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투고가, 꽤 늦어버렸습니다만, 1월의 전반, 개인적으로 휴일이었던 날에, 혼자서, 도쿄도심부의 백금(shirokane) area에 있는, 도쿄도 정원 미술관에, 기획전시(미술관이, 테마를 결정하고, 일시적으로, 실시하는 전시)를 보러 갔을 때, 하는 김에, 백금(shirokane) area의 주택지를, 어슬렁어슬렁산책해 왔을 때의 물건입니다.

 

이하, 백금(shirokane) 산책&음식 1으로부터의 계속...

 

도쿄도심부의 고급 주택지·상업지의 하나로 있는, 백금(shirokane) 에리어(area)에 있는, 도쿄도 정원 미술관은, 지방 자치체(도쿄도)가 운영하는, 기획전(exhibition)을 중심으로 한, 공영의 미술관입니다.도쿄도 정원 미술관은, 원래, 황족의 집안의 하나로 있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저택이었던 물건입니다.황족의 집안과는, 황족(천황의 일족(친족))중, 천황가로부터 독립한 생계를 경영하고 한편, 천황으로부터 칭호(궁호)를 받아, 대대, 황족(천황의 일족)의 신분의 보관 유지가 용서된 집(가족)에서(wiki등을 참고로 했습니다), 현재는, 황족의 집안은, 5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는, 일본에는, 아사카궁(asakanomiya) 가를 포함한, 14의 황족의 집안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한 때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저택을 활용한, 도쿄도 정원 미술관(위의 사진)은, 부지면적, 약 35,360평방 m( 약 10,700평)과 느긋한 부지를 가지고 있습니다(도쿄도 정원 미술관의 건물에 대해서는, 다음 번의 투고로 소개합니다).덧붙여서, 아사카궁(asakanomiya) 가는, 제이차 세계대전전, 이 도쿄의 저택(본댁(main의 저택).현재는, 도쿄도 정원 미술관이 되고 있다) 외에, 내가 아는 한, 카루이자와(karuizawa.동경권 주변을 대표하는, 피서 별장지·피서 보양지)와 아타미(atami.도쿄에 가까운, 규모의 큰 온천 보양지.제이차 세계대전 후는, 도쿄로부터 1박 2일에 부담없이 갈 수 있는 대중적인 온천 보양지로서 급속히 개발되었지만, 옛날(특히 제이차 세계대전전)은, (중류 계급으로부터 서민의 부부의) 신혼 여행의 메카(mecca)로서 또, 부유층의 별장지로서 유명 것 )에, 별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한 때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카루이자와(karuizawa)의 별장(부지면적 약 36,000평방 m( 약 10900평))는, 제이차 세계대전 후, resort 호텔(1964년부터는, 일반 시민의 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황실(천황가) 전용의 호텔이 되었다)이 되어, 아타미(atami)의 별장은, 제이차 세계대전 후, 황족의 집안의 지위와 도쿄의 본댁(main의 저택)(현재의 도쿄도 정원 미술관)를 잃은,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본댁(main의 저택)이 되었던(제이차 세계대전 후,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아타미(atami)에서, 취미의 골프(golf) 삼매의 생활을 보냈습니다.wiki보다).

 

한 때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저택(도쿄의 본댁(main의 저택))을 활용한, 도쿄도 정원 미술관은, 통상은, 미술품·공예품의 전람회(exhibition)를 실시하고 있습니다만, 이 때는, (이색의 전람회(exhibition)이다), 「아사카궁(asakanomiya)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고 하는 전람회(exhibition)를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전람회(exhibition)의 티켓(ticket).

 

 

이하, 이 전람회(exhibition)의 개요에 대해서는, 거의, 미술관의 site의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이 전람회(exhibition)는,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유럽 체재와 아르·데코(Art Deco) 박람회와의 만나, 일본에 귀국후,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본댁(main의 저택)(현재의, 도쿄도 정원 미술관) 건설에 이를 때까지의 일화등을, 미술관 소장 작품외,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저택의 일상 생활 용품이나, 아사카궁(asakanomiya) 가 연고의 물건들, 사진류등 , 새롭게 공개하는 자료를 더해 소개하는 전람회(exhibition)입니다.

 

덧붙여서,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suahiko) 왕·아사카궁(asakanomiya) 윤자(nobuko) 왕비)는, 쇼와(showa) 천황(Hirohito 천황.선대( 제124대)의 일본의 천황)의, 각각, 의리의 숙부 한 명과 숙모의 한 명에 해당됩니다.

 

 

이하, 이 전람회(exhibition)에 관한 설명은, 위의, 이 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의 문장을, 요약한 것입니다.

 

 

일찌기, 영국의 귀족의 아들이나 낭들은, 학업(공부)의 총 마무리해로서 수개월부터 수년에 이르는, 해외에의 대여행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경험했습니다.많은 경우, 그 목적지는, 당시의 문화적인 선진국인, 프랑스나, 이탈리아이며, 신변을 돌보는, 용무괘(goyougakari)나 가정교사를 동행한, 대대적인 것이었습니다.그들은, 이 여행으로, 이문화나 예술에 접함과 동시에, 현지의 상류계급과의 교류를 통해서, 한 사람 분의 영국 신사·숙녀로 성장해 갔습니다.

 

1922년 10월 30일, 당시 35세의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suahiko) 왕은, 군사 연구의 명목으로, 가족을 일본에 남겨,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메이지(meiji) 기(19 세기말에서 1910년대 초) 이래, 「국가 유용(일본의 경제적·문화적인 발전에 도움이 된다)」이 되는 기술이나 신지식의 흡수를 목적으로 한, 황족(천황의 일족)이나 귀족의, 유럽방문(유럽에 건너는 일)이, 관례화하고 있었습니다.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유럽 체재는, 명목상은, 군사 연구 (위해)때문에로 여겨졌습니다만, 실제로는, 황족(천황의 일족)의 일원으로서 견문을 넓히는 일과 현지의 왕족이나 귀족과의 문화적 교류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특별 열차로 도쿄를 출발해, 큐슈(kyusyu) 북부의 모지(moji) 항으로부터, 일본우선 주식회사의 여객선, 후시미환(fushimi maru)( 약 11,000톤)에 승선,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를 향한, 아득히 되는 여행을 떠나 발했습니다.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처음으로 보는 기항지 마다, 그 감상을 적은 그림 엽서를 일본의 가족에게 보냈습니다.

 

12월 중순, 마르세유(Marseille)에 도착한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그 다음에, 철도로, 파리(Paris)에 들어갔습니다.당시 , 파리(Paris)에는, 이미,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사촌형제 부부인,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가(황족의 집안)의,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과 그 아내, 후사코(fusako) 왕비, 또,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의, 남동생(친아우)인, 히가시쿠니노미야(higashikuninomiya) 가(황족의 집안)의, 히가시쿠니노미야(higashikuninomiya) 임언(naruhiko) 왕이, 살고 있었습니다.그들은, 귀족이 아니고, 황족(천황의 일족)이었지만, 감히, 귀족의 칭호인, 「백작」을 자칭하고 있었습니다.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은, 키타(kita) 백작, 히가시쿠니노미야(higashikuninomiya) 임언(naruhiko) 왕은, 아즈마(higashi) 백작입니다.이것은, 황족(천황의 일족)의 해외 유학시의 관례로서 넓게 행해지고 있던 수법으로, 상대국에 대해서, 황족(천황의 일족) 방문의 정식적 대응을 요구하지 않고 끝나, 현지에서의 경호나 외교 의례도 큰폭으로 간략화된다고 하는 이점이 있었습니다.무엇보다, 황족(하늘 황의 일족) 본인에게 있어서는, 딱딱한 신분으로부터 개방되어 여행중은, 한 개인으로서 유연한 스케줄(schedule)을 짤 수 있다고 하는 점은 매력이며,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도, 이 관례에 따라서, 유럽 체제중은, 「아침(asa) 백작」을 가짜의 이름으로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파리(Paris)의 16구(16th arrondissement)의, 당시 , 키타(kita) 백작(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부부가 살고 있던 가까이의, 아파르트만(appartement)의 최상층을 빌려 파리(Paris)에서의 거주지로 했습니다.

 

1923년 4월 1일,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부부로부터, drive에 이끌렸습니다.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과 그 아내, 후사코(fusako) 왕비,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 용무괘(goyougakari)(고귀한 사람의, 신변의 도움에 종사하는 사람)의 프랑스인 여성을 태운,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소유의, 보와잔(Avions Voisin) 23 cv는, 프랑스인의, 첨부 운전기사(전속 driver, chauffeur)의 운전으로, Normandie(Normandy) 지방으로 향하는 길을 쾌적하게 달려, 도중 , 에브르(Evreux)에 들르고, 점심 식사를 끝마쳤습니다.

 

점심 식사 후는, 첨부 운전기사(chauffeur)에 대신하고,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이 운전을 실시했던(drive를 좋아하는,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은, 스스로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이 운전하는, 배기량, 약 4,000 cc의, 보와잔(Avions Voisin) 23 cv형 리무진(limousine)은, 해안의 보양지, 드비르(Deauville)로 계속 되는, 국도를, 화살의 같은 속도로, 질주 계속합니다.근처에 앉아 있던, 운전기사(chauffeur)가, 속도계를 들여다 봐 넣었을 때, 이미, 속도는, 100 km를 넘고 있었다고 하는 일입니다.

 

일행을 실은, 보와잔(Avions Voisin) 23 cv가, 파리(Paris)로부터, 북서로 100 km 너무 멀어진 장소를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가로수가 계속 되는 미포장의 길의 전방으로, 이윽고 1대의 선행차가 보이기 시작해 그 모습이, 금새 커져 왔습니다.이 자동차를 앞지르고, 앞을 서두르려고 했겠지요.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은, 맞은편 차선으로, 핸들(steering wheel)을 잘라, 게다가 액셀(accelerator)을 발을 디디고, 선행차의 전방으로 나왔습니다.그리고, 다시, 원의 차선으로 돌아오려고 한 순간, 밸런스(balance)를 무너뜨린, 보와잔(Avions Voisin) 23 cv는, 크게 기운 채로, 속도를 떨어뜨리는 머지 않아, 벼랑의 가장자리의 가로수에 격렬하게 격돌, 대파해 버렸습니다.

 

이 사고로, 운전기사(chauffeur)는, 즉사해,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나루히사(naruhisa) 왕도, 이윽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한편, 후사코(fusako) 왕비와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 용무괘(goyougakari)(고귀한 사람의, 신변의 도움에 종사하는 사람)의 프랑스인 여성은, 중상을 차용분은 했지만, 기적적으로 목숨을 멈추고, 사고 현장 가까이의 마을의 병원으로 반송되고 응급 처치를 받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고를 알리는, 프랑스의 신문지(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일본에 사고의 제일보가 닿았을 때, 아사카궁(asakanomiya) 윤자(nobuko) 왕비는, 아이들과 칸사이(kansai) 방면을 여행중이었습니다.통지를 들은, 윤자(nobuko) 왕비는, 그 때, 「4월·풀(April fool)의 농담이겠지!」라고 외쳤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이윽고, 일본에서도, 사고의 상세가, 차례차례로,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윤자(nobuko) 왕비는, 사고를 당한,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과 키타시라카와노미야(kitashirakawanomiya) 후사코(fusako) 비(윤자(nobuko) 왕비 진짜의 언니(누나))의 간호 (위해)때문에, 아직, 어린 아이들을 일본에 남기고, 파리(Paris)로 여행을 떠나는 일을 결심했습니다.

 

1923년 4월 하순, 윤자(nobuko) 왕비를 태운, 일본우선 주식회사의 여객선, 거기환(hakozaki maru)은, 반년전에,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이 더듬은지 얼마 안된, 유럽(Europe) 항로를, 일로, 마르세유(Marseille)로 향했습니다.윤자(nobuko) 왕비도, 비둘기언(yasuhiko) 왕과 같게, 일본의 아이들에게 향해서, 기고하는 이전부터, 그림 엽서를 내고 있습니다.

 

1923년 6월 10일, 윤자(nobuko) 왕비는, 파리(Paris)에 도착했습니다.이 때,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은, 파리(Paris)의 병원에 전원 해, 외과의 권위인 앙리·알토 맨 의사에 의한, 당시 최신의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파리(Paris)의 병원에 입원중의, 비둘기언(yasuhiko) 왕(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한때는, 중태인, 비둘기언(yasuhiko) 왕은, 벌써 위기적인 상황을 벗어나, 침대(bed) 위에 일어나고, 회화를 할 수 있기까지, 회복하고 있었습니다.그 상태를 보고, 윤자(nobuko) 왕비도 안심했겠지요.간병에 다니는 나날의 생활의 사이에, 프랑스어와 수채화의 레슨(lesson)을 받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 때, 윤자(nobuko) 왕비에게, 수채화를 교수 하고 있던 것은, 레옹·브란쇼(Leon Blanchot)라고 말하는, 프랑스인 조각가였습니다.유소의 무렵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좋아했던 윤자(nobuko) 왕비는, 브란쇼(Blanchot)의 지도를 받아 그린 정물화등 , 많은 작품을, 프랑스 체제중에 남기고 있습니다.이 브란쇼(Blanchot)가, 수채화를 교수 하는 일이 된 자세한 경위는 모릅니다만, 양자의 교우는,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귀국까지 계속 되었다고 생각됩니다.1933년에 완성한,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저택(현재의 도쿄도 정원 미술관)의, 객실과 식당(dining room)에는, 브란쇼(Blanchot)의 손에 의한, 릴리프(relief)와 벽화 조각이 채용되고 있는 일로부터, 프랑스인 artist들이 참가한, 장식예술(Art Deco) 양식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저택의 탄생에 임하여, 실은, 브란쇼(Blanchot)가, 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아닐까 추측되고 있습니다.

 

1923년, 11월 30일.의사보다 퇴원이 허가되어 간신히, 파리(Paris)의 16구(16th arrondissement)의 자기집(파리(Paris)에서의 체재지)에 돌아온, 비둘기언(yasuhiko) 왕은, 요양과 재활훈련(rehabilitation)을 겸하고, 윤자(nobuko) 왕비와 함께, 브로뉴의 숲(Bois de Boulogne)을 산책하는 날들이 됩니다.

 

 

브로뉴의 숲(Bois de Boulogne), 안페류르(Lec Inferieur) 호반에로...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부부가, 파리(Paris)에서, 온화한 요양 생활을 보내고 있었을 무렵, 일본에서는, 9월 1일에, 간동대지진(1923년에 동경권을 덮친 거대 지진.도쿄도심부등이, 큰 피해를 받았다)가, 발생해, 도쿄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저택(본댁(main의 저택))도, 많이, 피해를 받고 있었습니다.오늘과 같이, 편리한 통신 수단이 없었던 당시에 있어서는, 부부의 불안도, 보다 , 한층, 컸기 때문에는 없을까요.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파리(Paris)에서의 일상생활은, 방에는, 항상 근처의 꽃집으로부터 들여온 생화가 장식되어 부부의 식사나 신변을 돌보는, 현지에서 고용한 사용인이, 수명 일하고 있었습니다.외출 시에는, 운전기사(chauffeur) 첨부의 자동차를 타, 가끔 , 「La Tour d"Argent」나 「Prunier」의 같은 레스토랑에서, 외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또, 멀게 떨어져 사는 아이들을 위해, 그림책이나 옷, 자전거, 악기등을 구입하고, 일본에 보내기도 하고 있습니다.


 

파리(Paris)의 사진관에서 촬영된,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초상화(portrait).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왼쪽의 사진.아사카궁(asakanomiya) 윤자(nobuko) 왕비.파리 19구(19th arrondissement)의, 붕트·쇼몬(Buttes Chaumont) 공원에서...사진은, 아사카궁(asakanomiya) 비둘기언(yasuhiko) 왕이 촬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윤자(nobuko) 왕비(사진 오른쪽)와 스기오카(sugioka) 용무괘(goyougakari)(사진왼쪽).용무괘(goyougakari)는, 고귀한 사람의, 신변의 도움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당초보다, 유럽 체재의, 중요한 목적이 되고 있던, 현지의 귀족이나 유력자와의 교류도, 정력적으로 행해졌습니다.

 

 

유제스 후작 부인 주최의, 궁정식 수렵연회에 초대된,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아래의 사진.현지 귀족의 만찬회에, 주빈으로서 초대된, 비둘기언(yasuhiko) 왕.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1925년, 4월부터 11월에 걸쳐, 파리(Paris)에서 개최된 「현대 장식미술·산업 미술 국제 박람회」(통칭 아르·데코(Art Deco) 박람회)는, 회화나 조각등의 순수 미술에 대한, 「장식미술」의 지위 향상과 대량생산·대량 소비사회를 배경으로 한, 신시대에 적당한 디자인(design)을 제창하는 장소로서 프랑스 장식미술가 협회가, 정부에 제의하고, 실현된 것이었습니다.주최국의 프랑스는, 정부를 시작해 공방등의 민간에 이를 때까지, 여러가지 전시관을 출전해, 디자인(design)이나 공예의 중심지로서의, 파리(Paris)의 지위의 확립과 산업 미술의 발전에 수반하는, 경제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일본을 포함한, 22개국에 의한, 150의 전시관이 나란히 선 회장내는, 항상 활기에 넘쳐 많은 견학자들로, 활기차 있었습니다.

 

수많은 전시 중(안)에서도, 한층 눈을 끈 것은, 당시 , 가라스(glass) 공예가로서 이미, 대활약을 하고 있던, 루네·라릭크(Rene Lalique)의 일련의 일하는 태도였습니다.그 중에서도, 회장내, 최오부의 메인 에리어(박람회의 중심지구)에 설치된, 루네·라릭크(Rene Lalique) 자신의 전시관과 높이 15 m에 이르는, 유리(glass) 제 분수탑의 전시는, 건축 관련 분야에서의, 유리(glass)의 가능성을 추구하고 있던, 루네·라릭크(Rene Lalique)의 명성을, 국제적인 것으로 했습니다.

 

아르·데코(Art Deco) 박람회.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우상의 사진은, 루네·라릭크(Rene Lalique)의, 유리(glass) 제 분수탑.아래의 사진은, 박람회 회장, 공중촬영.

 

아르·데코(Art Deco) 박람회에서, 견실한 일하는 태도를 피로하고 있던, 프랑스인 artist는, 루네·라릭크(Rene Lalique)만이 아니었습니다.박람회의 주최자인, 프랑스 장식미술가 협회의 부회장으로서 박람회의 실현에 힘을 다한, 장식미술가, 앙리·라판(Henri Rapin)입니다.앙리·라판(Henri Rapin)은, 사무국의 요직자로서 박람회의 운영에 종사하는 한편으로, 프랑스 정부가 출전한, 「프랑스 대사관」부문의 장식에도 솜씨를 발휘해, 응접 살롱(salon)이나 대식당등 , 중심이 되는 방의 내장을 담당하는 등 , 그 활약상은, 결코, 루네·라릭크(Rene Lalique)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1925년 7월 9일,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는, 아르·데코(Art Deco) 박람회의 회장을 찾아왔습니다.일본의 황족(천황의 일족(친족))으로서의, 공식의 시찰인 때문, 프랑스 체제중,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에게도, 이 때만은, 백작 부부가 아니고, 「아사카궁(asakanomiya) 동비 양전하」의 경칭이 이용되고 있습니다.그 모습은, 현지의 뉴스 영화(newsreel)나 신문지상에서도, 크게 뽑아 거론되어 오늘이라도, 그 개요를 알 수가 있습니다.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는, 프랑스 미술 국장의 안내에서, 박람회를 견학해, 최후는, 일본관(일본의 전시관)의 전부터, 자동차를 타고, 회장을 뒤로 했습니다.프랑스의, 뉴스 영화(newsreel) 회사, 고몬(Gaumont)의 어카이브(archive)(archive)에는, 이 때의 모습을 기록한 영상이, 현재도, 남아 있습니다.이 영상에 남겨진, 아사카궁(asakanomiya) 윤자(nobuko) 왕비의, 상냥한 표정은, 박람회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부부의 견학의 경로상에는, 루네·라릭크(Rene Lalique)나, 앙리·라판(HenriRapin), 그리고, 윤자(nobuko) 왕비에게, 수채화의 지도를 하고 있던, 조각가, 레옹·브란쇼(Leon Blanchot)가, 다룬 작품도, 전시되고 있었습니다.이 때의 만남이,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귀국후에 개시되는,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도쿄의 본댁(main의 저택)의 건설에 임하여,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일은, 상상에 어렵지는 않습니다.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상처가 치유되었을 무렵보다 ,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는, 유럽 각국에의 시찰 여행으로 출발했습니다.그 발자국은, 영국, 네델란드, 벨기에(Belgium),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시작해 덴마크나 노르웨이, 스웨덴등 , 북유럽 각국으로부터, 스페인, 이탈리아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이러한 여행은,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전지 요양의 일환이라고 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만, 그 이상으로, 일본의 황족((천황의 일족(친족))으로서 넓게 세계를 견문한다고 하는 일에, 보다 중점이 놓여져 있었습니다.그 행정중에, 천황의 명의(대리)로서 네델란드의, 위헤르미나(Wilhelmina) 여왕, 벨기에(Belgium)의, 알베르 일세(Albert I) 국왕외국가원수와의 회담을 실시하는 등 , 황족((천황의 일족(친족)) 본래의 역할도, 과연 있습니다.


 

좌상의 사진.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애차, 보와잔(Avions Voisin) 24hp.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사진 이하 2매.자동차 여행중의,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네델란드의, 위헤르미나(Wilhelmina) 여왕과 함께...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운전기사(chauffeur)의 옆에서, 낮잠 하는, 용무괘(goyougakari)의 소우마맹윤(souma taketane) 자작과 뒷자리의, 윤자(nobuko) 왕비.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와 함께, 그랜드 투어(Grand Tour)를 체험한, 용무괘(goyougakari)(고귀한 사람의, 신변의 도움에 종사하는 사람)의 사람들은,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에 대신해, 금전의 출납 관리나 일정 조정, 가끔 , 통역도 해내는 비서의 같은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비둘기언(yasuhiko) 왕에게는, 원, 학습원(gakusyuin)의 영어 교사의, 이나바(inaba) 용무괘(goyougakari)와 첨부 무관 후지오카만장(fujioka manzo) 중령이 수행해, 윤자(nobuko) 왕비에게는, 미야오카(miyaoka) 용무괘(goyougakari)와 스기오카(sugioka) 용무괘(goyougakari)가 동행, 파리(Paris) 도착 후에, 프랑스인 여성의 용무괘(goyougakari)가, 현지 고용되었습니다.게다가 윤자(nobuko) 왕비가, 유럽에 건널 때, 비둘기언(yasuhiko) 왕의, 용무괘(goyougakari)로서 궁내성(천황 및 황족(천황의 일족(친족))의 일상생활, 교육, 재산관리등 , 모든 측면을 지탱하는 관청.wiki보다...)(으)로부터 파견된, 귀족의, 소우마맹윤(souma taketane) 자작이, 더해졌습니다.소우마맹윤(soumataketane) 자작은, 도쿄 제국대학(도쿄대학의 전신의 대학) 이학부 식물학과를 졸업 후, 궁내성에 출근했습니다(근무하러 나왔습니다).일본에 귀국후는, 식물학의 지식을 살리고, 골프장(golf course)에 불가결한, 상록잔디의 연구에 몰두해, 일본의 기후 풍토에서도 자라는, 양 잔디(서양 잔디)를 발견한 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용무괘(goyougakari)의, 소우마맹윤(souma taketane) 자작과 소우마맹윤(souma taketane) 자작의 애차, 피아트(Fiat) 20p.남 프랑스로부터 파리(Paris)로 향하는 도중에서...전람회(exhibition)의 팜플렛(booklet)으로부터...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는, 1925년 10월, 파리(Paris)를 뒤로 해, 미국 경유로, 일본에 귀국했습니다.처음으로 보는, 대국 미국의 모습은, 유럽 각국을 여행한 부부에 있어서도, 매우 신선하게 비친 같습니다.나이아가라의 폭포(Niagara Falls)를 방문한, 윤자(nobuko) 왕비는, 조명에 비추어진, 밤의 나이아가라의 폭포(Niagara Falls)를 보면서, 「부자의 나라가 하는 일은, 또 각별합니다」라고, 그 광경에 압도 되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부터, 동양 기선 주식회사의 여객선, 천양환(tenyo maru)(13,500톤)에 승선한,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는, 1925년 12월 중순에, 요코하마항으로 입항해, 이 순간,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도, 마지막을 고했습니다.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가, 남긴, 가장 큰 유품은, 현재, 도쿄도 정원 미술관이 되고 있는,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저택입니다.

 

부부의 귀국후, 1931년경부터 개시된,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새로운 도쿄의 본댁(main의 저택)의 신축 공사는, 황실(천황 및 황족(천황의 일족(친족)) 관계의 건축을 담당하고 있던 궁내성 타쿠미 기숙사의, 건축가, 곤도오 카나메길(gondou youkichi)이 중심이 되어서 진행되었습니다.건물을 특징지우는 내외장에는, 당시 최첨단의 장식 양식인, 아르·데코(Art Deco)가 채용되고 있습니다.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사카궁(asakanomiya) 부부의, 강한 희망이 반영된 일이었습니다.

 

다음 번의 투고에서는, 이, 아사카궁(asakanomiya) 가의, 아르·데코(Art Deco) 양식의, 도쿄의 새로운 저택(1933년 완성)(현재는, 도쿄도 정원 미술관의 건물로서 사용되고 있다)를, 봐 가고 싶습니다.

 

 

백금(shirokane) 산책&음식 3에 계속 된다...

 

 

 

사진 이하 6매는, 덤입니다만, 판차이 방지용.

 

사진 이하 4매.지난 달(11월)의 제3주의 화요일, 일의 용무로, 백금(shirokane) area를 방문했을 때에, 프랑스 요리를 중심으로 한 서양 요리를 내는 cafe로 먹은 점심 식사.이 cafe(최근 개장된 같습니다)는, 꽤 눈에 띄는 장소에 있습니다만, 최근, 처음으로 이용했던(이 때의 전의 주에, 일의 용무로, 백금(shirokane) area를 방문했을 때에, 처음으로 이용했습니다.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로 점심 식사를 배달시켰을 때는, 스페인풍오믈렛(omeltte)(전채), 따뜻한 호박의 스프(soup), 돗돔의 포와레(poele) 범립 더해(main 요리), 디저트(자우의 무스(mousse), 크리무브류레(creambrulee), 닥크워즈(dacquoise)), 빵을 먹었습니다).이 cafe는, 백금(shirokane) area으로서는(백금(shirokane) area는, 고급 프랑스 요리 레스토랑이 많은 이미지가 있습니다), 적당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어 나무(라고 말하는지, 백금(shirokane) area라고 하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아도, 내용에 비해, 싼 가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요리의 맛도, 전반적으로, 맛있다고 생각했습니다.이 cafe에서는, 서비스(service) 료(서비스(service) 요금)를 놓치지 않았습니다만, 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처음으로 이용했을 때는, 서비스(service)의 좋은 점도, 인상에 남았습니다.일본에서는, 팁(tip)의 습관이 없는 대신에, 비교적 고급 레스토랑·식당에서는, (서비스(service)가 좋은 대신에), 서비스(service) 요금(통상, 식대비의 10%)을 받는 가게가 많습니다만, 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의, 이 cafe의 서비스(service)의 수준은, 충분히, 서비스(service) 료를 받아도 좋은 수준이었습니다(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의, 이 cafe의 서비스(service)의 수준보다 뒤떨어지는 서비스(service)의 수준으로, 서비스(service) 료를?`니레스토랑도 상당히 있습니다(어?, 이 서비스(service)로, 서비스(service) 료를 받아?이렇게 말하는 레스토랑도 상당히 있다...)).이 cafe에 좋은 인상을 가진 한편(따라서, 이 다음의 주에, 일의 용무로, 백금(shirokane) area를 방문했을 때(이 때), 또, 이 cafe를 점심 식사에 이용한), 지가의 비싼 장소에서(따라서 가게의 유지비가 걸린다), 이 서비스(service)의 수준으로, 이 가격으로 과연 경영을 해 나갈 수 있는지 걱정으로 될 정도였습니다.그렇지만, 이 때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는, 반대로, (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와 비교한) 서비스(service)의 수준 낮음에 놀랐던(뭐, 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는, 서비스(service) 료를 받지 않는 비교적, 서비스(service)의 수준이, 너무나 좋았다고 말하는 것도 있습니다만...).종업원도, 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에 있던 사람은, 한 명도 없었던 느낌이고, 도대체, 어떻게 해 버렸어일까하고 하는 느낌입니다.뭐, 이 cafe는, 서비스(service)의 수준에 얼룩짐이 있는(서비스(service)의 수준의 안정성이 부족하다) 점이, 조금 신경이 쓰였습니다만, 전 술대로, 백금(shirokane) area으로서는, 적당한 가격으로 식사를 할 수 있어 나무(백금(shirokane) area라고 하는 장소를 고려하지 않아도, 가격에 비한 내용의 만족감은 높다), 요리의 맛도, 전반적으로, 맛있고, 점내의 분위기도 좋기 때문에, 향후, 일의 용무등으로, 백금(shirokane) area를 방문할 때에, 자주(잘) 이용하는 가게가 될 것 같습니다.

 

 

사진 이하 4매.지난 달(11월)의 제3주의 화요일, 일의 용무로, 백금(shirokane) area를 방문했을 때에, 이 cafe로 먹은 점심 식사.이것에 팬이 뒤따릅니다.

 

전채.무의 블랭크 매니저(blancmange).

 

 

 

 

호박의 포타주(potage).이 때의 전의 주에, 이 cafe를 이용했을 때에 나온, 따뜻한 호박의 스프(soup)와 닮아 있습니다만, 담음이 달라, 먹을때의 느낌도,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메인(main) 요리.노르웨이산의 연어(salmon)의 그리에(구이), 라타트유(ratatouille) 소스(sauce).

 

 

 

디저트.사과의 젤리(jelly), 초콜릿계의 케이크, 닥크워즈(dacquoise).

 

 

 

 

전에 kj로 업(upload) 한 사진입니다만, 생각보다는 최근 폐점해 버린(폐점한 것은, 생각보다는 최근(이 가게가 폐점하는 조금 전), 이 가게의, 곧 근처에, 오픈(open)한, 케이크(cake) 점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나의 거리의 케이크(cake)·서양 과자점(본점은, 미나토(minato) 구의 백금(shirokane) area에 있다.원래, 푸딩(cream caramel) 전문점이었다)의, 푸딩(cream caramel)(앞)와 컵에 들어간, 부드러운 치즈 케이크(cheesecake)의 같은 느낌의 디저트(dessert)(안쪽).이 가게는, 나의 거리에서는, 철퇴했습니다만( 나의 거리의 지점은 폐점했습니다만), 백금(shirokane) area에 있는 본점은, 아직 영업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도, 전에, kj로 업(upload) 한 사진입니다만, 동케이크(cake)·서양 과자점의 치즈 케이크(cheesecake).

 

 

 


白金(shirokane)散歩&食べ物2

 

 

投稿が、かなり遅れてしまいましたが、1月の前半、個人的に休みだった日に、一人で、東京都心部の白金(shirokane)areaにある、東京都庭園美術館に、企画展示(美術館が、テーマを決めて、一時的に、行う展示)を見に行った際、ついでに、白金(shirokane)areaの住宅地を、ぶらぶらと散歩してきた時の物です。

 

以下、白金(shirokane)散歩&食べ物1からの続き。。。

 

東京都心部の高級住宅地・商業地の一つで有る、白金(shirokane)エリア(area)に有る、東京都庭園美術館は、地方自治体(東京都)が運営する、企画展(exhibition)を中心とした、公営の美術館です。東京都庭園美術館は、元々、宮家の一つで有った、朝香宮(asakanomiya)家の邸宅だったものです。宮家とは、皇族(天皇の一族(親族))の内、天皇家から独立した生計を営み、且つ、天皇から称号(宮号)を賜り、代々、皇族(天皇の一族)の身分の保持を許された家(家族)で(wiki等を参考にしました)、現在は、宮家は、5つしか存在しませんが、第2次世界大戦が終った直後には、日本には、朝香宮(asakanomiya)家を含む、14の宮家が存在していました。

 

 

かつての朝香宮(asakanomiya)家の邸宅を活用した、東京都庭園美術館(上の写真)は、敷地面積、約35,360平方m(約10,700坪)と、ゆったりとした敷地を有しています(東京都庭園美術館の建物については、次回の投稿で紹介します)。ちなみに、朝香宮(asakanomiya)家は、第二次世界大戦前、この東京の邸宅(本邸(mainの邸宅)。現在は、東京都庭園美術館となっている)の他に、私が知る限り、軽井沢(karuizawa。東京圏周辺を代表する、避暑別荘地・避暑保養地)と熱海(atami。東京に近い、規模の大きな温泉保養地。第二次世界大戦後は、東京から1泊2日で気軽に行ける大衆的な温泉保養地として、急速に開発されたが、昔(特に第二次世界大戦前)は、(中流階級から庶民の夫婦の)新婚旅行のメッカ(mecca)として、又、富裕層の別荘地として、有名であった)に、別荘を保有していました。かつての朝香宮(asakanomiya)家の軽井沢(karuizawa)の別荘(敷地面積約36,000平方m(約10,900坪))は、第二次世界大戦後、resortホテル(1964年からは、一般市民の利用を受け付けない、皇室(天皇家)専用のホテルとなった)となり、熱海(atami)の別荘は、第二次世界大戦後、宮家の地位と、東京の本邸(mainの邸宅)(現在の東京都庭園美術館)を失った、朝香宮(asakanomiya)家の本邸(mainの邸宅)となりました(第二次世界大戦後、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熱海(atami)で、趣味のゴルフ(golf)三昧の生活を送りました。wikiより)。

 

かつての、朝香宮(asakanomiya)家の邸宅(東京の本邸(mainの邸宅))を活用した、東京都庭園美術館は、通常は、美術品・工芸品の展覧会(exhibition)を行っているのですが、この時は、(異色の展覧会(exhibition)である)、「朝香宮(asakanomiya)のグランドツアー(Grand Tour)」と言う展覧会(exhibition)を行っていました。

 

 

展覧会(exhibition)のチケット(ticket)。

 

 

以下、この展覧会(exhibition)の概要については、ほぼ、美術館のsiteの文を引用しました。

 

 

この展覧会(exhibition)は、朝香宮(asakanomiya)夫妻のヨーロッパ滞在とアール・デコ(Art Deco)博覧会との出会い、日本に帰国後、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本邸(mainの邸宅)(現在の、東京都庭園美術館)建設に至るまでの逸話などを、美術館所蔵作品のほか、朝香宮(asakanomiya)家の邸宅の調度品や、朝香宮(asakanomiya)家ゆかりの品々、写真類等、新たに公開する資料を加えて紹介する展覧会(exhibition)です。

 

ちなみに、朝香宮(asakanomiya)夫妻(朝香宮(asakanomiya)鳩彦(ysuahiko)王・朝香宮(asakanomiya)允子(nobuko)妃)は、昭和(showa)天皇(Hirohito天皇。先代(第124代)の日本の天皇)の、それぞれ、義理の叔父一人と、叔母の一人に当たります。

 

 

以下、この展覧会(exhibition)に関する説明は、上の、この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の文を、要約した物です。

 

 

かつて、イギリスの貴族の息子や娘達は、学業(勉強)の総仕上げとして、数ヶ月から数年に及ぶ、海外への大旅行「グランドツアー(Grand Tour)」を経験しました。多くの場合、その目的地は、当時の文化的な先進国であった、フランスや、イタリアであり、身の回りの世話をする、御用掛(goyougakari)や家庭教師を同行しての、大掛かりな物でした。彼等は、この旅行で、異文化や芸術に触れると共に、現地の上流階級との交流を通じて、一人前のイギリス紳士・淑女へと成長していったのです。

 

1922年10月30日、当時35歳の朝香宮(asakanomiya)鳩彦(ysuahiko)王は、軍事研究の名目で、家族を日本に残し、ヨーロッパへと旅立ちました。明治(meiji)期(19世紀末から1910年代初め)以来、「国家有用(日本の経済的・文化的な発展に役立つ)」となる技術や新知識の吸収を目的とした、皇族(天皇の一族)や貴族の、渡欧(ヨーロッパに渡る事)が、慣例化していまし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の、ヨーロッパ滞在は、名目上は、軍事研究の為とされましたが、実際には、皇族(天皇の一族)の一員として、見聞を広める事と、現地の王族や貴族との文化的交流を目的とした物でした。

 

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特別列車で東京を出発し、九州(kyusyu)北部の門司(moji)港から、日本郵船株式会社の客船、伏見丸(fushimi maru)(約11,000トン)に乗船、フランスのマルセイユ(Marseille)に向けての、遥かなる旅に出発しまし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初めて目にする寄港地ごとに、その感想を記した絵葉書を日本の家族へ送りました。

 

12月中旬、マルセイユ(Marseille)に到着し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次いで、鉄道で、パリ(Paris)に入りました。当時、パリ(Paris)には、既に、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の従兄弟夫妻である、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家(宮家)の、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と、その妻、房子(fusako)妃、ま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の、弟(実弟)である、東久邇宮(higashikuninomiya)家(宮家)の、東久邇宮(higashikuninomiya)稔彦(naruhiko)王が、暮らしていました。彼らは、貴族ではなく、皇族(天皇の一族)でしたが、敢えて、貴族の称号である、「伯爵」を名乗っていました。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は、北(kita)伯爵、東久邇宮(higashikuninomiya)稔彦(naruhiko)王は、東(higashi)伯爵です。これは、皇族(天皇の一族)の海外留学時の慣例として広く行われていた手法で、相手国に対して、皇族(天皇の一族)訪問の正式な対応を求めずに済み、現地での警護や外交儀礼も大幅に簡略化されると言う利点がありました。何より、皇族(天皇の一族)本人にとっては、堅苦しい身分から開放され、旅行中は、一個人として柔軟なスケジュール(schedule)が組めると言う点は魅力であり、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も、この慣例に従って、ヨーロッパ滞在中は、「朝(asa)伯爵」を仮の名前として、使用していました。

 

 

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パリ(Paris)の16区(16th arrondissement)の、当時、北(kita)伯爵(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夫妻の暮らしていた近くの、アパルトマン(appartement)の最上階を借り受け、パリ(Paris)での住まいとしました。

 

1923年4月1日、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夫妻から、driveに誘われました。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と、その妻、房子(fusako)妃、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御用掛(goyougakari)(高貴な者の、身の回りの世話に従事する者)のフランス人女性を乗せた、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所有の、ヴォワザン(Avions Voisin)23cvは、フランス人の、御付運転手(専属driver、chauffeur)の運転で、ノルマンディー(Normandy)地方へと向かう道を快適に走り、途中、エヴルー(Evreux)に立ち寄って、昼食を済ませました。

 

昼食後は、御付運転手(chauffeur)に代わって、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が運転を行いました(driveが好きな、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は、自ら自動車を運転する事も、珍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が運転する、排気量、約4,000ccの、ヴォワザン(Avions Voisin)23cv型リムジン(limousine)は、海沿いの保養地、ドーヴィル(Deauville)へと続く、国道を、矢の様な速さで、疾駆続けます。隣に座っていた、運転手(chauffeur)が、速度計を覗きこんだ時、既に、速度は、100kmを超えていたと言う事です。

 

一行を乗せた、ヴォワザン(Avions Voisin)23cvが、パリ(Paris)から、北西に100kmあまり離れた場所を走っている時でした。並木が続く未舗装の道の前方に、やがて一台の先行車が見え始め、その姿が、たちまち大きくなってきました。この自動車を追い越して、先を急ごうとしたのでしょう。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は、対向車線へと、ハンドル(steering wheel)を切り、さらに、アクセル(accelerator)を踏み込んで、先行車の前方に出ました。そして、再び、元の車線に戻ろうとした瞬間、バランス(balance)を崩した、ヴォワザン(Avions Voisin)23cvは、大きく傾いたまま、速度を落とす間もなく、路肩の並木に激しく激突、大破してしまいました。

 

この事故で、運転手(chauffeur)は、即死し、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成久(naruhisa)王も、間も無く、その場で、息を引き取りました。一方、房子(fusako)妃と、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御用掛(goyougakari)(高貴な者の、身の回りの世話に従事する者)のフランス人女性は、重傷を負いはしたものの、奇跡的に一命を取り留めて、事故現場近くの町の病院へと搬送され、応急処置を受ける事となりました。

 

 

事故を報じる、フランスの新聞紙(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日本に事故の第一報が届いた時、朝香宮(asakanomiya)允子(nobuko)妃は、子供達と、関西(kansai)方面を旅行中でした。知らせを聞いた、允子(nobuko)妃は、その時、「エイプリル・フール(April fool)の冗談でしょ!」と叫んだと伝えられています。やがて、日本でも、事故の詳細が、次々と、明らかになり始めました。

 

允子(nobuko)妃は、事故に遭っ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と北白川宮(kitashirakawanomiya)房子(fusako)妃(允子(nobuko)妃の実の姉)の看護の為、まだ、幼い子供達を日本に残して、パリ(Paris)へと旅立つ事を決心しました。

 

1923年4月下旬、允子(nobuko)妃を乗せた、日本郵船株式会社の客船、筥埼丸(hakozaki maru)は、半年前に、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がたどったばかりの、欧州(Europe)航路を、一路、マルセイユ(Marseille)へと向かいました。允子(nobuko)妃も、鳩彦(yasuhiko)王と同じ様に、日本の子供達に向けて、寄稿する先々から、絵葉書を出しています。

 

1923年6月10日、允子(nobuko)妃は、パリ(Paris)に到着しました。この時、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は、パリ(Paris)の病院に転院し、外科の権威であったアンリ・アルトマン医師による、当時最新の治療を受けていました。

 

パリ(Paris)の病院に入院中の、鳩彦(yasuhiko)王(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一時は、重体であった、鳩彦(yasuhiko)王は、すでに危機的な状況を脱し、ベッド(bed)の上に起き上がって、会話が出来るまでに、回復していました。その様子を見て、允子(nobuko)妃も安心したのでしょう。看病に通う日々の生活の合間に、フランス語と、水彩画のレッスン(lesson)を受ける事になりました。

 

この時、允子(nobuko)妃に、水彩画を教授していたのは、レオン・ブランショ(Leon Blanchot)と言う、フランス人彫刻家でした。幼少の頃より絵を描く事が好きだった允子(nobuko)妃は、ブランショ(Blanchot)の指導を受けて描いた静物画等、多くの作品を、フランス滞在中に残しています。このブランショ(Blanchot)が、水彩画を教授する事となった詳しい経緯は分かりませんが、両者の交友は、朝香宮(asakanomiya)夫妻の帰国まで続いたと思われます。1933年に完成した、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邸宅(現在の東京都庭園美術館)の、広間と食堂(dining room)には、ブランショ(Blanchot)の手による、レリーフ(relief)と壁画彫刻が採用されている事から、フランス人artist達が参加した、アールデコ(Art Deco)様式の、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邸宅の誕生に際して、実は、ブランショ(Blanchot)が、大変重要な役割を担ったのではないかと推測されています。

 

1923年、11月30日。医師より退院を許可され、ようやく、パリ(Paris)の16区(16th arrondissement)の自邸(パリ(Paris)での滞在先)へ戻った、鳩彦(yasuhiko)王は、療養とリハビリ(rehabilitation)を兼ねて、允子(nobuko)妃と共に、ブローニュの森(Bois de Boulogne)を散策する日々となります。

 

 

ブローニュの森(Bois de Boulogne)、アンフェリュール(Lec Inferieur)湖畔にで。。。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夫婦が、パリ(Paris)で、穏やかな療養生活を送っていた頃、日本では、9月1日に、関東大震災(1923年に東京圏を襲った巨大地震。東京都心部等が、大きな被害を受けた)が、発生し、東京の、朝香宮(asakanomiya)家の邸宅(本邸(mainの邸宅))も、少なからず、被害を受けていました。今日の様に、便利な通信手段のなかった当時にあっては、夫妻の不安も、より、一層、大きか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朝香宮(asakanomiya)夫妻のパリ(Paris)での日常生活は、部屋には、常に近所の花屋から取り寄せた生花が飾られ、夫婦の食事や身の回りの世話をする、現地で雇った使用人が、数名働いていました。外出の際には、運転手(chauffeur)付きの自動車に乗り、時には、「La Tour d"Argent」や「Prunier」の様なレストランで、外食する事もありました。また、遠く離れて暮らす子供達の為に、絵本や服、自転車、楽器等を購入して、日本に送ったりもしています。


 

パリ(Paris)の写真館で撮影された、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のポートレート(portrait)。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左の写真。朝香宮(asakanomiya)允子(nobuko)妃。パリ19区(19th arrondissement)の、ビュット・ショーモン(Buttes Chaumont)公園にて。。。写真は、朝香宮(asakanomiya)鳩彦(yasuhiko)王が撮影した物と思われます。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允子(nobuko)妃(写真右)と、杉岡(sugioka)御用掛(goyougakari)(写真左)。御用掛(goyougakari)は、高貴な者の、身の回りの世話に従事する者です。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当初より、ヨーロッパ滞在の、重要な目的となっていた、現地の貴族や有力者との交流も、精力的に行われました。

 

 

ユゼス侯爵夫人主催の、宮廷式狩猟宴に招かれた、朝香宮(asakanomiya)夫妻。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下の写真。現地貴族の晩餐会に、主賓として招かれた、鳩彦(yasuhiko)王。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1925年、4月から11月にかけて、パリ(Paris)で開催された「現代装飾美術・産業美術国際博覧会」(通称アール・デコ(Art Deco)博覧会)は、絵画や彫刻等の純粋美術に対する、「装飾美術」の地位向上と、大量生産・大量消費社会を背景とした、新時代に相応しいデザイン(design)を提唱する場として、フランス装飾美術家協会が、政府に働きかけて、実現した物でした。主催国のフランスは、政府を始め、工房等の民間に至るまで、様々な展示館を出展し、デザイン(design)や工芸の中心地としての、パリ(Paris)の地位の確立と、産業美術の発展に伴う、経済の活性化を目指していました。日本を含む、22カ国による、150もの展示館が立ち並んだ会場内は、常に活気にあふれ、多くの見学者達で、賑わっていました。

 

数ある展示の中でも、ひときわ目を引いたのは、当時、ガラス(glass)工芸家として、既に、大活躍をしていた、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の一連の仕事ぶりでした。中でも、会場内、最奥部のメインエリア(博覧会の中心地区)に設けられた、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自身の展示館と、高さ15mに及ぶ、ガラス(glass)製噴水塔の展示は、建築関連分野での、ガラス(glass)の可能性を追求していた、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の名声を、国際的なものとしました。

 

アール・デコ(Art Deco)博覧会。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右上の写真は、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の、ガラス(glass)製噴水塔。下の写真は、博覧会会場、空撮。

 

アール・デコ(Art Deco)博覧会で、堅実な仕事ぶりを披露していた、フランス人artistは、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博覧会の主催者である、フランス装飾美術家協会の副会長として、博覧会の実現に力を尽くした、装飾美術家、アンリ・ラパン(Henri Rapin)です。アンリ・ラパン(Henri Rapin)は、事務局の要職者として、博覧会の運営に携わる一方で、フランス政府が出展した、「フランス大使館」部門の装飾にも腕を振るい、応接サロン(salon)や大食堂等、中心となる部屋の内装を担当する等、その活躍ぶりは、決して、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にも劣らないものでした。

 

1925年7月9日、朝香宮(asakanomiya)夫妻は、アール・デコ(Art Deco)博覧会の会場を訪れました。日本の皇族(天皇の一族(親族))としての、公式の視察であった為、フランス滞在中、朝香宮(asakanomiya)夫妻にも、この時ばかりは、伯爵夫妻ではなく、「朝香宮(asakanomiya)同妃両殿下」の敬称が用いられています。その様子は、現地のニュース映画(newsreel)や新聞紙上でも、大きく採り上げられ、今日でも、その概要を知る事が出来ます。朝香宮(asakanomiya)夫妻は、フランス美術局長の案内で、博覧会を見学し、最後は、日本館(日本の展示館)の前から、自動車に乗って、会場を後にしました。フランスの、ニュース映画(newsreel)会社、ゴーモン(Gaumont)のアーカイブ(archive)には、この時の様子を記録した映像が、現在も、残されています。この映像に残された、朝香宮(asakanomiya)允子(nobuko)妃の、にこやかな表情は、博覧会が、いかに魅力的であったかを物語る様です。夫妻の見学の経路上には、ルネ・ラリック(Rene Lalique)や、アンリ・ラパン(Henri Rapin)、そして、允子(nobuko)妃に、水彩画の指導をしていた、彫刻家、レオン・ブランショ(Leon Blanchot)が、手がけた作品も、展示されていました。この時の出会いが、朝香宮(asakanomiya)夫妻の帰国後に開始される、アール・デコ(Art Deco)様式の、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東京の本邸(mainの邸宅)の建設に際して、大きな影響を与えたであろう事は、想像に難くありません。

 

鳩彦(yasuhiko)王の傷が癒えた頃より、朝香宮(asakanomiya)夫妻は、ヨーロッパ各国への視察旅行へと出発しました。その足跡は、イギリス、オランダ、ベルギー(Belgium)、ドイツ、オーストリア、ハンガリーを始め、デンマークやノルウェー、スウェーデン等、北欧各国から、スペイン、イタリアにまで、及んでいます。これらの旅行は、鳩彦(yasuhiko)王の転地療養の一環と言う意味合いがありましたが、それ以上に、日本の皇族((天皇の一族(親族))として、広く世界を見聞するという事に、より重きが置かれていました。その行程中に、天皇の名代(代理)として、オランダの、ウィヘルミナ(Wilhelmina)女王、ベルギー(Belgium)の、アルベール一世(Albert I)国王ら国家元首との会談を行う等、皇族((天皇の一族(親族))本来の役割も、果たしています。


 

左上の写真。朝香宮(asakanomiya)夫妻の愛車、ヴォワザン(Avions Voisin)24hp。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写真以下2枚。自動車旅行中の、朝香宮(asakanomiya)夫妻。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オランダの、ウィヘルミナ(Wilhelmina)女王と共に。。。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運転手(chauffeur)の横で、午睡する、御用掛(goyougakari)の相馬孟胤(souma taketane)子爵と、後席の、允子(nobuko)妃。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朝香宮(asakanomiya)夫妻と共に、グランドツアー(Grand Tour)を体験した、御用掛(goyougakari)(高貴な者の、身の回りの世話に従事する者)の人々は、朝香宮(asakanomiya)夫妻に代わり、金銭の出納管理や日程調整、時には、通訳もこなす秘書の様な役割も担っていました。鳩彦(yasuhiko)王には、元、学習院(gakusyuin)の英語教師の、稲葉(inaba)御用掛(goyougakari)と御付武官の藤岡萬蔵(fujioka manzo)中佐が随行し、允子(nobuko)妃には、宮岡(miyaoka)御用掛(goyougakari)と、杉岡(sugioka)御用掛(goyougakari)が同行、パリ(Paris)到着後に、フランス人女性の御用掛(goyougakari)が、現地雇用されました。さらに、允子(nobuko)妃が、ヨーロッパに渡る時、鳩彦(yasuhiko)王の、御用掛(goyougakari)として、宮内省(天皇および皇族(天皇の一族(親族))の日常生活、教育、財産管理等、あらゆる側面を支える官庁。wikiより。。。)から派遣された、貴族の、相馬孟胤(souma taketane)子爵が、加わりました。相馬孟胤(souma taketane)子爵は、東京帝国大学(東京大学の前身の大学)理学部植物学科を卒業後、宮内省に出仕しました(勤めに出ました)。日本に帰国後は、植物学の知識を活かして、ゴルフ場(golf course)に不可欠な、常緑芝の研究に没頭し、日本の気候風土でも育つ、洋芝(西洋芝)を発見した事で知られています。

 

御用掛(goyougakari)の、相馬孟胤(souma taketane)子爵と、相馬孟胤(souma taketane)子爵の愛車、フィアット(Fiat)20p。南フランスからパリ(Paris)に向かう途中にて。。。展覧会(exhibition)のパンフレット(booklet)から。。。

 

 

朝香宮(asakanomiya)夫妻は、1925年10月、パリ(Paris)を後にし、アメリカ経由で、日本に帰国しました。初めて目にする、大国アメリカの姿は、ヨーロッパ各国を旅した夫妻にとっても、たいへん新鮮に映った様です。ナイアガラの滝(Niagara Falls)を訪れた、允子(nobuko)妃は、照明に照らされた、夜のナイアガラの滝(Niagara Falls)を見ながら、「お金持ちの国のする事は、また格別です」と、その光景に圧倒されています。

 

サンフランシスコ(San Francisco)から、東洋汽船株式会社の客船、天洋丸(tenyo maru)(13,500トン)に乗船した、朝香宮(asakanomiya)夫妻は、1925年12月中旬に、横浜港へと入港し、この瞬間、朝香宮(asakanomiya)夫妻の、グランドツアー(Grand Tour)も、終わりを告げました。

 

 

朝香宮(asakanomiya)夫妻が、残した、最も大きな遺品は、現在、東京都庭園美術館となっている、アール・デコ(Art Deco)様式の、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邸宅です。

 

夫妻の帰国後、1931年頃より開始された、朝香宮(asakanomiya)家の新しい東京の本邸(mainの邸宅)の新築工事は、皇室(天皇および皇族(天皇の一族(親族))関係の建築を担当していた宮内省内匠寮の、建築家、権藤 要吉(gondou youkichi)が中心となって進められました。建物を特徴付ける内外装には、当時最先端の装飾様式であった、アール・デコ(Art Deco)が採用されています。これは、言うまでもなく、朝香宮(asakanomiya)夫妻の、強い希望が反映されての事でした。

 

次回の投稿では、この、朝香宮(asakanomiya)家の、アール・デコ(Art Deco)様式の、東京の新しい邸宅(1933年完成)(現在は、東京都庭園美術館の建物として使われている)を、見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

 

 

白金(shirokane)散歩&食べ物3へ続く。。。

 

 

 

写真以下6枚は、おまけですが、板違い防止用。

 

写真以下4枚。先月(11月)の第三週の火曜日、仕事の用事で、白金(shirokane)areaを訪れた際に、フランス料理を中心とした西洋料理を出すcafeで食べた昼食。このcafe(最近改装された様です)は、かなり目立つ場所にあるのですが、最近、初めて利用しました(この時の前の週に、仕事の用事で、白金(shirokane)areaを訪れた際に、初めて利用しました。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で昼食を取った際は、スペイン風オムレツ(omeltte)(前菜)、暖かい南瓜のスープ(soup)、目鯛のポワレ(poele)帆立添え(main料理)、デザート(紫芋のムース(mousse)、クリームブリュレ(cream brulee)、ダックワーズ(dacquoise))、パンを食べました)。このcafeは、白金(shirokane)areaにしては(白金(shirokane)areaは、高級フランス料理レストランが多いイメージがあります)、手頃な値段で食事が出来き(と言うか、白金(shirokane)areaと言う場所を考慮しなくても、内容に比べて、安い値段だと思います)、料理の味も、全般的に、美味しいと思いました。このcafeでは、サービス(service)料(サービス(service)料金)を取られなかったのですが、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初めて利用した時は、サービス(service)の良さも、印象に残りました。日本では、チップ(tip)の習慣が無い代わりに、比較的高級なレストラン・食堂では、(サービス(service)が良い代わりに)、サービス(service)料金(通常、飲食代金の10%)を取る店が多いのですが、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の、このcafeの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は、十分に、サービス(service)料を取っても良い水準でした(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の、このcafeのサービス(service)の水準よりも劣る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で、サービス(service)料をとるレストランも結構あります(あれ?、このサービス(service)で、サービス(service)料を取るの?と言うレストランも結構ある。。。))。このcafeに良い印象を持った一方(したがって、この次の週に、仕事の用事で、白金(shirokane)areaを訪れた際(この時)、また、このcafeを昼食で利用した)、地価の高い場所で(したがって店の維持費がかかる)、この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で、この値段で果たして経営をやっていけるのかと心配になる程でした。しかしながら、この時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は、逆に、(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と比べた)サービス(service)の水準低さに驚きました(まあ、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は、サービス(service)料を取らない割に、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が、あまりに良かったと言うのもありますが。。。)。従業員も、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にいた人は、一人もいなかった感じですし、いったい、どうしちゃったのかと言う感じです。まあ、このcafeは、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にムラがある(サービス(service)の水準の安定性に欠ける)点が、ちょっと気になりましたが、前述の通り、白金(shirokane)areaにしては、手頃な値段で食事が出来き(白金(shirokane)areaと言う場所を考慮しなくても、値段に比べた内容の満足感は高い)、料理の味も、全般的に、美味しく、店内の雰囲気も良いので、今後、仕事の用事等で、白金(shirokane)areaを訪れる際に、よく利用する店になりそうです。

 

 

写真以下4枚。先月(11月)の第三週の火曜日、仕事の用事で、白金(shirokane)areaを訪れた際に、このcafeで食べた昼食。これにパンが付きます。

 

前菜。蕪のブラマンジェ(blancmange)。

 

 

 

 

南瓜のポタージュ(potage)。この時の前の週に、このcafeを利用した時に出た、暖かい南瓜のスープ(soup)と似ていますが、盛り付けが異なり、食感も、少し異なる感じがしました。

 

 

 

メイン(main)料理。ノルウェー産のサーモン(salmon)のグリエ(焼き物)、ラタトゥユ(ratatouille)ソース(sauce)。

 

 

 

デザート。林檎のゼリー(jelly)、チョコレート系のケーキ、ダックワーズ(dacquoise)。

 

 

 

 

前にkjでアップ(upload)した写真ですが、割と最近閉店してしまった(閉店したのは、割と最近(この店が閉店する少し前)、この店の、すぐ近くに、オープン(open)した、ケーキ(cake)店の影響も、ある程度ある様です)、私の街のケーキ(cake)・西洋菓子店(本店は、港(minato)区の白金(shirokane)areaに有る。元々、プリン(cream caramel)専門店だった)の、プリン(cream caramel)(手前)と、カップに入った、柔らかいチーズケーキ(cheesecake)の様な感じのデザート(dessert)(奥)。この店は、私の街からは、撤退しましたが(私の街の支店は閉店しましたが)、白金(shirokane)areaに有る本店は、まだ営業を続けている様です。

 

 

これも、前に、kjでアップ(upload)した写真ですが、同ケーキ(cake)・西洋菓子店のチーズケーキ(cheesec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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