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는 “불안”이란 어디로부터 도망을 가는 것인데, 도망가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이때 내가 거기에서 도망가려는 바로 그 “나”가 사실은 “본래의 나”라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더 이상 안전함, 편안함, 포근함에 머물러 있지 않을 때 불안은 다가오며 우리는 화급하게 도망하게 되는데, 그 도망은 우리가 본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불안을 그 자체로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 곧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불안에 대한 용기를 갖는 사람은 자신을 대면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그 동안 자기가 매달려 있던 것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다. 이 아무것도 아님이 곧 “무無”인데,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는 것은 그가 그간 매달려 왔던 것들이 다 부질없는 것으로 무화無化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때 비로소 나는 그들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부터 나 자신을 되찾을 수 있고, 나 자신을 대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스스로 택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결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단을 계속 유보한다. 하이데거는 안절부절함을 불안의 표식이라 하면서 이제 안절부절함을 제거하려 할 것이 아니라 안절부절함 속에서 자신을 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ハイデッガーは ¥"不安¥"と言う(のは)どこから逃げることだが, 逃げだそうとすることは外でない ¥"私自身¥"だ. この時内が そこで逃げだそうとするまさに彼 ¥"や¥"が事実は ¥"本来の私¥"と ハイデッガーは言う. これ以上安全, 安らかさ, なごやかさにとどまって ない時不安は近付きながら私たちは火急に逃げるようになるのに, その逃亡は私たちが本来で存在することができる可能性を含んで あることを見せてくれるのだ. したがってハイデッガーは不安をそのもので馬主 対することができる勇気, すぐ ¥"不安に対する勇気¥"を持た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 火中に対する勇気を持つ人は自分を対面する人として自分がどうに サルアがヤするかをと思う人だ. その人はその間自分がぶら下げられていた ものなどが実は何らの意味がないということを悟る人だ. この何でもないことが すなわち ¥"大根無¥"なのに, 何でもないことを悟るということは彼がその間ぶら下げられて来たものなどが だつまらないことで霧化無化になることを意味する. あの時初めて生える彼らの中にすぼっと 陷っていることから私自分を取り戻すことができるし, 私自分を対することができるし, 私自身を自ら選ぶ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 これがちょうど ¥"決断¥"だ. しかし人々は決断をずっと留保する. ハイデッガーは苛苛することを不安の表式と言いながらもう苛苛することをとり除こうと思うのではなく苛苛するの中で自分を対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