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wander_civic씨가 (지금은 한글을 자랑하지만 ,양반은 한문 밖에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라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그 주장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김치와사비가 올린 동영상이었습니다
먼저 김치와시비가 올린 동영상의 내용을 살펴보고 반론하겠습니다
그는 반말을 하고 있었으므로 나도 반말하겠습니다
—————◆김치와사비 :
한국의 최초 근대적 신문이라는 한성순보(漢城旬報)에 대해 한국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한성순보는 조선 정부 기구였던 박문국(搏文局)에서 주도하여 발행했는데 갑신정변 이후에 발행이 중단되었다
갑신정변은 김옥균(金玉均)깉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사건이다
조선정부가 주도하여 개화 개방이라는 대외정책을 추진했으며 세계정세에 참여하기 노력의 일환으로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라고 한국에서는 가르치고 있는데 안타깝지만 모두 왜곡이다
박문국(薄文局)을 누가 만들었는지 이야기 하지 않는다
박문국을 만든 사람은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廊)이다 그를 조선으로 보내서 조선 최초의 산문을 만들도록 한 인물은
후쿠자와 유키치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들이 일본인이기 때문에 숨긴다
————-★ →반론
양력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 창간사에 세계정세에 참여하기 위해 신문을 발행한다는 취지의 글이 있다
......우리 조정에서는 박문국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외국의 신문을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일까지 기재하여
나라 안에 알리는 동시에 다른 나라에 까지 공포하기로 하고 신문 이름을 旬報라고 하고 견문을 넓히고 .....라고 게재되어 있다
언제 왜곡했다는 거야?
1882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간 박영효(朴泳孝)는 일본에서 3개월 이상 체류했는데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어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에게서 나라를 개화시키는데 신문 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서울에 온 박영효는 국왕에게 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신문의 발간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한다
이에 고종(高宗)은 박영효의 건의에 따라
1883년 8월 17일 (음력 7월 5일)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 同文學의 부속기관으로서 박문국(搏文局)을
설치하고 신문을 발간하도록 명을 내렸어
1883년 10월 31일 드디어 한성순보가 발간되고 인쇄는 박문국에서 하게 되었다
자금은 조선 정부가 지원했고
한성순보 신문사 편집장은 일본인 이노우에가 맡았고 편집자 기자들은 모두 한국인 관원이 맡았다
박문국 (薄文局)의 초대 총재는 閔泳穆 부총재는 金晩植이 임명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인쇄 활자 기술자 등을 주선하여 박문국 설립에 기여하였다
기여한 것은 인정해
그런데 박문국 설치나 한성순보 발간을 이노우에 .후쿠자와 이 2명의 일본인의 합작품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박문국 설치와 한성순보 발간을 위해 노력한 한국인들은 무시되는 것이 옳은가?
일단 외국인이 개인 자격으로 타국에 국가 기구를 설치하는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김치와사비
그리고 갑신정변으로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맞아
————★→ 반론
다 왜곡이라며?
———-◆김치와사비
그런데 어째서 한성순보 발행이 중단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 갑신정변 실패 이후에 청나라에서 일본인을 탄압했어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파괴되었는데 박문국을 설치하고 신문을 발행할 사람이 없으니까 한성순보도 폐간된 거야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있어 1884년에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청나라 병사 몇명이 외상값을 갚아 달라고 부탁하는 한국인 약방 주인을 폭행하고 그 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어
이 사건을 일본인 이노우에가 한성순보에 보도한 거야 그런데 조선은 청나라에 항의를 안 했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이노우에는 일본으로 피신했어
————★ →반론
그 사건은 한성순보 1884년 1월 30일 일자에 실린 華兵犯罪라는 제목의 기사야
이 기사를 읽은 이홍장(李鴻章)이 총판 조선상무 진수당(陳樹棠)에게 진상을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진수당은 다시 김병시(金炳始)에게 경위를 물었는데 김병시는 확인 결과 떠도는 소문을 확증없이 기사화한 것이라고 통지했다
결국 이 사건의 범인을 찾지 못했고 이 기사를 쓴 관련자는 처벌받았는데 이노우에는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일본으로
도망간 거야
————-◆김치와사비
그런데 몇년 후 이노우에가 후쿠자와에게 한성순보를 보여 주었더니 후쿠자와는 신문에 꼭 한글을 넣어야 조선의 개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한성순보는 한글이 아니었어
한국에서는 일본이 한글을 탄압했다고 주장하지만 전부 거짓말이다
후쿠자와의 건의로 다시 조선에 온 이노우에는 최초 한글 신문을 만드는데 그것이 한성주보(漢城周報)이다
한국에서는 한성주보가 어떤 과정을 거치고 창간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아
왜냐하면 일본인이 만들었다는 것을 숨겨야 하니까
이노우에는 조선 정부에 한글신문을 만들 것을 제안했는데 당시 조선의 왕이나 관리들이 반대했어
이해가 안 된다
일본인은 한글을 보급하려고 했고 한국인은 한글 보급을 반대했다니까 !
유일하게 김윤식 (金允植)은 한글 신문을 지지했어
반문국이 인공지능이 아닌데 사람없이 스스로 한글 신문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한성순보 한성주보 모두 일본인 이노우에의 작품이다
이노우에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돌아갈 때 조판 기술자를 데리고 가서 1886년에 만들어진 것이 한성주보야
한국인들은 한글을 천시했어
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왔던 헐버트는 한국인을 위한 지리 교과서 士民必知를 출판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어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문자에 비해 크게 유용한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오히려 없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않으리”
한국인들이 얼마나 한글을 천시하고 배척했는지 알 수 있다
————★→반론
조선의 왕이나 관리들이 한글 신문 발간을 반대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그렇게 써있어?
이미 1886년 한성주보 신문에 한글이 기입되고 있는데?
김치와사비는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네
또 1894년(고종 31년)에 한글을 국문으로 정하는 것을 법으로 정했어
어느 시대나 단체나 예외는 있다
신문물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부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지 세종대왕 당시 한글은 신문물이었어
그런데 오해하지마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양반 중에 한문만 고집하고 한글 사용을 거부한 부류도 분명 있었지만
사실 한글은 양반들에 의해 대중화 되었다
김치와사비는 조선시대 한글 문학도 안 읽었는지
조선시대 양반들이 쓴 한글 문학은 전해지고 있어
————-◆김치와사비
일본은 한국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총독부에서 교재도 만들고 학교에서도 한글교육을 했어
————-★→반론
日帝는 1911년 8월에 제1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일본어를 국어로 하고 조선어 과목 외에 모든 교과서는 모두 일본어로 편찬했어
그런데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으로 초등학교에서는 조선어 과목이 선택 과목으로 되었다
선택과목은 사실상 금지된 과목이나 같다
1940년 4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중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이 금지된다
또 1940년에는 총독부 기관지 외에 민간의 한글 신문은 폐간된다
그런데 논란이 있어
한국의 최초 신문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인데
조선시대 1577년 8월 첫 발행된 신문 (朝報)가 있었고
19세기말 1881년 개항장 부산에서 거주하던 일본인 상인들에 의해 발행된 조선신보라는 신문이 있다
조선신보는 한문과 일본어로 발행되었지만 독자 대상을 일본인과 한국인 까지 했어
근대적 의미의 최초 신문을 한성순보로 하느냐 조선신보로 하느냐 문제다
그런데 최초 한국인이 창간한 근대적 의미의 신문은 한성순보 라고 하는 견해도 있고 일본인이 발행했지만
조선 안에서 발행한 조선신보로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1907년 초등 소학 1학년 과과서
............
■ 博文局 설립과 漢城旬報
강위 (姜瑋 1820년~1884년)
조선후기 한학자이며 개화사상가이다
한성순보를 발행하면서 국한문혼용체를 주장하였다
한성순보는 순 한문을 사용했지만 한성주보는 국내 기사는 국한문. 私議 잡록은 순 한문. 外報 地略은 주로 순 한글로 게재되었다
당시 실무를 담당하던 사람은 姜瑋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노우에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상하이 신문. 시사신보(時事新報)를 함께
번역하는 등 한글 사용에 적극적이었다
한성주보에 한글이 사용될 수 있었던 것도 姜瑋의 공로가 컸다
조선정부는 고종 20년 1883년 8월 17일(양력) 신문과 서적의 간행을 위해 박문국 (搏文局)설립을 결정한다
박문국은 同文學에 예속된 신문보사로 동문학(同文學)장교, 金晩植에 의해 설립이 추진되었다
그런데 새로운 형태의 신문 간행을 처음 박영효(朴泳孝)에 의해 시도되었다
조선시대 1577년에 朝報를 발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관리의 임면이나 중요 행사 등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朝報는 이용자와 그 내용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朴泳孝
따라서 개항 이후 외부와 접촉이 확대되어 외국의 신문을 접하게 된 인사들은 새로운 형태의 신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신문에 대한 효용성이 알려지고 있던 가운데 박영효(朴泳孝)는 1882년 수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각 방면의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 신문 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빅영효는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을 받아 신문제작을 도울 수 있는 일본인 몇명을 데리고 온다
서울에 온 박영효는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박영효는 국왕에게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신문 발간을 허가해 줄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고종은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에 대한 명을 내렸다 (승정원 일기 고종20년 1월 21년)
신문 발간을 맡게 된 박영효는 유길준에게 협조 요청을 한다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主司 유길준은 외교사무를 돌보는 한편 (한성부 신문국 정관)과 (신문창간사) 신문에 대한 해설문을 마련하였다
한성부 신문국 장정에 의하면 신문국의 이름을 搏文局으로 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 발간을 추진하던 박영효는 한성판윤에서 제직당하였다
이것은 외척 민씨 세력이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박영효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유길준(兪吉浚)은
신문 발행이 불투명 하다고 생각하고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신문 발행이 중단되고 박영효가 데리고 왔던 일본인 중에 이노우에(井上角五郞)만 남기고 모두 일본으로 돌아갔다
중단되었던 신문 발행은 同文學 장교로 임명된 김만식(金晩植)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다
김만식은 (병계설 신문보관)의 규정에 근거하여 반문국 설립과 신문 발행을 추진하였다
김만식은 金仁植을 담당 主司로 추천하고 왕의 윤허를 받은 후 1883년 7월 15일(음력)박문국을 설립하고
박문국(博文局)의 司事로 張博 吳容鶩 金基俊 등을 추천하여 왕의 윤허를 받고 남아있던 일본인 이노우에를 고용하였다
이노우에가 기숙하고 있던 저동(苧洞) 가옥에 박문국의 인쇄소를 설치하고
1883년 8월 20일에 본격적으로 신문 발간 작업에 착수하였다
1883년 10월 31일에 드디어 한성순보가 발행되었다 순 한문이다
그러나 10일마다 발행되었던 한성순보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 이후 간행이 중단되었다
이노우에는 다시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
■ 한성주보 (漢城周報)
1884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박문국의 건물과 인쇄소가 파괴되어 한성순보(漢城旬報) 발행이 중단되었다
1885년 5월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외교 통상 사무를 맡은 관청)의 건의에 따라 박문국이 중건되었다
일본 정부는 갑신정변의 事後 처리를 위해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이노우에 가쿠코로(井上角五郞)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노우에(井上角五郞)은 한성순보 복간을 고종(高宗)에게 건의한다
그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 신문이 다시 복간되어야 하며 표기는 한글로 해야 한다고 건의한다
신문 발간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던 外衙門恊辦 김윤식(金允植)의 도움으로 고종의 윤허를 받은
이노우에는 일본에서 신문 발간에 필요한 기계와 활자를 가져 오고
1886년 1월 25일 한성주보(漢城周報)를 창간하였다
한성주보는 박문국의 재정적 지원하에 발간되었다 박문국의 총재는 김윤식(金允植)이었다
한성주보는 국한문 혼용이었다
■ 독립신문
독립신문
1896년 4월 7일 창간되었다
한국에서 발간된 민간 신문이며 순 한글 신문이다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독립협회 기관지로 발간되었다
서재필(徐載弼)
서재필은 당시 4.400원을 발급받고 조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주시경(周時經)
한글보급 운동을 펼쳤고 한글의 대중화와 근대화에 노력한 한글 학자이다
처음 한글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제안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과 함께 첫 민간 신문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학술단체의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였다
국문동식회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문철자법의 통일을 목적으로 1896년 5월 독립신문사 안에 설치했던 국문연구회이다
이 국문 연구회의 국문철자법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 채택되었다
鄭澈 1580년에 쓴 관동별곡
鄭澈은 .조선시대 정치가이며 시인이다
1580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을 때 관동별곡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문학 작품을 한글로 번역 수록한 책이 있다 예를들면 시용향악보 악장가사 등이 있다
한글창제 이후 (1443년~1910년 ) 451년 동안 지속적인 한글 사용이 없었더라면 1894년 한글을 국문으로
정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 썼지만 조선시대 한글은 양반에 의해 넓혀졌습니다
http://db.history.go.kr/id/nh_038_0030_0030_0030_0010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4_1360
日本人 wander_civicさんが (今はハングルを誇るが ,両班は漢文の外に認めようと思わなかった )と主張していました
その主張の根拠で提示したことはキムチわさびがあげた動画でした
先にキムチウォッシュ費が申し上げた町営相議内容をよく見て反論します
彼は丁寧でない言葉をしていたので私も丁寧でない言葉します
----------◆キムチわさび :
韓国の最初近代的新聞という漢城旬報(漢城旬報)に対して韓国では学生たちにどんなに教えようか
漢城旬報は朝鮮政府器具だった博文局(搏文局)で主導して発行したが甲申の変以後に発行が腰砕けになった
甲申の変はキム・オッキュン(金玉均)は開化派たちが起こした事件だ
朝鮮政府が主導して開化開放という対外政策を推進したし世界情勢に参加する努力の一環で漢城旬報を
発行したと韓国では教えているのに切ないが皆歪曲だ
博文局(薄文局)を誰が作ったのか話さない
博文局を作った人は日本人Inoue(井上角五廊)だ彼を朝鮮に送って朝鮮最初の散文を作るようにした人物は
福沢勇吉だところで韓国では彼らが日本人だから隠す
---------★→反論
陽暦 1883年 10月 31日漢城旬報創刊社に世界情勢に参加するために新聞を発行するという主旨の文がある
......我が調整では博文局を設置して管理を置いて外国の新聞を幅広く翻訳して同時に国内の仕事まで記載して
国の中に知らせる同時に他の国にまで公布する事にして新聞名前を 旬報と言って見聞を広げて .....と載せられている
いつ歪曲したというか?
1882年修信使資格で日本へ行った朴泳孝(朴泳孝)は日本で 3ヶ月以上滞留したが当時福沢勇吉に会ったの
彼は福沢勇吉から国を開化させるのに新聞発刊が必要だという話を聞いたの
ソウルへ来た朴泳孝は国王に新聞発行の必要性を説明して新聞の発刊を許可してくれるのを建議する
ここに高宗(高宗)は朴泳孝の建議によって
1883年 8月 17日 (旧暦 7月 5日) 統理交渉通商事務衙門の傘下機関 同文学の付属機関として博文局(搏文局)を
設置して新聞を発刊するように人を下げたの
1883年 10月 31日いよいよ漢城旬報が発刊されて印刷は博文局でするようになった
資金は朝鮮政府が支援したし
漢城旬報新聞社編集長は日本人Inoueが引き受けたし編集者記者たちは皆朝鮮人官員が引き受けた
博文局 (薄文局)の招待総裁は 閔泳穆 副総裁は 金晩植が任命された
福沢勇吉は印刷活字技術者などを取り持って博文局設立に寄与した
寄与したことは認めて
ところで博文局設置や漢城旬報発刊をInoue .福沢この 2人の日本人の合作品という主張は途方もない主張だ
博文局設置と漢城旬報発刊のために努力した朝鮮人たちは無視されることが正しいか?
一応外国人が個人資格で他国に国家器具を設置すること自体が不可能だ
--------◆キムチわさび
そして甲申の変で漢城旬報発行が腰砕けになったと言うのにそれはそう
--------★→ 反論
だ歪曲と言いながら?
-------◆キムチわさび
ところでどうして漢城旬報発行が腰砕けになったのか説明しなくて甲申の変失敗以後に清で日本人を弾圧したの
甲申の変で博文局が破壊されたが博文局を設置して新聞を発行する人がいないから漢城旬報も廃刊されたことなの
ここで重要な事件があって 1884年に清軍隊が朝鮮に駐屯していたがこの時に
清兵士何人が掛け金を返してくれと頼む朝鮮人薬屋主人を暴行をはたらいてその息子を殺害する事件があったの
が事件を日本人Inoueが漢城旬報に報道したのところで朝鮮は清に抗議をしなかったの
身近に脅威を感じた伊納には日本で身を避けたの
--------★ →反論
その事件は漢城旬報 1884年 1月 30日日付けに載せられた 華兵犯罪という題目の記事なの
が記事を読んだイホングザング(李鴻章)が総販朝鮮常務真髄当たり(陳樹棠)に真相を調査しなさいと指示を下したし
真髄当たりはまた金丙時(金炳始)に経緯を聞いたが金丙時は確認結果流れるうわさを確証なしに記事化したことだと通知した
結局この事件の犯人を捜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しこの記事を書いた関連者は処罰されたが伊納には責任を負って辞職して日本で
逃げだしたの
---------◆キムチわさび
ところで何年後Inoueが福沢に漢城旬報を見せてくれたらフクザとは新聞に必ずハングルを入れると朝鮮の開化に
役に立つとマルハンダハンソングスンボはハングルではなかったの
韓国では日本がハングルを弾圧したと主張するが全部嘘だ
フクザとの建議でまた朝鮮へ来た伊納には最初ハングル新聞を作るのにそれが漢城周報(漢城周報)だ
韓国では漢城周報がどんな過程を経って創刊されたのか説明しなくて
何故ならば日本人が作ったということを隠さなければならないから
伊納には朝鮮政府にハングル新聞を作ることを提案したが当時朝鮮の王や役人たちが反対したの
理解できない
日本人はハングルを普及しようと思ったし朝鮮人はハングル普及を反対したから !
唯一にキムユンシック (金允植)はハングル新聞を支持したの
反問国が人工知能ではないのに人なしに自らハングル新聞を作らなかったはずだ
漢城旬報漢城周報皆日本人伊納への作品だ
Inoueが日本で朝鮮に帰る時組み版技術者を連れて行って 1886年に作われたのが漢城与えて見ると
朝鮮人たちはハングルを蔑んだの
当時朝鮮に宣教師に来たハルバートは朝鮮人のための地理教科書 士民必知を出版したが
彼はこんなに言ったの "悲しい朝鮮言文が中国文字に比べて大きく有用なのに人々がそれが分からなくて
むしろオブシンヨギだのどうして惜しいでしょうなかろう"
朝鮮人たちがいくらハングルを蔑んで排斥したのか分かる
--------★→反論
朝鮮の王や役人たちがハングル新聞発刊を反対したという記録は捜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どこにそれほど使っている?
もう 1886年漢城周報新聞にハングルが記入されているのに?
キムチわさびは自分が何を主張するかどうかさえ分からないのね
また 1894年(高宗 31年)にハングルを国文で決めることを方法で定めたの
どの時代も団体や例外はある
新聞物に対する拒否感を持つ部類もあるがそうではない部類もあるの世宗大王当時ハングルは新聞物だったの
ところで誤解するな当時既得権勢力だった両班の中に漢文だけ固執してハングル使用を拒否した部類も確かにあったが
実はハングルは両班たちによって大衆化になった
キムチわさびは朝鮮時代ハングル文学徒読まなかったのか
朝鮮時代両班たちが書いたハングル文学は伝わっていて
---------◆キムチわさび
日本は朝鮮人にハングルを教えるために総督府で教材も作って学校でもハングル教育をしたの
---------★→反論
日帝は 1911年 8月に第1次朝鮮教育領によって
日本語を国語にして朝鮮語科目外にすべての教科書は皆日本語で編纂したの
ところで 1938年 3次朝鮮教育領で小学校では朝鮮語科目が選択科目になった
選択科目は事実上禁止された科目やようだ
1940年 4次朝鮮教育領によって中学校で朝鮮語科目が禁止される
また 1940年には総督府機関紙外に民間のハングル新聞は廃刊される
ところで論難があって
韓国の最初新聞は何やらする問題なのに
朝鮮時代 1577年 8月初発行された新聞 (朝報)があったし
19世紀末 1881年開港場釜山で居住した日本人商人たちによって発行された朝鮮新報という新聞がある
朝鮮新報は漢文科日本語に発行されたが読者対象を日本人と朝鮮人までしたの
近代的意味の最初新聞を漢城旬報にするのか朝鮮新報にするのか問題だ
ところで最初韓国人が創刊した近代的意味の新聞は漢城旬報と言う見解もあって日本人が発行したが
朝鮮の内で発行した朝鮮新報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意見もある
1907年小小学 1年生グァグァで
............
■ 博文局 設立と 漢城旬報
ガングウィ (姜〓 1820年‾1884年)
朝鮮後期韓鶴子で開化史街並だ
漢城旬報を発行しながら国漢文混用体を主張した
漢城旬報は戍漢文を使ったが漢城与えて見る国内記事は国漢文. 私議 雑録は戍漢文. 外報 地略は主に戍ハングルで載せられた
当時実務を担当した人は 姜〓という人だったが彼はInoueにハングルを教えたし .上海新聞. 時事新報(時事新報)を一緒に
翻訳するなどハングル使用に積極的だった
漢城周報にハングルが使われることができたことも 姜〓の功労が大きかった
朝鮮政府は高宗 20年 1883年 8月 17日(陽暦) 新聞と書籍の刊行のために博文局 (搏文局)設立を決める
博文局は 同文学に隷属した新聞保社で同窓学(同文学)将校, 金晩植によって設立が推進された
ところで新しい形態の新聞刊行を初めて朴泳孝(朴泳孝)によって試みされた
朝鮮時代 1577年に 朝報を発行して中央と地方の役人たちに管理の任兔や重要行事などを知らせるようにした
しかし 朝報は利用者とその内容が極めて制限されていた
朴泳孝
したがって開港以後外部と接触が拡がって外国の新聞を接するようになった人士は新しい形態の新聞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
新聞に対する效用性が知られていた中朴泳孝(朴泳孝)は 1882年修信使資格で日本に派遣された
彼は日本で各方面のリーダーたちと接触しながら国民を啓蒙させるために新聞発刊が必要だという話を聞く
ビックヤングヒョは朝鮮で帰国しながら福沢勇吉の推薦を受けて新聞製作を助けることができる日本人何人を連れて来る
ソウルへ来た朴泳孝は漢城判尹に任命された
朴泳孝は国王に新聞発刊の必要性を説明して新聞発刊を許可してくれるのを建議こんにちはだった
ここに高宗は朴泳孝に新聞発刊に対する人を下げた (承政院日記高宗20年 1月 21年)
新聞発刊を引き受けるようになった朴泳孝は兪吉濬に協助要請をする
統理交渉通商事務衙門の 主司 兪吉濬は外交事務の面倒を見る一方 (漢城府新聞国定款)と (新聞創刊社) 新聞に対するヘソルムンを用意した
漢城府新聞国壮丁によれば新聞国の名前を 搏文局にする事にしたと言う
ところで新聞発刊を推進した朴泳孝は漢城判尹で諸職当たりこんにちはだった
これは外戚閔さん勢力が開化政策を推進した朴泳孝を牽制するための措置だったから兪吉濬(兪吉浚)は
新聞発行が不透明だと思って身柄を理由で辞職した
新聞発行が腰砕けになって朴泳孝が連れて来た日本人の中にInoue(井上角五郎)だけ残して皆日本に帰った
腰砕けになった新聞発行は 同文学 将校に任命された金晩食(金晩植)によってまた推進された
金晩食は (ビョングギェソル新聞保管)の規定に根拠して反問国設立と新聞発行を推進した
金晩食は 金仁植を担当 主司でお勧めして王の允許を受けた後 1883年 7月 15日(旧暦)博文局を設立して
博文局(博文局)の 司事で 張博 呉容鶩 金基俊 などをお勧めして王の允許を受けて残っていた日本人伊納に雇った
Inoueが寄宿していた苧洞(苧洞) 家屋に博文局の印刷所を設置して
1883年 8月 20日に本格的に新聞発刊作業に取り掛かった
1883年 10月 31日にいよいよ漢城旬報が発行された戍漢文だ
しかし 10日ごとに発行された漢城旬報は 1884年 12月 4日甲申の変以後刊行が腰砕けになった
伊納にはまた日本で身を避け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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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城周報 (漢城周報)
1884年甲申の変失敗以後博文局の建物と印刷所が破壊されて漢城旬報(漢城旬報) 発行が腰砕けになった
1885年 5月 統理交渉通商事務衙門(外交通常事務を引き受けた官庁)の建議によって博文局が重建された
日本政府は甲申の変の 事後 処理のためにInoueがオで(井上馨)とInoueGakuコロー(井上角五郎)を朝鮮に派遣した
Inoue(井上角五郎)は漢城旬報復刊を高宗(高宗)に建議する
彼は朝鮮の開化のために新聞がまた復刊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し表記はハングルに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建議する
新聞発刊の必要性を共感していた 外衙門辧 キムユンシック(金允植)の助けで高宗の允許を受けた
伊納には日本で新聞発刊に必要な機械と活字を持って来て
1886年 1月 25日漢城周報(漢城周報)を創刊こんにちはだった
漢城与えて見る博文局の財政的支援の下に発刊された博文局の総裁はキムユンシック(金允植)だった
漢城与えて見る国漢文混用だった
■ 独立新聞
独立新聞
1896年 4月 7日創刊された
韓国で発刊された民間新聞で戍ハングル新聞だソ・ジェピル(徐載弼)を中心に独立協会機関紙に発刊された
ソ・ジェピル(徐載弼)
ソ・ジェピルは当時 4.400ウォンを発給受けて朝鮮政府の支援をもらって独立新聞を創刊こんにちはだった
周時経(周時経)
ハングル普及運動を広げたしハングルの大衆化と近代化に努力したハングル学者だ
初めてハングルでありなさいという新しい名前と呼ぶことを提案して使うようにした
独立協会を作ったソ・ジェピルと一緒に初民間新聞独立新聞を発行して学術団体の国文洞式回(国文同式会)を組織した
国文洞式回は周時経を中心に国文つづり方の統一を目的に 1896年 5月独立新聞社中に設置した国文研究会だ
が国文研究会の国文つづり方は 1933年ハングル綴字法統一案に採択された
鄭〓 1580年に書いた関東別曲
鄭〓は .朝鮮時代政治家や詩人だ
1580年江原道観さつ使になった時関東別曲を作ったと言う
三国時代高麗時代の文学作品をハングルで翻訳収録した本があって例えば時用郷楽譜楽章家事などがある
ハングル創製以後 (1443年‾1910年 ) 451年の間持続的なハングル使用がなかったら 1894年ハングルを国文で
決め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はずだと思います
前に書いたが朝鮮時代ハングルは両班によって広げられました
http://db.history.go.kr/id/nh_038_0030_0030_0030_0010
http://contents.history.go.kr/front/tg/view.do?treeId=0100&levelId=tg_004_1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