 원이 지배하였고 잠시간 명나라가 지배권을 가졌다고 보이나 곧 만주(여진)족의 후금과 청에 의해서 다시 복속된다. 그러니까 고구려 집안 일대 즉 국내성 지역은 고구려 멸망 이후 한족이 지배한 적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되고 뒤로 이어진 정부들이 대부분 이민족인 관계로 거의 버려진 곳이 되었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개토대왕비가 금나라 황제 혹은 태조 야율아보기의 비라고 전해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인인 그가 자신 보다 먼저 연구한 조선인을 고의로 만들어 냈을 이유는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1860-187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의 누군가가 먼저 탁본을 시행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며 만약 이 탁본이 있다면 학술연구에 더욱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일본의 위조설이나 그 밖의 내용을 밝히는 것에도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이러한 내용은 ‘광개토왕릉비’를 저술한 북한 학자 박시형의 저서에서 상세하게 나오므로 관심이 있는 경우 상세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럼 지금부터 광개토왕비의 번역을 시작해 본다. 본문 해석의 근거와 자료는 한국 금석문 영상종합 시스템(http://gsm.nricp.go.kr)에 등재된 자료 중 국립 중앙박물관 소재의 탁본을 사용하였다. 문장의 맺고 끊음은 본인의 해석 방법에 따라 진행하였다.
1편 서문(제 1면부터)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母河伯女郎, 剖卵降世, 生而有聖▨, ▨▨▨▨▨.
오래 전 시조 추모왕의 창업의 기틀을 다지셨는데, (추모왕이 건국한 나라는 혹은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유래한다. (추모왕은) 천제의 아들과 하백의 여식에서 알을 깨고 태어나 세상에 나온 후 성덕이 있어▨▨▨▨▨이다.
1면에 나오는 처음 내용이다. 惟는 문장 앞에서 뜻이 없이 쓰인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볼 때 모든 학자들이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까지는 같은 해석을 하고 차이도 거의 없다. 聖다음의 글자는 탁본에 따라 두인변이 보인다고 하니 아마도 德으로 추정이 될 것이나 정확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뒤의 구절은 왼편 하단부로부터 비가 심하게 마모되고 부서져서 전혀 알기 어렵다.
박시형 교수는 剖卵降世, 生而有聖▨▨▨▨▨▨가 아니라 剖卵降出, 生子有聖▨▨▨▨▨▨로 본다. 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중국 대부분의 문헌과 한국, 일본의 학자들도 거의 世生而로 보는 것으로 보인다.
첫번째 내용은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고 “성덕이 있어~~~~를 하였다” 혹은 “~~을 하여 성덕이 있었다” 혹은 완전이 다른 문장으로 “성덕이 있었다. 그리고 ~~을 하였다” 정도의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고 뒤에 것은 알을 깨고 나오며 부터 성덕이 있어~~를 하였다가 될 것이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聖 이후에 글자가 보이지 않으므로 정확한 예측은 불가능 할 것이다.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 爲我連葭浮龜, 應聲卽爲連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