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쇄국 체제가 비틀어 열려 극동 아시아 근대의 국제 관계를 재구축 하려는 격동 때, 1880년, 청나라의 청년 외교관·황준헌은, 일본에 온 조선의 고관에 대해서 하나의 구상( 「조선 책략」)을 나타냈다.남하정책을 취하는 러시아에 대항해, 조선·중국·일본에 미국을 더한 완만한 연합을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황준헌
일본과 중국, 조선간에는, 제휴와 변혁을 더듬질 하는 새로운 상황이 태어나고 있었다.조선왕은 이 구상을 검토해, 이웃나라 일본을 참조하면서 군비의 근대화등을 시도하려고 했다.
자국의 체제 재건을 위해서, 어디의 정부와 교제가 깊어져야할 것인가라고 하는 문제를 세운다면, 길고 안정적인 교역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것은 일본이며, 이 시점에서, 전력을 다해 서양 근대화의 길을 돌진하고 있었던 것도 일본에서 만났기 때문에, 이 나라를 참고로 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군약신강」이라고 말해지는 통치의 불안정함, 국내의 문인층의 강렬한 내향 논리나최 만리 이래의반일 교의의 뿌리 깊이를 생각하면, 가솔린의 악취가 강하게 감도는 차고안에서 담배를 피려고 성냥을 켜는 것으로, 극히 위험할 가능성을 잉 그리고 있었다.
일본인 교관을 불러 군제 개혁에 나선 조선
사실, 일본인 교관의 아래 근대군의 창설을 목표로 한 사업은, 1882년, 반란을 위해서 순식간에 좌절 해, 유혈의 참상에 위기감을 가진 청나라군의 개입·진주를 부른 것이다(임오군란).그 후도 다양한 사람들을 말려 들게 한 내란이나 참혹한 응수가 반복해진 후에, 결국, 외국군끼리의 본격적인 전쟁의 귀추가 반도의 사회시스템 근대화나 각종 문화의 근대화의 주도권과 방침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태안에 있고, 자국내에서의, 일본·청나라의 군사 충돌·전쟁에 대해서 방관자에 지나지 않게 된 조선은, 체제 쇄신을 위한 통치의 실력(당사자 능력)이 부족한 것 를 국제사회에 대해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이 나라에서 길게 계속 된배외적·폐쇄적인 성향은,목에 박힌 물고기의 뼈와 같이, 삼국간의 제휴·교류나 조선 자신의 서양 근대화에의 준비에 대한 큰 장해의 하나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朝鮮の鎖国体制がこじ開けられ、極東アジア近代の国際関係を再構築しようという激動のとき、1880年、清国の青年外交官・黄遵憲は、日本に来た朝鮮の高官に対して一つの構想(『朝鮮策略』)を示した。南下政策をとるロシアに対抗し、朝鮮・中国・日本にアメリカを加えた緩やかな連合をつくろうというものである。
黄遵憲
日本と中国、朝鮮間には、連携と変革を手さぐりする新たな状況が生まれつつあった。朝鮮王はこの構想を検討し、隣国日本を参照しながら軍備の近代化などを試みようとした。
自国の体制立て直しのために、どこの政府と付き合いを深めるべきかという問題をたてるならば、長く安定的な交易関係を持っていたのは日本であり、この時点で、全力をあげて西洋近代化の道を突進していたのも日本であったから、この国を参考にすることは合理的な選択といえる。しかし「君弱臣強」といわれる統治の不安定さ、国内の文人層の強烈な内向き論理や崔万里以来の反日教義の根深さを考えれば、ガソリンの臭気が強く漂う車庫の中で煙草を吸おうとマッチを擦るようなもので、きわめて危うい可能性を孕んでいた。
日本人教官を招き軍制改革に乗り出した朝鮮
事実、日本人教官のもと近代軍の創設を目指した事業は、1882年、反乱のために瞬く間に挫折し、流血の惨状に危機感をもった清国軍の介入・進駐を招いたのであった(壬午軍乱)。その後もさまざまな人々を巻き込んだ内乱や血なまぐさい応酬が繰り返されたのちに、結局、外国軍同士の本格的な戦争の帰趨が半島の社会システム近代化や各種文化の近代化の主導権と方針を決定することになった。
そのような事態の中にあって、自国内での、日本・清国の軍事衝突・戦争に対して傍観者にすぎなくなった朝鮮は、体制刷新のための統治の実力(当事者能力)に欠けていることを国際社会に対して印象づけることとなった。
この国で長く続いた排外的・閉鎖的な性向は、のどに刺さった魚の骨のように、三国間の提携・交流や朝鮮自身の西洋近代化への準備に対する大きな障害のひとつとなっていたのであ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