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3년 9월 10일 외무대신 조소앙 (趙素昻)의 이름으로
야마모토 곤노효에 에게 외무부 발행 131호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對日 항의 공문을
보낸다
내용
알려 드리고자 하는 것은
천지가 힘을 합하여 일본에 재앙을 내리니 도시 3곳이 불타고 일체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습니다
듣자 하니 측은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은혜와 원수의 관계도 잊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에게서 殺氣가 일어나고 천재지변의 원인을 韓人에게
전가하여 방화를 하거나 폭탄을 투척한 者도 韓人 이라고 하면서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을 선포하고 큰 적을 만난것 처럼 民軍을 부추겨서 무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인 아이 학자 노동자 가리지 않고 韓人 이라면 모두 잡아 죽이고 어떤 고난에
빠졌는지 분별하지 않고 韓人이라면 모두 살육하였는가?
9월 1일 부터 7일 사이에 韓人이 큰 길에서 무자비하게 살해된 것이 매일 50명이나 되고 군영에
죄수로 구금된 韓人이 이미 15.000명이 됩니다
국내외 기자가 여러차례 실상을 보도하면서
한인을 보호하라 누가 그것을 믿겠는가 미친 군중이 난폭한 행동을 하니 사람으로서
누가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라고 기재하였습니다
저희 정부는 이 때문에 참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체로 적으로 만나 전쟁을 할 때에도
지켜야 할 법도가 있는 것입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됩니다
이 재난 구역의 한인은 혈혈단신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여 황급히 목숨을 지키는 것에만
도모할 뿐 힘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정서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정도는 아닙니다
그들과 싸워서 살해하는 것은 만행 중에 만행입니다 하늘에 큰 꾸지람을 받아 잘못을 뉘우쳐도
가망이 없겠지만 남의 동정심을 구하면서 스스로 사람 되기를 거절한 것이니 사람으로서
하늘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저희 정부가 일본 인민 때문에 애통해 하는 것이 한인 보다 더 심각하니 신속하게 구제되기
바랍니다 구제하는 방법은 조금도 늦추어서는 안됩니다
이 편지를 받고 5일 이내에 따로 여러 항목을 제시하니 이치를 따지고 분석하여 저희 정부의
항의에 회답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1. 불법 강제 구금된 15.000명의 한인 즉시 석방할 것
2. 모든 재해구역에 있는 한인의 생사 여부 성명 주소 직업을 조사하여 발표할 것
3. 한인을 잔인하게 죽인 무리들을 엄중히 처벌할 것
그러나 일본 정부의 회답은 없었습니다
조소앙 (趙素昻)
고종 24년 1887년 4월 10일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
1904년 황실 유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여 일본에 유학 도쿄 府立 第一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까지 8년간 일본에 머물렀다
1906년 자신이 다니던 第一중학교 수학여행 보고문으로 쓴 (나고야 수학여행기 )라는 글은
한문에 일본어를 섞어 풀어 쓰는 한문훈독체로 작성되었는데 학내 잡지 학우회 잡지로 실렸다고
한다 그는 일본 유학 2년만에 일본어의 완전한 문장을 쓸 수 있을 만큼 일본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위 문서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 정부가 관동 대지진의 혼란의 원인을 한국인에게 전가하여 계엄령을 선포하여 군사를
일으켜 민간인을 부추겨서 한국인을 학살하였다 라고 임시 정부가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재난지구의 한인은 혈혈단신 고기 덩어리에 불과하여 ..라고 쓰고 있습니다
병합 초기 한국인 노동자들의 일본 도항은 일본에 정착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3년 4년 정도의
단기 체류자로 일본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에 촌락을 이루고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이후입니다
1923년이면 한국인 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라고 할 수 있는데 한국인 대부분 아직 일본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진 재난으로 한국인에 대한 유언비어에 대처하는 여유 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일본사회에서 극소수였던 한국인들이 절대 다수의 일본인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키거나
일본 군대를 상대로 무기를 사용해 싸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일본인 거주지에서는 한국인 촌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이웃으로
만나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인 폭동 등 근거없는 소문에 현혹되어 한국인 학살을 일으킨 것은
일본 사회지도층의 조선에 대한 역사 날조와 한국인에 대한 선입견이 반영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上海大韓民国臨時政府は 1923年 9月 10日外務大臣チョ・ソアン (趙素昂)の名前で
Yamamotoゴンノ−ヒョにに外務省発行 131号大韓民国臨時政府の 対日 抗議公文書を
送る
内容
お知らせいたそうとすることは
天地が力を合わせて日本に災いを下げたら都市 3ヶ所が燃えて一体のすべてのものが破壊されました
聞くとしたらあわれで可哀相な気がして恩恵と元首の関係も忘れました
しかしこの時を待ったというように人々から 殺気が起きて天災地変の原因を 韓人に
擦りつけて放火をするとか爆弾を投擲した 者も 韓人 と言いながら軍事を起こして
戦争を宣布して大きい敵に会ったことのように 民軍をけしかけて武器を持つようにしました
そして年寄り子供学者労動者選り分けないで 韓人 なら皆取って殺してどんな苦難に
陷ったのか分別しないで 韓人なら皆殺戮したのか?
9月 1日から 7日間に 韓人が大きい道で無慈悲に殺害されたことが毎日 50名もなって軍営に
罪囚に拘禁された 韓人がもう 15.000人になります
国内外記者が何回も実際を報道しながら
韓人を保護しなさい誰がそれを信じるか 及んだ 群衆が荒っぽい行動をしたら人として
誰が彼らを許すことができるか ..と記載しました
うちの政府はこのために堪え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概して敵に会って戦争をする時にも
守らなければならない法道があることです災難にあった人々を虐殺することは人のする仕業がならないです
が災難区域の韓人は孑孑単身肉固まりに過ぎず慌てて命を守ることにだけ
はかるだけ力で争うことができるのではなくて情緒も 人を殺すことができる位ではないです
彼らと争って殺害することは蛮行の中に蛮行です空に大きいお叱りを受けて過ちを悔やんでも
見こみがないが他人の情け心を求めながら自ら良い人になるのを断ったことだから人として
空に挑戦するのです
うちの政府が日本人民のため悲しくて痛がることが韓人よりもっと深刻だから速かに救済されること
望みます救済する方法は少しも延ばしてはいけないです
が手紙を受けて 5日以内に別に多くの項目を提示したら理を計算して分析してうちの政府の
抗議に回答することが正しいだろう
1. 不法強制拘禁された 15.000人の韓人直ちに釈放すること
2. すべての災害区域にいる韓人の生死可否姓名住所職業を調査して発表すること
3. 韓人を残忍におかゆである輩らを厳に処罰すること
しかし日本政府の回答は なかったです
チョ・ソアン (趙素昂)
高宗 24年 1887年 4月 10日京畿道坡州で生まれ
1904年 皇室留学生選抜試験に合格して日本に留学東京 府立 第一 中学校に 入学した
1912年まで 8年間日本に泊まった
1906年自分が通った 第一中学校修学旅行報告文で書いた (名古屋数学旅行記 )という 文は
漢文に日本語を交ぜて解いて使う ハンムンフンドックチェに作成されたが学内雑誌学友会雑誌で載せられたと
する 彼は日本留学 2年ぶりに 日本語の完全な文章を書くことができるほど日本語にうまかったと言う
上の文書で分かることは
日本政府が関東大震災の 混乱の原因を朝鮮人に擦りつけて戒厳令を宣布して軍事を
起こして民間人をけしかけて朝鮮人を虐殺したと臨時政府が認識していたことです
そして災難地球の韓人は孑孑単身肉固まりに過ぎない ..と書いています
併合初期朝鮮人労動者たちの日本渡航は日本に定着するためだなかったし 3年 4年位の
短期滞留者で日本に行っていたことが大部分でした
朝鮮人たちが日本に里を成して定着し始めたことは 1920年代以後です
1923年なら 朝鮮人村が形成され始めた初期と言えるのに朝鮮人大部分まだ日本語に
上手ではなかったから地震災難で朝鮮人に対するデマに 対処する余裕さえ
なかったはずです
当時日本社会で極少数だった朝鮮人たちが絶対多数の日本人を相手で暴動を起こすとか
日本軍隊を相手で武器を使って争うということはほとんど不可能に近いです
も日本人居住地では 朝鮮人村が形成されるの なかったから朝鮮人と日本人が隣りで
会う事はあまりなかったです
それでも朝鮮人暴動など根拠ないうわさに目が眩んで朝鮮人虐殺を起こしたことは
日本社会指導層の朝鮮に対する歴史捏造と朝鮮人に対する先入観が反映された結果と思い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