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시(新橋), 히라누마(平沼 당시 요코하마역의 대체역), 오사카등의 각 역으로부터,
우선, 열차로 츠루가역으로 가서,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츠루가항으로부터 선박으로 블라디보스토그에,
그리고 거기에서 하바로프스크·하얼빈등에 가는 것과 코베·모지(門司) 역에 가, 선박으로 중국의 대련에,
그리고 하얼빈·치치하루등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루트로의 연락 승차권이 판매되었다.
러시아 중심부에의 승차권도 판매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6월 유럽의 암스테르담·파리 등 각지에의 승차권의 판매를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10월 조선 총독부 철도·남만주철도 경유로 중국의 북경·아마츠등으로의 연락
승차권을 판매 개시.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단. 그 후 소련의 건국 후에도, 시베리아 출병등이 있어 재개는
당분간 되지 않았다.
1927년(쇼와 2년) 8월 유럽에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재개.
1939년(쇼와 14년)~1941년(쇼와 16년) 경제이차 세계대전의 발발·격화로 인하여,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지.
조선·중국으로의 연락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위 지역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도 자연 중지되었다.
전쟁 전 전성기의 일본으로 부터 시베리아 철도로의 경로, 전쟁 전부터 전시중에 걸쳐
일본~조선·중국·유럽간의 연락 수송이 활발하게 행해졌지만,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
거기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탑승해 유럽으로 향하려면 ,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 전, 유럽아시아 연락 수송이 가장 활발히 행해진 1934년(쇼와 9년) 12월 무렵의,
이것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우선 산요(山陽) 본선의 시모노세키역으로 가, 거기로부터 철도성이 운영하고 있던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부산간)으로 조선의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철도와 남만주철도로 신쿄(현재의 창춘, 당시 만주국의 수도에서 만났다.) ,
하얼빈, 만주마을(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치타(러시아)를 경유해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거기에서 대련으로의 항로에 탑승한다.
대련에서는 남만주철도에 탑승해, 나머지는 부산 경유와 같은 경로에서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츠루가(敦賀)·블라디보스토그 경유 호쿠리쿠 본선의 츠루가항역(기선과의 접속을 도모하기 위해,
츠루가항의 일각에 설치된 역. 선박의 발착할 때만 여객 열차가 입선 했다.) 으로 향해,
츠루가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그의 항로를 탄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그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이러한 것들 중에는「부산·신쿄 경유」가 유럽으로 가는데 있어 가장 빠른 루트로,
1934년(쇼와 9년) 12월 당시는 도쿄역을 15시에 특별 급행 열차「후지(富士)」로 출발해,
시모노세키에 다음날의 9시 30분에 도착해 접속하는 관부항로가 10시 30분 발,
그리고 부산에 18시에 도착해 이곳에서 19시 20분 발의 급행「히카리(光)」로 갈아타면,
신쿄에는 도쿄발 3일째의 21시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나아가 갈아타고 가면, 모스크바(소련)에는
도쿄를 출발해 12일째의 17시, 베를린(독일)에는 14일째의 9시 23분 , 파리(프랑스)에는 15일째의 6시 43분 ,
로마(이탈리아)에는 동일 9시, 런던(영국)에는 같은 날의 16시 55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모두 현지 시각)
그 운임은 일등 795엔, 2등 560엔, 삼등 390엔이었다.
덧붙여서 당시의 은행원의 첫월급은 70엔, 시각표의 가격이 25전, 커피 한잔이 15전 정도였다고 한다.
신바시(新橋), 히라누마(平沼 당시 요코하마역의 대체역), 오사카등의 각 역으로부터,
우선, 열차로 츠루가역으로 가서, 그리고 그곳에서 가까운 츠루가항으로부터 선박으로 블라디보스토그에,
그리고 거기에서 하바로프스크·하얼빈등에 가는 것과 코베·모지(門司) 역에 가, 선박으로 중국의 대련에,
그리고 하얼빈·치치하루등으로 향하는 것이라는, 두 개의 루트로의 연락 승차권이 판매되었다.
러시아 중심부에의 승차권도 판매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6월 유럽의 암스테르담·파리 등 각지에의 승차권의 판매를 개시.
1913년(타이쇼 2년) 10월 조선 총독부 철도·남만주철도 경유로 중국의 북경·아마츠등으로의 연락
승차권을 판매 개시.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단. 그 후 소련의 건국 후에도, 시베리아 출병등이 있어 재개는
당분간 되지 않았다.
1927년(쇼와 2년) 8월 유럽에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재개.
1939년(쇼와 14년)~1941년(쇼와 16년) 경제이차 세계대전의 발발·격화로 인하여,
유럽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를 중지.
조선·중국으로의 연락이 불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위 지역으로의 연락 승차권 판매도 자연 중지되었다.
전쟁 전 전성기의 일본으로 부터 시베리아 철도로의 경로, 전쟁 전부터 전시중에 걸쳐
일본~조선·중국·유럽간의 연락 수송이 활발하게 행해졌지만,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가,
거기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탑승해 유럽으로 향하려면 , 다양한 루트가 존재하고 있었다.
전쟁 전, 유럽아시아 연락 수송이 가장 활발히 행해진 1934년(쇼와 9년) 12월 무렵의,
이것들을 정리하여 기술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우선 산요(山陽) 본선의 시모노세키역으로 가, 거기로부터 철도성이 운영하고 있던
관부연락선(시모노세키~부산간)으로 조선의 부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철도와 남만주철도로 신쿄(현재의 창춘, 당시 만주국의 수도에서 만났다.) ,
하얼빈, 만주마을(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치타(러시아)를 경유해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거기에서 대련으로의 항로에 탑승한다.
대련에서는 남만주철도에 탑승해, 나머지는 부산 경유와 같은 경로에서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츠루가(敦賀)·블라디보스토그 경유 호쿠리쿠 본선의 츠루가항역(기선과의 접속을 도모하기 위해,
츠루가항의 일각에 설치된 역. 선박의 발착할 때만 여객 열차가 입선 했다.) 으로 향해,
츠루가항으로부터 블라디보스토그의 항로를 탄다.
그리고 블라디보스토그로부터 시베리아 철도에 접속하는 것.
이러한 것들 중에는「부산·신쿄 경유」가 유럽으로 가는데 있어 가장 빠른 루트로,
1934년(쇼와 9년) 12월 당시는 도쿄역을 15시에 특별 급행 열차「후지(富士)」로 출발해,
시모노세키에 다음날의 9시 30분에 도착해 접속하는 관부항로가 10시 30분 발,
그리고 부산에 18시에 도착해 이곳에서 19시 20분 발의 급행「히카리(光)」로 갈아타면,
신쿄에는 도쿄발 3일째의 21시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나아가 갈아타고 가면, 모스크바(소련)에는
도쿄를 출발해 12일째의 17시, 베를린(독일)에는 14일째의 9시 23분 , 파리(프랑스)에는 15일째의 6시 43분 ,
로마(이탈리아)에는 동일 9시, 런던(영국)에는 같은 날의 16시 55분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모두 현지 시각)
그 운임은 일등 795엔, 2등 560엔, 삼등 390엔이었다.
덧붙여서 당시의 은행원의 첫월급은 70엔, 시각표의 가격이 25전, 커피 한잔이 15전 정도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