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金時敏, 1554~1592]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2만여의 왜적을 격퇴하고
전사하였다.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이다. 아버지는 지평(持平)을 지낸 김충갑(金忠甲)이며, 충청도 목천현(木川縣, 現 천안시 병천면)에서 출생하였다(1554).
어려서부터 무사적 기질이 강하였고 활도 잘 쏘았다. 무과에 대한 차별이 심하던 시절 가족의 반대에도 25세 때(1578)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받았다. 병기 및 군사훈련에 관하여 토론하다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하였다.
1583년 여진 출신 이탕개(尼湯介)가 난을 일으켰을 때 황해도 순찰사 정언신의 지휘하에서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공을 세웠고, 그 후 훈련원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복직되었다.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1591년(선조 24) 진주통판(晋州通判)으로 천거되었고 무기를 갖추어 진주성을 지겼다. 이듬해 목사가 죽고 공석일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1592) 6~7월에 스스로 군사를 지휘하여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 공로로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승진하였다(8월). 9월에는 적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10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를 제수받았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전투/진주대첩). 전쟁 중에 염초(焰硝) 및 총통(銃筒) 등을 제조하여 활용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장군이 진주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위를 이끌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적의 세력을 진압한 후, 성안을 순회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에 맞아 치료를 하였으나,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1592).
그가 죽기 전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소식을 들은 것은 죽은 다음이었다. 1604년(선조 37) 선무(宣武)공신 2등에 올랐고(1604), 1709(숙종 35)에는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추봉되고 영의정이 추증(追贈)되었다. 진주성(晋州城)에 사당을 짓고 창열사(彰烈祠)의 사액을 내려(1607, 선조 40) 김시민을 중심으로 전몰자 제신을 배향(配享)토록 하였다. 충무(忠武)의 시호가 내려졌다(1711).
최근에 일본인이 소장하고 있던 그의 선무공신첩을 국민의 성의를 모아 다시 사서 국내로 들여와 보관하고 있다.
조헌 [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호조와 예조의 좌랑·감찰을 거쳐 통진현감(通津縣監)으로 남형(濫刑)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평(富平)에 유배되었다. 1581년 공조좌랑에 등용되어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종묘서령(宗廟署令)을 거쳐 1582년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나갔다.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동인이 이이·성혼을 추죄(追罪)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고향에 내려가 임지를 이탈한 죄로 파직당하였다.
1589년 동인을 공박하다가 길주에 귀양가고, 그해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이 일어나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1,700여 명을 모아 영규(靈圭) 등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錦山)으로 향했으나, 전공을 시기하는 관군의 방해로 의병이 대부분 해산되고, 700명의 의병으로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이이의 문인 중 가장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1754년(영조 30) 영의정에 추증, 문묘(文廟)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금산의 성곡서원(聖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중봉집》이 있고, 저서에 《동환봉사》등이 있다.
권율 [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명장.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휴정 [休靜, 1520~1604.1.23]
서산대사라는 호로 잘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때 승병을 이끌고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본관 완산(完山). 속성 최(崔).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속명 여신(汝信). 안주(安州) 출생. 1534년(중종 29) 진사시(進士試)에 낙방하자 지리산(智異山)에 입산, 숭인(崇仁) 문하에서 승려가 되어 《전등록(傳燈錄)》과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을 배웠다. 그 후 일선(一禪)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관(靈觀)의 법을 계승하였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에 연루되었다 하여 투옥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73세의 노구로 왕명에 따라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병(僧兵) 1,500명을 모집, 명나라 군대와 합세, 한양 수복에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가 되었으나 1594년 유정(惟政)에게 승병을 맡기고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여생을 보냈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좌선견성(坐禪見性)을 중시하고 교(敎)를 선(禪)의 한 과정으로 보아 선종(禪宗)에 교종(敎宗)을 일원화시켰다. 한편 유(儒) ·불(佛) ·도(道)는 궁극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 삼교통합론(三敎統合論)의 기원을 이루어 놓았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圖)가 서고, 해남(海南) 표충사(表忠祠) 등에 배향되었다.
문집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고,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삼가귀감(三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金市民 [金時敏, 1554‾1592]
朝鮮中期の武臣で 壬辰の乱 時晋州城戦闘で 3800人の兵力で 2万余の外敵を撃退して
戦死した.
朝鮮中期の武臣で本館は安東, 寝る面晤(勉吾)だ. お父さんは地平(持平)を執り行なったギムツングガブ(金忠甲)で, 忠清道 モックチォンヒョン(木川県, 現 天安市 竝川面)から出生した(1554).
幼いごろから無事的気質が強かったし弓もよくうった. 武科に対する差別がひどかった時代家族の反対にも 25才時(1578) 武科に合格して 訓練院 判官(判官)を除数受けた. 兵器及び軍事訓練に関して討論して建議事項が採択されないで 兵曹判書と葛藤をもたらして辞職した.
1583年であられた出身イタングゲ(尼湯介)が乱を起こした時黄海道 巡察使 鄭彦信の指揮の下でシンリブ, 李舜臣 などとともに功を立てたし, その後訓練院 軍旗の時(軍器侍) 判官に復職された.
党派と利害関係を持たなくて 1591年(先祖 24) 真珠通販(晋州通判)に薦挙されたし武器を取り揃えて 晋州城を生じた. 翌年牧師が死んで空席である時 壬辰の乱が起きよう(1592) 6‾7月に自ら軍事を指揮して倭軍を大きく打ち破った. その功労で真珠牧師(晋州牧使)で昇進こんにちはだった(8月). 9月には賊将ピョングソテ(平小泰)を捕らえる専攻を立てたし, その功労で 10月に 軽傷優も 兵馬節度使(兵馬節道使)を除数受けた. 10月に倭軍が大大的に晋州城を攻撃して来ると, 当時晋州城を守っていた彼は 3,800余名の軍隊を導いて卓越な用兵術と戦略戦術で賊将Hasegawa[長谷川秀一]が導く 2万の軍隊に迎え大勝をおさめた(第1次晋州城戦闘/真珠大勝). 戦争の中に焔硝(焔硝) 及び総統(銃筒) などを製造して活用した. 義兵長 クァクゼウ 催軽灰 などが敵軍の背後を脅威する助けを借りて戦闘が進行されたが, 将軍が晋州城中での全体的な地位を導いた. 10月 5日から 11日まで続いたこの戦闘で 最終日 時の大大的な総攻勢に迎え時の勢力を押えた後, 城中を巡回する中倒れた敵軍がうった弾丸にそう治療をしたが, 10月 18日 39歳を日記で一生を終えた(1592).
彼が死ぬ前に軽傷牛島兵馬節度使に任命されたがこの消息を聞いたことは死んだ後だった. 1604年(先祖 37) 船務(宣武)功臣 2背中に上がったし(1604), 1709(肅宗 35)には上洛府院君(上洛府院君)に秋捧されて 領議政が追贈(追贈)になった. 晋州城(晋州城)に祠堂を建てて チァングヨルサ(彰烈祠)の王の命名を下げて(1607, 先祖 40) 金市民を中心に戦歿者ゼシンを配享(配享)するようにした. 忠武(忠武)の諡号が下ろされた(1711).
最近日本人が所蔵していた彼のソンムゴングシンチォブを国民の誠意を集めてまた住んで国内に持ちこんで保管している.
朝憲 [趙憲, 1544‾1592]
朝鮮中期の入れ墨・義兵長. 壬辰の乱が起きるとオクチョンで義兵を起こして令堰など僧兵と力を合わせて清州を奪い返した. 引き続き全羅道に向ける倭軍を阻むためにクムサン戦闘で奮戦している途中義兵たちとともに皆戦死した. すぐれた学者で, 奇抜現世一刀説(気発理乗一途説)を支持して李イの学問を継勝発展させた.
好調と礼曹判書の左と・監察を経ってトングジンヒョンガム(通津県監)で濫刑(濫刑)するという弾劾を受けて富平(富平)に流たくされた. 1581年ゴングゾズァラングに登竜されて全羅道道士(全羅道都事)・宗廟書領(宗廟署令)を経って 1582年恩返し県監(報恩県監)で出た. 1586年公州提督官になって同人が李イ・成渾をツジェ(追罪)しようとすることを反対して故郷に降りて任地を離脱した罪で罷職当たりこんにちはだった.
1589年同人を責めている途中ギルズに流刑になって行って, その年 鄭汝立(鄭汝立) 謀反事件が起こって同人が失脚すると釈放された. 壬辰の乱が起きるとオクチョン(沃川)で義兵を起こして 1,700余人を集めて令堰(霊圭) など僧兵と力を合わせて清州を奪い返した. 引き継いで 全羅道に向ける倭軍を阻むために金山(錦山)で向けたが, 専攻を嫉む官軍の邪魔で義兵が大部分解散されて, 700人の義兵で クムサン戦闘で奮戦している途中義兵たちとともに皆戦死した.
李イの文人の中で一番すぐれた学者で, 奇抜現世一刀説(気発理乗一途説)を支持して李イの学問を継勝発展させた. 1754年(霊鳥 30) 領議政に追贈, 文廟(文廟)に配享されて, オクチョンの ピョチュン寺(表忠祠), 白川の 門会書院(文会書院), 金山のソングゴックソワン(聖谷書院), 恩返しの 上弦書院(象賢書院) などに祭享された. 文集に 《ズングボングジブ》があって, 著書に 《同ラック社》などがある.
権慄 [権慄, 1537‾1599]
朝鮮中期の名将. 錦山郡理(梨峙)けんか, 水原ドックワングサンソング戦闘, 幸州大捷などで勝利した. 壬辰の乱 7年の間軍隊を総指揮した将軍で専攻を立てた.
本館安東. 定木オンシン(彦愼). 号 漫酔だ(晩翠堂) ・毛顎(暮嶽). 諡号ツングザング(忠荘). 1582年(先祖 15) 式年文科(式年文科)に兵科で及第, 承文院精子(承文院正字)になって, 戦績(典籍)を経って 1587年全羅道道士, 翌年礼曹判書情郎 ・好調情郎 ・京城判官(鏡城判官)に引き続き, 1591年義州牧師(義州牧使)になった.
1592年 壬辰の乱が起きて首都が陷落された後全羅道巡察使李光(李洸)と 防禦使(防禦使) グァックヤング(郭〓)が 4万名余の軍事を募集する時, 光州牧師としてグァックヤングの旗下に入って中尉場(中衛将)になって北進している途中竜仁にで日本軍と戦ったが敗れた. その後南原に駐屯して 1,000余名の 義勇軍を募集, 錦山郡 理(梨峙)けんかから倭将 ゴバヤカとダカカなの[小早川隆景]の精鋭部隊を大破して全羅道巡察使で昇進こんにちはだった.
また北進の中に水原のドックワングサンソング(禿旺山城)に駐屯しながら堅固な陣地を構築して 持久戦(持久戦)と 遊撃戦(遊撃戦)を展開する ウキタヒデイに[宇喜多秀家]が従える貸し付け台の攻撃を受けたがこれを撃退した. 1593年には兵力を分けて副指令官 宣居怡(宣居怡)に始興 金主山(衿州山)に陣を張るようにした後 2800人の兵力を導いて漢江を向こう 幸州山城(幸州山城)に駐屯して, 3万名の大軍で攻撃して来たゴバヤカとの日本軍を迎え 2万 4000余名の死傷者を出すようにしながら撃退した. その専攻で 桃源数に上がってから逃亡病を即決処分した罪に解職されたが, 漢城府判尹に再起用されて備辺司党上(備辺司堂上)を兼職したし, 1596年忠清道巡察使に引き続きまた桃源数になった. 1597年丁酉災乱が起きると敵軍の北上を阻むために明提督(提督) 魔鬼(麻貴)とともに蔚山で対陣したが, 明司令官良好(楊鎬)の突然した退却領に撤収した.
であってスンチォンイェギョ(順天曳橋)に駐屯した日本軍を攻撃しようと思ったが, 戦争の拡大を憚った明長寿たちの非協助で失敗した. 壬辰の乱 7年の間軍隊を総指揮した将軍で海の 李舜臣といっしょに歴史に人を専攻を立てた. 1599年老患で官職を辞任して故郷に帰った. 領議政に追贈されて, 1604年(先祖 37) 船務功臣(宣武功臣) 1位に霊歌府院君(永嘉府院君)に秋捧されたし, 忠長寺(忠荘祠)に配享された.
休廷 [休静, 1520‾1604.1.23]
瑞山せりふという号によく知られている. 壬辰の乱時僧兵を導いて漢陽修復に功を立てた. 油(儒) ・火(仏) ・度(道)は窮極的に一致すると主張, 三校統合では(三教統合論)の起源を成して置いた
本館完山(完山). 速成最(崔). 定木ヒョンウング(玄応). 号清虚(清虚)・瑞山(西山). 俗名女神(汝信). おつまみ(安州) 生まれ. 1534年(中宗 29) 陳謝の時(進士試)に落ちよう 智異山(智異山)に入山, 崇仁(崇仁) 門下で僧侶になって 《前登録(伝燈録)》と 《華厳経(華厳経)》 《法花経(法華経)》 などを学んだ. その後一線(一禅)に 具足戒(具足戒)を受けて栄冠(霊観)の法を受け継いだ.
1552年(明宗 7) 僧科(僧科)に及第, 大統領選挙(大選)・中徳(中徳)を経って教宗判事(教宗判事)・禅宗判事(禅宗判事)を兼任したし, 普愚(普雨)を引き継いで 奉恩寺(奉恩寺) 主旨になった. 1556年妖僧無業(無業)の誣告で 鄭汝立(鄭汝立)の逆謨に掛かり合ったと言って投獄されてからすぐ釈放された.
壬辰の乱が起きると 73歳の老身で王命によってパルドシブユックゾングドチォングソブ(八道十六宗都〓攝)になって僧兵(僧兵) 1,500人を募集, 明軍隊と合勢, 漢陽修復に功を立てた. この功労でグックイルドデソンサソンギョドチォングソブブゾングスギョボゼドングギェゾンザ(国一都大禅師禅教都〓攝扶宗樹教普済登階尊者)になったが 1594年有情(惟政)に僧兵を任せて 妙香山 原籍癌(円寂庵)で余生を送った.
[壬辰の乱 の時の官軍と義兵の活動]
左禅犬星(坐禅見性)を重視して校(教)を線(禅)の一過程で見て禅宗(禅宗)に教宗(教宗)を一員化させた. 一方油(儒) ・火(仏) ・度(道)は窮極的に一致すると主張, 三校統合では(三教統合論)の起源を成して置いた. 妙香山 アンシム寺(安心寺), 金鋼山油点社(楡岾寺)に不渡り(浮図)が書庫, 海南(海南) ピョチュン寺(表忠祠) などに配享された.
文集 《清虚当たり集(清虚堂集)》があって, 編著に 《宣教席(禅教釈)》 《ソンギョギョル(禅教訣)》 《運輸団(雲水壇)》 《ご遠慮亀鑑(三家亀鑑)》 《心法です(心法要)》 《雪線の(説禅儀)》 などが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