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의 역사 . 최초 우산국의 산하였던 고대의 기록삼국사기 신라본기 (三國史記 新羅本記 券4 智證 麻立干)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 不服. 伊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獅} 子, 分載戰船, {抵} 其國海岸, 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13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列傳券 44 <異斯夫 이사부> 그는 그 나라 사람들이 미련하고 사나워서 힘으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나 전략으로 항복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함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으로 가서 거짓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않으면 이 맹수들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우산국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즉시 항복하였다.
기록이 거의 없는 일본은 대부분 우산도 = 울릉도 1개의 섬. 그러므로 독도는 관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일본에는 이시대 동해 바다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없다. 하나가 있지만,
ex) 일본인들은 삼국사기가 고려시대 쓰여있어서 믿을수 없는 데쑤! 라기도 한다.
新羅 冷水里碑 AD503년 우산국을 정벌한 신라 지증왕의 당시 이름 地圖로 갈문왕[至都盧 葛文王] 기록.
역사서와 이름이 쓰여진 유물로 남은 至都盧왕에 비교하는 倭일본의 상황. 倭5王 시대로 오히려 일본서기에는 가짜 왕을 7명 늘어놔 일본에서는 일본서기가 신용되지 않는다.
기록이 거의 없는 일본이 于山國이, 武陵島는 1개의 섬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타당한지 검증한다. 울릉도(?陵島)는 신라때 우산국(于山國), 또는 무릉(武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于山武陵本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우산과 무릉은 본래 두 섬이며 거리가 멀지않아 바람이 있고 날씨가 맑으면 서로 볼수 있다.
삼국시대에는 독도를 우산국(于山國)의 무릉도(武陵島)라고 불렀다. 따라서 우산국을 무릉도,울릉도라고 부르면서도 “본래는 두섬이다” 라고 명시했다.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울릉도에서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 성인봉의 120미터 지점, 또 바다로 20리만 나가면 보이는 독도를 몰랐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다(김병렬, 「독도냐 다께시마냐」(1997, 다다미디어), 160-162, 353-354쪽.
(무릉(武陵島 - 竹島 - 于山島) 나란히 있다.) 일본인들은 우산과 무릉이 1개의 섬이다!라고 주장하지만 여기서 모든것이 파탄난다. 고려인들이 친절하게 너무 자세하게 써주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독도의 최초 이름이 무릉(武陵)이었기 때문이다. 자... 두개의 섬이 맑은날에만 볼수있는 조건을 만족하는 섬이 동해에 어디있을까? 울릉(鬱陵)의 어원이 우산무릉(于山武陵)이라고 밝혀졌다. 高麗史 930년의 기록을 찾아보면 芋陵島라고 나오고 있음이 밝혀졌다. 신라본기에 우산국 별명이 울릉도라고 했던 이유는 이런 것이다. 나라의 범위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매우 정확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독도는 무려 1500년전 地圖로갈문왕(至都盧 葛文王) 시절 얻은 한국의 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于山武陵 二島라 하고 있다. 고려사 지리지를 그대로 복사한 것. 정확한 위치에 관한 정보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신증동국여지승람
「二島在縣正東海中 三峯嶪撑空 南峯稍卑 風日淸明則 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歷歷可見 風便則二日可到 」 「두 섬이 고을 바로 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세 봉우리가 곧게 솟아 하늘에 닿았는데 남쪽 봉우리가 약간 낮다. 바람과 날씨가 청명하면 봉우리 머리의 수목과 산 밑의 모래톱을 역력히 볼 수 있으며 순풍이면 이틀에 갈 수 있다.」 - 16세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팔도총도(八道總圖) - [대마도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 영토] 조선때에도 우산도(지금의 울릉도) , 울릉도(지금의 독도)라는 인식이다. 옛 울릉도는 신라때 우산국이며 우산무릉 즉 울릉도와 독도를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개념이다. 따라서 신라때 우산국을 울릉도라고 한것도 맞고 고려때 본래 두섬이라고 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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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독도(獨島; Dokdo) = (石島; Sokdo) : 돌로 이루어진 섬 독도(Dok-Do) = 돌섬(Dol-Sum, 한자어발음: Sok-Do) ▶ 돌로 이루어져서 끝에 홀로 떨어져 있는 섬. (순수한 한글의 돌(Dol)발음을 독(Dok)발음으로서 한자어 돌(Rock),석(石;Sok)발음을 같이 혼용하여 사용.
[내용]
勅令 (칙령)
鬱陵島를 鬱島로 改稱하고 島監을 郡守로 改正한 件
(제6조 본 령은 반포일로부터 시행할 일)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贊政內部大臣 李乾夏 (칙 의정부의 정임시 서리찬정 내부대신 이건하)
======================================================================================= -1906년 울릉도 郡守 “심흥택(Shim Heung Tek)” 보고서 - 1906년 울릉도 郡守 “심흥택”이 1905년 일본의 시마네현의 독도편입 소식에 놀라서 대한제국 조정(정부)에 보고하는 공문서.
[내용] 報告書號外
光武十年 四月二十九日 江原道觀察使暑痢 春川郡守 李明來 議政府參政大臣 閣下
(주: 光武十年 四月二十九日 = 1906년 광무10년 4월29일)
[해설]
심흥택은 강원도관찰사에게 보고하면서 동시에 중앙 정부에 보고가 늦어질 것을 우려하여 같은 내용의 보고서를 직접 내부(內部)에도 발송하였다. 이 같은 사실은 1906년 5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新報)』「잡보(雜報)」란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보고를 받은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5월 20일자 지령 제3호를 통해 독도의 일본 영토 편입을 부인, 즉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일본은 시마네현 사무관(제3부장) 가미니시 유타로[神西由太郞 ;Gaminish Yutaro]를 책임자로 하는 관민 45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조사대를 죽도(독도)에 파견하여 독도를 조사하였고 조사대는 3월 28일 울릉도에 상륙하여 군수 심흥택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심흥택에게 독도가 일본 영토로 편입되었음을 알렸고, 통보를 접한 심흥택은 이 사실을 강원도관찰사에게 보고하였다.
이 문서에 의하면 심흥택의 보고 내용은
(1) 울릉군 소속 독도, 즉 석도(石島)가 울릉도 외양 100여 리에 있다는 것
(2) 음력 3월 4일(양력 3월 28일) 시마네현 오키[隱岐]도사 동문보(東文輔), 시마네현 사무관 가미니시 유타로(Gaminish Yutaro) 등 일본 관리 약 20명이 군아(Ulleung local governor office)를 방문하여 독도가일본 영지로 되었다고 말하더라는 것
(3) 이들은 도내 호구·토지·생산량, 군아(Office)의 인원·경비·제반 사무에 대하여 질문 조사하여 갔다는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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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일본 Meiji (明治時代) 정부 공문서 -
”竹島에 일본인의 조업을 금지한다”는 것을 조선정부에게 알려온 공문서와 1877년 일본 태정관(Daijokan; 太政官 (だいじょうかん)이 ”울릉도와 竹島는 일본과 관계없는 곳”으로서 일본地圖에 포함시키지 말라는 결정을 일본 내무성에 내려보낸 공문서(일본국립공문서관 보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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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33년 일본 에도막부 정권 재판 기록 지형 도록 -
1833년 에도막부 [江戶幕府] 정권의 한국 영토의 섬에 접근금지 명령을 위반하고, 조선 영토 독도에 무단으로 조업을 갔다가 에도막부(江戶幕府) 정권의 재판에 의해 처형된 Hachi-Hemon씨의 처형 기록, 에도막부 재판문서 첨부. (일본 북서부 地圖)
(과거 조선) 빨강색 ↔ 노란색 (과거 일본)
19세기 후반까지 일본 시마네 현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건너가서는 안된다] 라고 표시된 渡港禁止令. 그러나, 근래까지 일본 시마네 현에서는 “그것은 울릉도를 말하는 것이었고, 독도는 渡港禁止 대상이 아니었다”라고 반복된 주장을 하고 있었는데......
위의 팻말은 1830년까지 일본 시마네현 해안가에 걸려 있던 팻말.
-표기 내용- |
<異斯夫 引っ越し部> 彼はその国人々が愚鈍で荒しくて力で降参受けることは難しいが戦略で降参させることはできると思った. ここに木で獅子をたくさん作って伝えるに分けて積んでその国海岸に行って偽りで言った. 君たちがもし降伏しなければこの猛獣たちを解いておいて踏んで殺す. 于山国人々が恐れて直ちに降伏した. 記録がほとんどない日本は大部分傘も = 鬱陵島 1個の島. だから独島は関係ないと主張する. ところで日本にはこの時代東海海に関する何らの記録がない. 一つがあるが, 日本人たちは三国史記が高麗時代書いていて信じられないデス! ラギもする. 新羅 冷水里碑 AD503年 歴史書と名前が使われた遺物で残った 至都廬王に比べる 倭日本の状況. 倭5王 市どおりむしろ日本書紀にはにせ物王を 7人増えておいて日本では日本書紀が信用されない. 記録がほとんどない日本が 于山国が, 武陵島は 1個の島だと主張するのに果して妥当か検証する. (武陵(武陵島 - 竹島 - 于山島) 並んである.) - 16世紀 信証東国輿地勝覧(新増東国与地勝覧)の 8道総図(八道総図) - ======================================================================================= 独島(独島; Dokdo) = (石島; Sokdo) : 石で成り立った島 独島(Dok-Do) = ドルソム(Dol-Sum, 漢字語発音: Sok-Do) ◆ 石で成り立ってあげく一人きり落ちている島. (純粋なハングルの石(Dol)発音を毒(Dok)発音として漢字語石(Rock),石(石;Sok)発音を一緒に混用して使用. [内容] 勅令 (勅令) 鬱陵島を 鬱島で 改称と 島監を 郡守で 改正一 件 (第6条 見た領は反ホイルから施行する事) 勅 議政府議政臨時署理賛政内部大臣 李乾夏 (チック議政府の定賃の時ソリチァンゾング内部代わりイゴンハ) ======================================================================================= [内容] 報告書号外 光武十年 四月二十九日 江原道観察使暑痢 春川郡守 李明来 議政府参政大臣 閣下 (株: 光武十年 四月二十九日 = 1906年光武10年4月29日) [解説] シムフングテックは江原道観さつ使に報告しながら同時に中央政府に報告が遅くなることを憂慮して同じ内容の報告書を直接内部(内部)にも発送した. このような事実は 1906年 5月 1日付け 『大韓毎日新報(大韓毎日新報)』「雑報(雑報)」欄の記事を通じて分かる. 報告を受けた 議政府 参政代わり 朴斉純は 5月 20日付け指令第3号を通じて 独島の 日本 領土編入を奥さん, すなわち 独島が 大韓帝国 領土なのをはっきりとした. 日本は 島根県 事務官(第3部長) 加味西Yutaで[神西由太郎 ;Gaminish Yutaro]を責任者にする官民 45人で構成された大規模の調査台を 竹刀(独島)に派遣して 独島を調査したし調査台は 3月 28日 鬱陵島に上陸して軍需 シムフングテックを訪問した. これらは シムフングテックに 独島が 日本 領土に編入されたことを知らせたし, 通報を接した シムフングテックはこの事実を江原道観さつ使に報告した. が文書によると シムフングテックの見て内容は (1) 鬱陵邑 所属 独島, すなわち 石刀(石島)が 鬱陵島 形振り 100余りえいるというの (2) 旧暦 3月 4日(陽暦 3月 28日) 島根県 Oki[隠岐]道士 同窓補(東文輔), 島根県事務官 加味西Yutaで(Gaminish Yutaro) など日本管理約 20人が軍煬(Ulleung local governor office)を訪問して 独島が日本 領地になったと言っていたって言うの (3) これらは都内戸口・土地・生産量, 軍煬(Office)の人員・警備(経費)・諸般の事務に対して質問調査して行ったということなどで要約することができる. ======================================================================================= - 19世紀日本 Meiji (明治時代) 政府公文書 - 竹島に日本人の操業を禁止するということを朝鮮政府に知らせて来た公文書と 1877年日本大政官(Daijokan; 太政官 (だいじょうかん)が 鬱陵島と 竹島は日本と関係ない所として日本地図に含ませないと言う決定を日本内務省に下ろした公文書(日本国立公文書館保管) 文書. ======================================================================================= - 1833年日本江戸幕府政権裁判記録地形図緑 - 1833年 江戸幕府 [江戸幕府] 政権の 韓国領土の島に接近禁止命令を違反して, 朝鮮領土独島に無断で操業を行ってから江戸幕府(江戸幕府) 政権の裁判によって処刑された Hachi-Hemonさんの処刑記録, 江戸幕府裁判文書添付. (日本北西部 地図) (過去朝鮮) 赤色 ⇔ 黄色 (過去日本) [鬱陵島と独島は韓国の領土だから渡ってはいけない] と表示された 渡港禁止令. しかし, 近来まで日本シマの現ではそれは鬱陵島を言うことだったし, 独島は 渡港禁止 対象ではなかったと繰り返された主張をしていたが...... 上の立て札は 1830年まで日本島根県海岸にかかっていた立て札. -表記内容- [ 鬱陵島とその右側にある島は韓国の領土だから渡ってはいけない ] ======================================================================================= ▲ 対馬島-独島が皆朝鮮領土に表示された国際法公認地図 (原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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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87
独島の歴史 . 最初于山国の山した古代の記録
○十三年, 夏六月, <于山国>帰服, 歳以土宜為貢. <于山国>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 不服. 伊 <異斯夫>為<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来,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獅} 子, 分載戦船, {抵} 其国海岸, 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獣踏殺之. 国人恐懼則降.
13年夏 6月, 于山国が帰順して, 毎年物産を供え物で捧げる事にした.
三国史記 列伝券 44
[或云<苔宗>.]姓金氏, <奈勿王>四世孫. <智度路王>時, 為沿辺官, 襲<居道>権謀, 以馬戯, 誤<加耶[或云<加羅>.]国>取之. 至十三年壬辰, 為<阿瑟羅州{何瑟羅州}> 軍主, 謀并<于山国>. 謂其国人愚悍, 難以威降,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獅子} , 分載戦〓, 抵其国海岸, 詐告曰: 汝若不服, 則{即} 放此猛獣, 踏殺之. 其人恐懼則{乃} 降.
ジズングワング 13年壬辰に彼はハスルラズの君主になって于山国を竝合しようと計画した.
スサノ−来なさいというパグェシンが日本出雲に上陸して蛇を退治して国家を開いたという Fantasy 内容.
歴史書記録の正確性ならもう韓国の勝利.
記録の信憑性基準で, 当時の記録もなくて王の名前が使われた遺物もない島国日本学者だけ惨めになる.
高麗史 地理 51‾52
鬱陵島(?陵島)は新羅時于山国(于山国), または武陵(武陵)と 呼んだりする. その理由は于山武陵本二島 在県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清明 則可望見
傘と 武陵は本来二つの島や距離が遠くなくて望むことがあって
天気が晴れればお互いに見られる.
したがって于山国を武陵も,鬱陵島だと呼びながらも ¥"本来は二島だ¥" と 明示した.
日本人たちは傘と武陵が 1個の島だ!と主張するがここですべてがパタンナンダ.
高麗人たちが親切にとても詳しく書いてくれたからだ.
何故ならば独島の最初名前が武陵(武陵)引き継いだからだ.
寝なさい... 二つの島が 晴れた日にだけ見られる 条件を満足する島が東海にどこにあるか?
鬱陵(鬱陵)の語源が 右山務御陵(于山武陵)と明かされた.
高麗史 930年の記録を捜してみれば 芋陵島だと出ていることが明かされた.
新羅本紀に于山国ニックネームが 鬱陵島だと言った理由はこんなのだ. 国の範囲だからだ.
三国史記は 非常に正確な 事実を伝えている.
独島はおおよそ 1500年前 地図ロガルムンワング(至都廬 葛文王) 時代 得た 韓国の島だ.
高麗史洩らすのをそのまま コピーしたこと.
信証東国輿地勝覧
「二島在県正東海中 三峯〓〓空 南峯稍卑 風日清明則 峯頭樹木 及山根沙渚 歴歴可見 風便則二日可到 」
「二つの島が村すぐ東海の中ある. 三つの峰が真っ直ぐに湧いて空に着いたが南側峰がちょっと低い.
朝鮮時にも傘も(今の鬱陵島) , 鬱陵島(今の独島)という認識だ.
昔の鬱陵島は新羅時于山国で傘武陵 すなわち鬱陵島と独島を一緒にする巨大な領土概念だ.
したがって新羅時于山国を鬱陵島だと言ったことも迎えて高麗の時本来二島だと表示.
日本人先祖が製作した 地図
1894年独島を韓半島のような色相 `神刈朝鮮国電も(新撰 朝鮮国全図)¥"と `イルチォングした三国対照朝鮮変乱詳細地図 (日清韓 三国対照 朝鮮変乱詳細地図)¥"を 22日公開した.
勅令第四一号 (勅令第41号)
(鬱陵島を鬱陶で名前を変えて, 図鑑を軍需で改正するのは)
第一條 鬱陵島を 鬱島だと 改称下は 江原道に 附属と 島監を 郡守で 改正下は 官制中に 編入と 郡等は 五等にする事
(第1条 鬱陵島を鬱陶だと改称して江原道に所属して, 図鑑を軍需で改正して官制の中に編入して軍等は 5位ですべきこと)
第二條 郡庁位置は 台霞洞で 定と 区域は 鬱陵全島と 竹島石島を 管轄する 事
(第2条 郡庁位置は大河洞で決めて区域は 鬱陵島と竹刀(竹島, 竹の島), 石刀(石島; Sokdo; Dokdo)を管轄する事)
第三條 開国五百四年八月十六日官報中 官庁事項欄内 鬱陵島以下十九字を 刪去と 開国 五百五年 勅令第三十六号 第五條 江原道二十六郡の 六字は 七字で 改正と 安峡郡下に 鬱島郡三字を添入する 事
(第3貝汁物504年8月16日官報の中で官庁事項欄に鬱陵島以下 19者を削除して, 開国505年勅令第36呼弟5兆江原道26軍医 ¥"6¥"字は ¥"7¥"字で改正してアンヒョブグン下に ¥"鬱陶だね¥" 3者を追加する事.)
第四條 経費は 五等郡で 磨錬するが 現今間となると 吏額が 未備と 庶事草創することに 該島収税中に 姑先磨錬する 事
(第4条 警備(経費)は 5ドンググンで用意するが現在李額が不備で敍事草創なので, この島の税金で先に用意する事 - お金があまりないので, 税金を先におさめて警備(経費)を用意して使いなさい.)
第五條 未盡一 諸條は 本島開拓を 隨下野 次第磨錬する 事
(第5条 見果てぬ多くの条項はこの島を開拓しながらだんだん次に用意する事)
附則 (付則)
第六條 本令は 頒布日から 施行する 事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
(光武4年 10月25日)
御押 御璽 奉 (御押御璽棒)
鬱島郡守 沈興沢報告書 内開に 本郡所属 独島が 在於 外洋 百余里 外李肉というが 本月 初四日 辰時量に 輪船一双が 来泊 于郡内道洞浦 而日本官人一行が 到于官舍下野 自云 独島が 今為日本領地故で 視察次来到だイオンバ 其一行 則日本島根懸 隠岐島司 東文輔 及事務官 神西田太郎 税務監督局長 吉田平吾 分署長 警部 影山巌八郎 巡査一人会議一人 医師 技手 各一人 其外 隨員 十余人が 先問 戸〓 人口 土地 生産 多少と 且問 人員 及 経費 幾許 諸般事務を 以調査様で 録去アブ 期 茲に 報告するから 煕亮ハシムル 伏望等 因で 准此 報告するから 照亮ハシムル 伏望
1906年鬱陵軍需 シムフングテック(沈興沢 ; Shim Heung Tek)が 独島が日本領土になったという消息を聞いて国王に申し上げた報告で.
1906年 3月 28日 独島が 日本 領土に編入されたという事実を通報もらった鬱陵島 郡守 シムフングテックは翌日まさに江原道観さつ使に報告したし, その内容は江原道観さつ使霜春川郡守 イミョングレが 1906年 4月 29日付で 議政府 参政代わりに申し上げた ‘見て号外’に収録されている.
大韓帝国 政府はこの報告を通じて 日本が 独島を竝合した事実が分かっていたが 日本 側に抗議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 当時は乙巳條約が成立されて外部が廃止されるなどもう外交権を剥奪されて統監府の支配を受けていた時だった. 私は領土が 日本に併合される危急な境遇に置かれている 大韓帝国としては, これに比べてささいな 鬱陵島の日本警察・日本人撤収問題や 独島 問題の面倒を見る暇がなかった.
[製作発給経緯]
[構成/内容]
が文書には シムフングテックの見て日付けが銘記されていないが 「シムフングテック(沈興沢 ; Shim Heung Tek) 見て副本」を通じて 1906年 3月 29一任が分かった. シムフングテックと イミョングレの見て日付けが 1ヶ月の格差を見せることは 鬱陵島と内陸の間の不便な交通事情のためであることと見え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