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한국인 의병(義兵) 활동에 대해 한국이 날조했다고 떠들고 있는 일본인이 있어 반론 자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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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부터 일제강점기 까지 한국에서 일본인이 운영했던 사진관에서 한국의 여러 인물이나
풍경 사진을 엽서로 제작해 일본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 배포하고 있었다
이 사진은 한국인 집단 처형(處刑) 사진이다
이 엽서 아래에 <한국풍속 ,絞罪處分>이라고 쓰고 1909년 8월 8일 날짜로 通信日附印이 찍혀 있어 제작 연대는 병합 以前이라고 알 수 있다
일본은 병합 以前에는 한국으로 표기했고 병합 후에는 朝鮮으로 표기하며 구분하고 있었다
사진 엽서를 반복적으로 제작하여 배포하고 있었으므로 같은 사진인데도 한국풍속이라고 쓴 것이 있고 朝鮮풍속이라고 쓴 것이 있다
한국은 더럽고 야민적인 나라 라고 선전하기 위해 공개 處刑하는 장면을 굳이 한국 풍습의 범주에 넣어 엽서로 만들어
세계에 퍼뜨리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의 야비한 상술이었다
이 사진은 엽서 외에 도서 출판 형태로 반복적으로 재생산되고 있었다
예를들어 이 사진은 1907년 4월 일본의 흑룡회가 발행한 기관지 <흑룡>에 수록되어 있고
1906년 9월, 1907월 3월에 한국을 방문했던 , 일본주제 독일 공사관,의 무관 “헤르만 산더”중위가 수집한 <1906>자료에서도
이 사진이 등장한다고 한다
또 이 사진은 1906년에서 7년까지 한국 만주 일본을 여행한 프랑스의 武官 “레오 바이람”(leo Byam)이 1908년에 낸 책
<작은 일본 크게 되리라> ,라는 책에도 실려 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위 사진의 원본이며 프랑스의 武官 “레오 바이람(leo Byam)이 쓴 책에 실린 사진이다
‘EN 1906: RÉPRESSIONS JAPONAISES — LA PENDAISON
Au premier plan, ombrelles de mousmés et chapeaux japonais. — Dans plusieurs régions, et notamment dans les provinces du sud-ouest, des soulèvements éclatent contre l’autorité japonaise trop sévère et les envahisseurs rapaces et brutaux… mais le châtiment ne tarde guère
( 번역 :일본의 탄압
교수형 전경에는 여성들의 우산 일본식 모자 ,몇몇 지역 특히 남서부 지역에서는
지나치게 가혹한 일본당국과 포악하고 잔혹한 참략자들에 맞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처벌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
그런데 이 사진 언제 촬영된 사진일까? 시기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사진에 보이는 흰옷(白衣 ) 흰삿갓(白笠)의 군중들이다
흰옷이나 白笠은 조선시대 당시에 國喪이 있을 때 모든 국민이 착용했던 복식이다
국상(國喪)이 되면 모든 국민은 1년동안 白衣와 白帶 白笠을 착용해야 한다
國喪은 태상왕 상왕 왕 왕세자 왕세손과 그들의 妃가 사망했을 때를 國喪이라고 하고 그 장례식을 국장( 國葬)이라고 하는데
대한제국 당시에 國葬은 2회 있었다
1904년 1월 2일 (음력11월15일) 明憲太后의 國喪 ,1904년 11월 5일(음력 9월 28일) 純明妃 閔氏의 國喪이 있었다
1904년 1월 2일 부터 2년동안 國喪기간이었다
1906년이면 이미 國喪기간이 끝나 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1906년에 촬영된 사진은 아니다
이 사진이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한국인 義兵사진이라고 알려져 왔는데 한국내에서도 義兵사진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근거는 대한제국 법부에서 “약탈과 살인이 비일비재 하니까 특별히 단속하고 처벌하라” 특명이 내려졌고 {1904년 3월 12일 훈령 13도 6항)
이후 1904년 3월 15일 漢城재판소 관할 죄수 12명이 漢城감옥 교수대에서 처형되어 다음날 시신이 군중들에게 공개되었다 등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례를 예를들어 저 사진의 사람들은 義兵이 아니고 도둑 강도들이며 일본군에 의해 처형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 義兵은 대채로 민간인들로 구성되어 군복이나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복식으로 義兵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서로 겹쳐서 죄수들의 시신이 12명인지 불확실하고 얼굴도 알 수 없고 시신이 공개된 장소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저 집단적으로 공개된 시신들이 도둑인지 義兵인지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義兵將은 “수괴” 義兵은 폭도 라고 표현했으므로 저 사진의 사람들이 義兵일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진은 英文으로 되어 있다
1907년 2월 英文잡지
KOREANS HUNG BY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FOR PROTESTING AGAINST THE CONFISCATION OF THEIR LAND
MENACE of the YELLOW EMPIRE THE JAPANEST IN KOREA
By Hallet Robbins
( 번역 > 한국인들이 그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다가 일본군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한국에서 가장 위협적인 황색 제국의 일본 할렛 R 로빈스 )
프랑스 화보 잡지 (일뤼스트라시옹 L’illustration )1907년 8월4일에 실린 사진
AU PAYS DU MATIN CALME Comment les Japonais mainri ennent lordre en Coree
번역 >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에서 일본인들은 어떻게 치안유지를 하는가 >
이 사진은 3.1운동 당시의 사진이 아니라는 것은 1907년 프랑스의 기사로 이미 밝혀졌다
미국 주관지 (더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에 실린 사진
번역
일본의 지배로 부터 1919년 십자가 處刑
이 사진은 일본군에 의해 처형되고 몇분 후 국제 영화사에서 촬영한 것이다 라고 썼다
3.1운동 직후 미국에서 활동한 구미위원회(한국 위원회)가 <일본의 잔혹 행위들> 이라는 문건에 이 사진을 삽입했는데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충격적인 3.1운동을 취재하면서 이 사진을 잘못 게재한 것 같다
해방후 1966년 한국에서 검증없이 3.1운동 당시의 사진이라고 교과서에 실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國喪기간은 러일전쟁과 시기가 겹친다
대한제국은 주변국의 전쟁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1904년 1월 23일에 엄정 중립을 선언했지만
2월8일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대한제국을 일본의 세력권에 넣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서울과 慶運宮 德壽宮을 점령한 후 2월 23일 대한제국 정부를 협박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체결하였다
한일의정서 제4조에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제국 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수용할 수 있을 것 라고 하였다
일본은 이 한일의정서 제4조를 근거로 한국에 철도 부설에 따른 방대한 토지를 요구했다
철도 부지에 들어가는 토지는 대부분 가옥 논밭 묘지 등 민간인들의 사유지였는데 토지 보상비 지급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발생했다
한국 정부가 제시한 보상 금액은 평당 17錢이었으나 실제로 보상 금액은 市價의 2분의 1 , 5분의 1에 불과한 평당 7.6錢이었으므로
일본은 거의 무상으로 철도 부지를 약탈한 것이었다
거주지와 토지를 잃은 민간인들은 스스로 義兵이 되어 일본군에 지속적으로 저항했다
1905년 11월 17일 한일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1907년 6월 高宗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내고
을사조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것이며 무효라고 세계에 폭로하며 을사조약을 파기하려고 노력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일본은 이<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켜 버린다
1907년 8월1일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된다
강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乙巳義兵 (을사조약 당시에 일어난 의병)에 합류하게 되고 의병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丁未義兵이 일어난다
丁未義兵은 1907년 부터 1910년 사이에 일어난 抗日,義兵부대다
전국적으로 확산된 義兵은 그 이전 보다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어 위협을 느낀 일본은 군대를 동원해 義兵을 잔혹하게 진압하게 된다
일본군은 의병의 거점과 관련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1909년 일본군의 南韓大討伐作戰으로 수믾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1만 6.700명의 의병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陣中日誌>에 나타나 있다
陣中日誌는 1907년 7월 23일에서 1909년 6월 19일까지 한국인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한국에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14연대의 활동을 기록한 문서다
일본군 보병 14연대는 정규군으로 서울의 용산 영등포와 대구 광주 등 한강 이남 지역에 배치되었다
日帝가 전북 진안에 거주하는 김진명 의병을 체포하여 목을 잘라 죽였다는 문서 줄친 부분 참수(斬首)
경남 합천 출신 신상호 義兵將을 칼로 찔러 죽였다는 문서 줄친 부분 (刺殺)
일본은 義兵將을 수괴 義兵은 도둑 폭도라고 표현하였다
旧韓国末韓国人義兵(義兵) 活動に対して韓国が捏造したと騷いでいる日本人がいて反論資料あげ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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旧韓国末から日帝強制占領期間まで韓国で日本人が運営した写真館で韓国の多くの人物や
風景写真をはがきで製作して日本ヨーロッパなど世界多くの国に配布していた
が写真は韓国人集団処刑(処刑) 写真だ
がはがきの下に <韓国風俗 ,絞罪処分>と書いて 1909年 8月 8日日付で 通信日附印が撮れていて製作連帯は併合 以前だと分かる
日本は併合 以前には韓国で表記したし併合後には 朝鮮で表記しながら区分していた
写真はがきを繰り返し的に製作して配布していたので同じ写真なのに韓国風俗だと書いたことがあって 朝鮮風俗だと書いたことがある
韓国は汚くてヤミンゾックな国と宣伝するために公開 処刑する場面を敢えて韓国風習の範疇に入れてはがきで作って
世界にまき散らしていたこれは日本のさもしい商術だった
が写真ははがき外に図書出版形態で繰り返し的に再生産されていた
例えばこの写真は 1907年 4月日本の黒竜回が発行した機関紙 <黒竜>に収録されていて
1906年 9月, 1907月 3月に韓国を訪問した , 日本主題ドイツ公使館,の無関 "ヘルマンサンド"中尉が収集した<1906>資料でも
が写真が登場すると言う
またこの写真は 1906年から 7年まで韓国満洲日本を旅行したフランスの 武官 "レオバイラム"(leo Byam)が 1908年に出した本
<小さな日本大きくなろう> ,という本にも載せられていると言う
が写真は上の写真の原本でフランスの 武官 "レオバイラム(leo Byam)が書いた本に載せられた写真だ
‘EN 1906: RPRESSIONS JAPONAISES LA PENDAISON
Au premier plan, ombrelles de mousms et chapeaux japonais. Dans plusieurs rgions, et notamment dans les provinces du sud-ouest, des soulvements clatent contre l’autorit japonaise trop svre et les envahisseurs rapaces et brutaux… mais le chtiment ne tarde gure
( 翻訳 :日本の弾圧
絞首刑全景には女性たちの傘日本式帽子 ,いくつかの地域特に南西部地域では
通り過ぎるように苛酷な日本政府と暴悪で残酷なチァムリャックザドルに対立して反乱が起きたから処罰は長くかからなかった )
ところでこの写真いつ撮影された写真だろう? 時期が分かる根拠は写真に見えるフィンオッ(白衣 ) フィンサッガッ(白笠)の群衆たちだ
フィンオッや 白笠は朝鮮時代当時に 国喪がいる時すべての国民が着した複式だ
国喪(国喪)になればすべての国民は 1年間 白衣と 白帯 白笠を着しなければならない
国喪は太上王サングワング王往歳者王世孫と彼らの 妃が死亡した時を 国喪と言ってその葬式を局長( 国葬)と言うのに
大韓帝国当時に 国葬は 2回あった
1904年 1月 2日 (旧暦11月15日)明憲太后の 国喪 ,1904年 11月 5日(旧暦 9月 28日) 純明妃 閔氏の 国喪があった
1904年 1月 2日から 2年間 国喪期間だった
1906年ならもう 国喪期間が終わっていてと言うのでこの写真は 1906年に撮影された写真ではない
が写真が日本軍によって処刑された韓国人 義兵写真だと知られて来たが韓国内でも 義兵写真ではないという主張が申し立てられた
根拠は大韓帝国法部で "掠奪と殺人がたくさんあるから特別に取り締まって処罰しなさい" 特命が下ろされたし {1904年 3月 12日訓令 13度 6項)
以後 1904年 3月 15日 漢城裁判所管轄罪囚 12人が 漢城監獄絞首台で処刑されて翌日死体が群衆たちに公開されたなど記録がある
このような事例を例えばあの写真の人々は 義兵ではなくて泥棒強盗たちで日本軍によって処刑されたのではないと主張することだ
ところが実は 義兵は大のまま民間人たちに構成されて軍服や武器をまともに取り揃え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状況だった
それで複式で 義兵なのかないのか区分するのが易しくない場合もあった
写真を見れば人々がお互いに重なって罪囚たちの死体が 12人か不確実で顔もわからなくて死体が公開された場所もわからない
だからあの集団的に公開された死体たちが泥棒なのか 義兵なのかもうちょっと研究が必要だと思います
日本は 義兵将は "首魁" 義兵は暴徒と表現したのであの写真の人々が 義兵である可能性もあると思います
が写真は 英文になっている
1907年 2月 英文雑誌
KOREANS HUNG BY JAPANESE MILITARY AUTHO-RITIES FOR PROTESTING AGAINST THE CONFISCATION OF THEIR LAND
MENACE of the YELLOW EMPIRE THE JAPANEST IN KOREA
By Hallet Robbins
(翻訳 > 韓国人たちが彼らの土地を沒収することに反対するデモをしている途中日本軍政府によって逮捕して絞首刑に処された
韓国で一番脅迫的な黄色帝国の日本ハルレッ R ロビンス )
フランス画譜雑誌 (イルルィストラシオング L’illustration )1907年 8月4日に積まれた写真
AU PAYS DU MATIN CALME Comment les Japonais mainri ennent lordre en Coree
翻訳 > 静かな朝の国韓国で日本人たちはどんなに治安維持をするか >
が写真は 3.1運動当時の写真ではないということは 1907年フランスの記事でもう明かされた
アメリカ主観誌 (もっとリテラリーダイジェスト)に載せられた写真
翻訳
日本の支配から 1919年十字架 処刑
が写真は日本軍によって処刑されて何分後国際映画社で撮影したことだと書いた
3.1運動直後アメリカで活動した欧米委員会(韓国委員会)が <日本の残酷行為たち> という文件にこの写真を挿入したが
外国人たちが韓国で衝撃的な 3.1運動を取材しながらこの写真を過ち載せたようだ
解放の後 1966年韓国で検証なしに 3.1運動当時の写真だと教科書に載せたと言う
ところで大韓帝国 国喪期間は露日戦争と時期が重なる
大韓帝国は周辺国の戦争に荒されないために 1904年 1月 23日に厳正中立を宣言したが
2月8日露日戦争を起こした日本は大韓帝国を日本の繩張に入れるために軍隊を動員して
ソウルと 慶運宮 徳寿宮を占領した後 2月 23日大韓帝国政府を脅かして韓日議定書(韓日議定書)締結した
韓日議定書第4条に大韓帝国政府は大日本帝国政府の行動が容易いように充分に便宜を提供すること
.大日本帝国政府は前項の目的を成就するために軍略上必要な地点を任期収容することができることと言った
日本はこの韓日議定書第4条を根拠で韓国に鉄道敷設による膨大な土地を要求した
鉄道敷地に入る土地は大部分家屋田畑墓地など民間人たちの私有地だったが土地補償費支給問題を巡って紛糾が発生した
韓国政府が提示した補償金額は坪当たり 17銭だったが実際に補償金額は 市価の 2分の 1 , 5分の 1に過ぎない坪当たり 7.6銭だったので
日本はほとんど無想で鉄道敷地を掠奪したことだった
居住地と土地を失った民間人たちは自ら 義兵になって日本軍に持続的に抵抗した
1905年 11月 17日韓日乙巳條約が締結されて大韓帝国の外交権が剥奪された
1907年 6月 高宗はオランダヘイグで開かれる< 万国郵平和会議>に特使を送って
乙巳條約は日本の強圧に締結されたことで無效と世界に暴露して乙巳條約を破棄しようと努力したが日本の邪魔で失敗する
日本はこれ< ヘイグ特使事件>を言葉尻で高宗を強制で退位させてしまう
1907年 8月1日日本によって大韓帝国軍隊が強制解散される
強制解散された大韓帝国軍人たちは 乙巳義兵 (乙巳條約当時に起きた義兵)に合流するようになって義兵活動は
全国的に拡散して 丁未義兵が起きる
丁未義兵は 1907年から 1910年の間に起きた 抗日,義兵部隊だ
全国的に拡散した 義兵はその以前より戦闘力が大きく向上して脅威を感じた日本は軍隊を動員して 義兵を残酷に押えるようになる
日本軍は義兵の拠点と係わる村を燃やして民間人たちを虐殺した
特に 1909年日本軍の 南韓大討伐作戦で水銀民間人たちが虐殺されたし 1万 6.700人の義兵が殺害されたと言う
このような事実は <陣中日誌>に現われている
陣中日誌は 1907年 7月 23日から 1909年 6月 19日まで韓国人義兵を押えるため
韓国に派遣された日本軍歩兵第14連帯の活動を記録した文書だ
日本軍歩兵 14連帯は正規軍でソウルの竜山永登浦と大邱光州など漢江以南地域に配置された
日帝が全北鎭安に居住するキムジンミョン義兵を逮捕して首を首をして殺したという文書ズルチン部分斬首(斬首)
慶南往川出身身の上号 義兵将を刀で突いて殺したという文書ズルチン部分 (刺殺)
日本は 義兵将を首魁 義兵は泥棒暴徒と表現し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