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대마도(對馬島)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결사 항전한 (대마도) 의병들이 이를 격퇴했고 의병 전적비(戰蹟碑)가 대마도 도처에 있다. 1870년대에 대마도를 불법적으로 삼킨 일본은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1949년 1월 7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첫 연두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이날 이승만은 한일국교재개를 언급하면서 대마도 문제를 꺼냈다.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요구에 맞서기 위한 지렛대로 대마도 카드를 뽑아든 것이다.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의 연두 기자회견 직후인 1949년 1월 18일 제헌의원 31명이 “대마도 반환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얼마 후 있게 될 샌프란시스코미일 강화회의에서 대마도 반환을 관철시킬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의 한 언론이 2005년 입수한 미국 국무부 외교문서에 따르면 1951년 4월 27일 한국 정부는 미 국무부에 보낸 문서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국은 일본이 대마도에 대한 모든 권리, 호칭, 청구를 분명히 포기하고 그것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고 밝혔다.

아쉽게도 같은 해 7월 9일 양유찬 주미 한국대사가 국무부에서 존 덜레스 미국대사를 만나 대마도 문제에 대한 한국의 입장을 전하자 덜레스는 “대마도는 일본이 오랫동안 통제하고 있고 이번 평화조약은 대마도의 현재 지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한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우리 정부도 더 이상 대마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대마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조선 초에도 강력하게 제기됐었다. 그것은 고려 때 대마도에 대한 인식이 여진족과 탐라(제주도) 중간쯤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접경한 여진족은 고려 관직을 받는 것을 영예로 생각했고 이 전통은 청나라가 성립되던 조선 중기까지 이어졌다.

탐라도 상대적 독립을 누리다 고려에 복속됐다. 반면 대마도는 상대적 독립을 유지했지만 고려나 조선의 관직을 얻고 생필품을 얻기 위한 교역을 꾸준히 요청했다.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 대마도를 다루는 고려와 조선의 원칙이었던 것이다.

일본인의 침략이 계속되자 세종 원년(1419년) 상왕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결심한다. 그때 밝힌 교유문(敎諭文)의 서두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대마도는 섬으로 본래 우리나라의 땅이다. 다만 궁벽하게 막혀 있고 또 좁고 누추하므로 왜놈들이 거류하게 두었더니 개같이 도적질하고 쥐같이 훔치는 버릇을 가지고 경인년부터 뛰놀기 시작했다.”

태종의 교유문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리고 정벌이 끝난 후 대마도 도주에게 교유문에서 그는 다시 한번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음을 명확하게 밝힌다.

”대마도가 섬으로 경상도의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되었던 바 본시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확실하게 상고할 수 있다.”

물론 대마도가 제주도나 거제도 같은 우리 땅은 아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마도가 우리에 조공을 바치던 땅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태종 때 대마도가 일본 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15세기 초 태종 이방원의 대마도 인식과 20세기 중반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인식은 일맥상통한다.

이후 조선은 대마도에 대해 소극적 태도로 일관했다. 그저 일본인의 근거지 역할만 해주지 않으면 좋다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대마도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양다리를 걸쳤던 대마도주는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일본화를 지향했고 임란 직후인 17세기 초 일본의 막번체제에 편입됐다. 조선 전기 때만 해도 조선의 신하임을 당당히 밝혔던 대마도 도주가 일본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적대로 1870년대 완전히 일본화됐다. 지금 대마도는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다. 그 근거는 우리가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것보다 훨씬 근거가 약하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비하면 “대마도가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 훨씬 설득력 있고 근거도 있다.


対馬島は大韓民国の領土


"対馬島(対馬島)はずいぶん前から我が国に朝貢を捧げた我が地だった. 壬辰の乱を起こした 日本がその地を無力強点したが決死抗戦した (対馬島) 義兵たちがこれを撃退したし義兵戦跡碑(戦蹟碑)が対馬島諸所にある. 1870年代に対馬島を不法的にのんだ日本はポツダム宣言で不法に所有した領土を返還すると言ったから私たちに返さなければならない."

1949年 1月 7日 大韓民国 建国大通霊 李承晩(李承晩)が初年間も記者会見で言った言葉だ. この日李承晩は韓日国交再開を言及しながら対馬島問題を取り出した. 日本と国交を正常化しなさいという アメリカ要求に対立するためのてこで対馬島カードをポブアでものだ.
が大統領の発言はあの時が初めではない. 彼は 1948年 8月 15日大韓民国政府樹立を宣布してから三日後の 8月 18日声明(名前)で "対馬島は私たちの地"だから日本は速く返還しなさいと言った. 日本が抗議すると李承晩は外務省をさせてその年 9月 "対馬島属領(属領)に関する声明(名前)"を発表した.

李承晩の年間も記者会見直後の 1949年 1月 18日制憲議員 31人が "対馬島返還促求決議案"を国会に提出した. 数日後あるようになる サンフランシスコ日米強化会議で対馬島返還を貫徹させる根拠を用意するためだ.

国内の一言論が 2005年手に入れたアメリカ国務省外交文書によると 1951年 4月 27日韓国政府は米国務省に行かせた文書に次のように使った.
"韓国は日本が対馬島に対するすべての権利, 呼称, 請求を確かにあきらめてそれを韓国に返すことを要請する(In view of this fact the Republic ofj Korea request that Japan specifically renounce all right, title and claim to the Island of Tsushima and return it to the Republic of Korea)"と明らかにした.

惜しくも同じ年 7月 9日ヤングユチァン駐米韓国せりふが国務省でゾーンダラス米国大使に会って対馬島問題に対する韓国の立場を伝えるとダラスは "対馬島は日本が長い間統制しているし今度平和条約は対馬島の現在地位に影響を及ぼさない"と韓国の要求を拒否した. 以後我が政府もこれ以上対馬島問題を言及しなかった.

対馬島に対する領有権主張は朝鮮超にも力強く申し立てられた. それは高麗の時対馬島に対する認識が搖り返し族と耽羅(済州島) 中間くらいだったからだ. 高麗と接境した搖り返し族は高麗官職を受けることを栄誉だと思ったしこの伝統は清が成立された朝鮮中期までつながった.

耽羅も相対的独立を享受して高麗に服属された. 一方対馬島は相対的独立を維持したが高麗や朝鮮の官職を得て生活必需品を得るための交易を倦まず弛まず要請した. 不可近不可院(不可近不可遠)が対馬島を扱う高麗と朝鮮の原則だったことだ.

倭寇の侵略が続くと世宗元年(1419年) サングワング太宗は対馬島征伐を決心する. あの時明らかにしたギョユムン(教諭文)の立っておく. 一種の宣戦布告だった.

"対馬島は島で本来我が国の地だ. ただ草深く支えていてまた狭くてむさくるしいので倭人たちが居留するように置いたら犬のようにドゾックジルして鼠のように盗む癖を持って京人年から遊び回り始めた."

太宗のギョユムンは一種の宣戦布告だった. そして征伐が終わった後対馬島逃走にギョユムンで彼はもう一度対馬島が私たちの地だったのを明確に明らかにする.

"対馬島が島で慶尚道の桂林(鶏林-競走)に隷属したところもともと我が国の地というのが門跡(文籍)に積まれていてはっきりと上告することができる."

もちろん対馬島が済州島や巨済島みたいな我が地ではない. 李承晩大統領も対馬島が私たちに朝貢を捧げたタングイだと言っている. しかし明らかなことは太宗の時の対馬島が日本地でもなかったという事実だ. そんな点から 15世紀初太宗異邦院の対馬島認識と 20世紀中盤建国大通霊李承晩の認識は一脈相通ずる.

以後朝鮮は対馬島に対して消極的態度に一貫した. ただ倭寇の足だまり役目ばかりしてくれなければ良いという位だった. 壬辰の乱が対馬島の運命を引き離した. 両足をかけた対馬島与える壬辰の乱を基点で日本画を志向したし壬乱直後の 17世紀初日本のマックボンチェゼに編入された. 朝鮮前期時には朝鮮の臣下なのを堂堂と明らかにした対馬島逃走が日本に移ったのだ.

李承晩大統領の指摘どおり 1870年代完全に日本化された. 今対馬島は日本が実效支配している. その根拠は私たちが独島を実效支配するよりずっと根拠が弱い. 日本が独島を自分の地だと言い張ることに比べれば "対馬島が私たちの地"という主張がずっと説得力あって根拠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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