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시점을 바꾸어 보고, 이 역사로부터 교훈이 되는 것이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다.우선은 일본에 있어서의 조선에의 관심의 낮음, 이 나라의 실상에의 이해의 부족하고, 둘째는 조선 측에 둘 수 있는 배외성·폐쇄성은 아닐까.서로 자신을 중심으로 해, 자기를 기준으로 해 좁은 시야에서 상대를 보고 있었다.
예를 들어, 무로마치 장군·아시카가의교는 명국과의 국교 회복을 의도해, 통신사를 배웅한 세종에 대해서 명과의 중개를 요청했다.그러나, 이미 설명한 것처럼 이것은 최초부터 허무한 요구였다.명은 속국인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를 허락하는 체제가 아니고, 세종은 최초부터 아키라 황제에 대해서 비밀리에 왕사를 일본에 파견하고 있었다.통신사파견의 「비합법성」은최 만리들한글 반대파에게 있어서, 마지막 비장의 카드나 될 수 있는 세종의 약점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러한 내막을 일본은 몰랐다.「훈민정음」의 제작에 의해서 생긴 일본에 대한 경계·멸시의 경위에 대해서도와 같이 무지했다.
아시카가 로쿠다이 장군·의교(왼쪽)와 무로마치 시대에 편찬 된 외교 자료집 「선린국보기」( 오른쪽).「선린국보기」에는 세종으로부터의 국서의 사본도 포함되지만, 이번 유네스코 등록에서는 제외되고 있다.
(이)라고 해도그렇다 치더라도,일본의 중추는, 자국내에서 발생하는 일에 마음이 사로잡힌 나머지, 해외에의 관심, 특히 중국·일본·조선 각각의 사이의 비대칭인 관계의 현실에 대한 통찰력이 약하고, 일본의 문화가 영향을 계속 주고 있었다고 하는 것,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향을 일으키게 하고 있었다고 하는 인식이 불충분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少し視点を変えてみて、この歴史から教訓となることがあるとすれば、それは何かを考えてみたい。まずは日本における朝鮮への関心の低さ、この国の実状への理解の不足であり、二つ目は朝鮮側における排外性・閉鎖性ではないだろうか。お互いに自分を中心とし、自己を物差しにして狭い視野で相手をみていた。
たとえば、室町将軍・足利義教は明国との国交回復を意図し、通信使を送り出した世宗に対して明との橋渡しを要請した。しかし、既に説明したようにこれは最初からむなしい要求であった。明は属国である朝鮮の自主的な外交を許すような体制ではなく、世宗は最初から明皇帝に対して秘密裡に王使を日本に派遣していた。通信使派遣の「非合法性」は崔万里たちハングル反対派にとって、最後の切り札ともなりうる世宗の弱点であった。
そして、そのような内実を日本は知らなかった。「訓民正音」の作製によって生じた日本に対する警戒・蔑視の経緯についても同様に無知であった。
足利六代将軍・義教(左)と室町時代に編纂された外交資料集「善隣国宝記」(右)。「善隣国宝記」には世宗からの国書の写しも含まれるが、今回のユネスコ登録からは除外されている。
とはいえそれにしても、日本の中枢は、自国内で生起する事柄に心を奪われるあまり、海外への関心、特に中国・日本・朝鮮それぞれの間の非対称な関係の現実に対する洞察力が弱く、日本の文化が影響を与え続けていたということ、そしてこれに対する反響を生じさせていたという認識が不十分であったと思わざるを得な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