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한국의 사람들은 타케시마 문제로「역사적 근거」를 고집합니다.

아무래도「역사적 근거」는 「결정적인 근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고,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의 영토」이니까, 일본의 어떠한 영토 취득도 인정받지 못한다!」라고 하는 주장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역사적 근거」가 정말로 유효하다면, 중국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한반도는 우리 나라의 영토」라고 하는 주장도 정당한 것이 되겠지요.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이 뻔한 속임수와 같은 설명을 믿어 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역사적 근거」

역사적 근거와는 「타케시마는 초부터 우리 나라의 영토다(원초적 권원)」라고 하는 주장입니다.
일본이나 한국도 19 세기까지는, 국제법의 적용(국제법 수용)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국제법의 적용 이전으로는 「국제법의 룰이 아니고, (그 당시의) 그 지역의 룰에 따라서 영토 취득을 한다」 것입니다.
즉 「역사적 근거」란 「국제법을 받아 들이기 이전의 우리 나라의 기준에서는…」이라고 하는 「그 나라(지방) 독자적인 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제법의 적용을 하게 되면 「그 나라 독자적인 룰」보다 「국제법」이 우선되게 됩니다.
「국제법의 적용을 받는 나라」는 「국제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 「국제법」은 「역사적 근거의 증거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까?


「역사적 근거」에 관한 국제 판례

「파르마스섬사건」
「역사적 근거가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는다」것을 분명히 했던 것이 「파르마스섬사건(Island of Palmas Case)」입니다.
파르마스섬은 16 세기에 스페인이 「발견」했습니다.
16 세기 당시의 법에서는 「발견」은 「영토 취득의 근거」라고 인정되고 있었습니다.그러니까 16 세기의 시점에서 스페인은 파르마스섬에 대한 「영토권을 창설(확립)」했습니다.
그러나 재판소는 「 「영토권을 창설」해도, 그 「영토권을 법의 변화에 따라 존속(유지)」하는 것이 불가결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의 「발견」이라고 하는 근거만으로는, 현재에 있어 영토권을 보관 유지하고 있다고는 인정받지 못한, 으로서 「스페인의 영토권이 이미 존속하고 있지 않다」라고 판단되었습니다.
즉 「역사적 근거」가 있었다고 해도, 「국제법적인 근거」에 의한 「영토권의 존속」이 없으면 「영토권의 상실」을 의미하게 됩니다.
「역사적 근거는 결정적인 증거는 되지 않는다」 것입니다.

「만키에·에크레오 사건」
어느 영토 분쟁에 대해 서로의 나라가 「역사적 근거」를 주장한 사건이 「만키에·에크레오 사건(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입니다.
당사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고래의 권원」없고 「원초적 권원」을 주장했습니다.
재판소는, 영국의 「고문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권원」에 대해서 「이 견해를 지지하는 강한 추정은 성립된다」라고 인정했습니다만, 그 역사적 근거는 「오늘 어떠한 법적 효과도 생기지 않는다」로서 채용되지 않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 재판소는 「비록 역사적 근거가 존재해도, 그 근거는 오늘날과 같은 국제법적 근거(예를 들어 계속적 또한 평화적인 주권의 표시)에 의해서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역사적 근거」대신에 요구되는 「국제법적 근거」


이와 같이 「역사적 근거」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특히, ( 「점유에 직접 관계하는 증거」라면 몰라도) 「고문서나 지도」라는 간접적인 「역사적 근거」에는 거의 증거 능력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유효한 국제법적 근거로 대체」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양국은 타케시마에 대한 「역사적 근거」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역사적 근거」는 어떻게 「유효한 국제법적 근거로 대체」되었는지요?


일본의 「국제법적 근거에의 대체」

일본은 타케시마를「선점」의 형태로 편입하는 것으로써, 「역사적 근거」를 「국제법적 근거로 대체」했습니다.

우선 1905년 1월 28일의 각의 결정을 받아 2월 22일의 시마네현 고시 제 40호를 가지고 타케시마는 시마네현을 편입했습니다(신문에서도 보도).
그 후, 일본은 타케시마에 대해서「평화적 또한 계속적인 주권의 표시」를 행사합니다.

그리고 일본의 행사한 「평화적 또한 계속적인 주권의 표시」는 1905년부터 1906년의 2년간에만 이하나름에 행해지고 있습니다.
 ·타케시마에 관한 어업 단속 규칙의 개정
 ·측량 명령과 그 실측 보고
 ·칸유치 대장 등록
 ·민간인에 대한 타케시마 주변에서의 강치고기잡이의 허가
 ·공공 건축물의 건조
 ·타케시마의 차용 허가와 그 사용료의 징수

그리고 1905년부터 대한민국이 「이승만 리인」을 선언하는 1952년까지의 사이, 「타국으로부터의 항의」는 존재하지 않고 일본은 「평화적 또한 계속적인 주권의 표시」를 실시했습니다.

덧붙여 대표적인 국제 재판으로 인정된 「국제법적 근거(평화적 또한 계속적인 주권의 표시)」는 이하와 같습니다.
·「행정권, 사법권, 입법권의 행사」에 관한 「직접적인 증거(형사 재판의 실시, 교구세·지방세의 징수, 에크레오 암초를 저지의 범위내에 포함해 취급한 조치 등)」(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증거는 구체적인 것」이 아니면 안되어 「혐의가 있는 것은 채용되지 않는다」(Sovereignty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eh, Middle Rocks and South Ledge)
·실효적 지배는 「계속적으로 평화적인 실효적 지배」가 아니면 안된다.(Eastern Greenland case)

국제 판례와 비교하면 일본이 간 「평화적 또한 계속적인 주권의 표시」가 국제법적 근거로 합치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한국의 「국제법적 근거에의 대체」
그런데 한국측은 어떻게 「역사적 근거를 국제법적인 근거로 대체」했는지요.
한국의 자료는 「침묵」하고 있습니다.즉 「근거를 대체한 형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것입니다.

한국에 국제법이 적용되었다고 생각되는 19 세기는 커녕, 일본에 병합 되는 20 세기 초두까지 한국은 타케시마에 대해서 「국제법적인 근거」를 아무런 행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국 국내에서는 1900년의 칙령 41호의 「이시지마」를 「타케시마(독도)」에 적용시키는 설도 있습니다만, 원래 「이시지마가 어느 섬인가」를 나타내는 것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시지마의 발음이 독도와 잘 비슷하다」라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원래 울릉도 부근에는 다수의 이시지마가 존재해 칙령 41호의 이시지마가 어느 섬을 가리키고 있을까는 증명 되어 있지 않다).
또 「한국의 역사적 근거」가 이미 단절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후대, 즉 1953년 혹은 1954년에 한국 정부는 타케시마에 대한 점유(점거)를 개시했지만, 벌써 1952년 2월에 일본 정부는 타케시마의 영토권에 대해 외교 문서를 통지하고 있어, 이 시점 이후의 점유(점거)는 증거로 해 채용되지 않는다( 「결정적 기일 critical date」).
상기에 든 국제 판례를 보면, 한국측의 주장이 「국제법적 근거」로서 얼마나 성립할 수 없는가를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한국이 「역사적 근거를 국제법적 근거에 대체했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결론
이상과 같이, 현재의 영토권에 대해 생각할 때 「역사적 근거로는, 이미 증거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것입니다.
중요해지는 것은, 「얼마나 역사적 근거를 국제법적인 근거로 옮겨놓았는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근거」라고 하는 뻔한 속임수에 속여지는 것은 이제 마지막으로 합시다.


竹島と歴史的根拠

韓国の人達は竹島問題で「歴史的根拠」に固執します。

どうやら「歴史的根拠」は「決定的な根拠」と考えているようで、「独島は『歴史的に韓国の領土』だから、日本のいかなる領土取得も認められない!」という主張が多く見られます。

もしそのような「歴史的根拠」が本当に有効であるなら、中国が「韓国は歴史的に我が国の属国であったから朝鮮半島は我が国の領土」という主張も正当なものとなるでしょう。
そしてある人達は本気でこの子供騙しのような説明を信じ切っているようです。


「歴史的根拠」

歴史的根拠とは「竹島ははじめから我が国の領土だ(原初的権原)」という主張です。
日本も韓国も19世紀までは、国際法の適用(国際法受容)がありませんでした。
そのため国際法の適用以前では「国際法のルールではなく、(その当時の)その地域のルールに従って領土取得が行われる」のです。
つまり「歴史的根拠」とは「国際法を受け入れる以前の我が国の基準では…」という「その国(地方)独自のルール」に過ぎません。

しかし国際法の適用が行われるようになると「その国独自のルール」よりも「国際法」が優先されるようになります。
「国際法の適用を受ける国」は「国際法を遵守する義務」があります。
では「国際法」は「歴史的根拠の証拠能力」をどの程度認めているのでしょうか?


「歴史的根拠」に関する国際判例

「パルマス島事件」
「歴史的根拠が決定的な証拠にならない」ことを明らかにしたのが「パルマス島事件(Island of Palmas Case)」です。
パルマス島は16世紀にスペインが「発見」しました。
16世紀当時の法では「発見」は「領土取得の根拠」と認められていました。ですから16世紀の時点でスペインはパルマス島に対する「領土権を創設(確立)」しました。
しかし裁判所は「『領土権を創設』しても、その『領土権を法の変化に応じて存続(維持)』することが不可欠である」と指摘しました。
そしてスペインの「発見」という根拠だけでは、現在において領土権を保持しているとは認められない、として「スペインの領土権がもはや存続していない」と判断されました。
つまり「歴史的根拠」があったとしても、「国際法的な根拠」による「領土権の存続」が無いなら「領土権の喪失」を意味することになります。
「歴史的根拠は決定的な証拠にはならない」のです。

「マンキエ・エクレオ事件」
ある領土紛争についてお互いの国が「歴史的根拠」を主張した事件が「マンキエ・エクレオ事件(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です。
当事国であるイギリスとフランスは、「古来の権原」ないし「原初的権原」を主張しました。
裁判所は、イギリスの「古文書に基づいた歴史的な権原」に対して「この見解を支持する強い推定は成り立つ」と認めましたが、その歴史的根拠は「今日いかなる法的効果も生じない」として採用されませんでした。
この点について裁判所は「たとえ歴史的根拠が存在しても、その根拠は今日的な国際法的根拠(たとえば継続的かつ平和的な主権の表示)によって代替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を指摘しました。



「歴史的根拠」の代わりに要求される「国際法的根拠」


このように「歴史的根拠」は決定的な証拠になりません。

特に、(「占有に直接関係する証拠」ならともかく)「古文書や地図」といった間接的な「歴史的根拠」にはほとんど証拠能力は存在しないでしょう。
「歴史的根拠」を有していたとしても「有効な国際法的根拠に代替」することが要求されているのです。
さて日本と韓国の両国は竹島に対する「歴史的根拠」を主張しています。
ではその「歴史的根拠」はどのように「有効な国際法的根拠に代替」されたのでしょうか?


日本の「国際法的根拠への代替」

日本は竹島を「先占」の形態で編入することにより、「歴史的根拠」を「国際法的根拠に代替」しました。

まず1905年1月28日の閣議決定を受け、2月22日の島根県告示第40号をもって竹島は島根県を編入しました(新聞でも報道)。
その後、日本は竹島に対して「平和的かつ継続的な主権の表示」を行使します。

そして日本の行使した「平和的かつ継続的な主権の表示」は1905年から1906年の2年間だけで以下ように行われています。
 ・竹島に関する漁業取締規則の改正
 ・測量命令とその実測報告
 ・官有地台帳登録
 ・民間人に対する竹島周辺での海驢漁の許可
 ・公共建築物の建造
 ・竹島の借用許可とその使用料の徴収

そして1905年から大韓民国が「李承晩ライン」を宣言する1952年までの間、「他国からの抗議」は存在せず日本は「平和的かつ継続的な主権の表示」を行いました。

なお、代表的な国際裁判で認められた「国際法的根拠(平和的かつ継続的な主権の表示)」は以下の通りです。
・「行政権、司法権、立法権の行使」に関する「直接的な証拠(刑事裁判の実施、教区税・地方税の徴収、エクレオ岩礁をジャージーの範囲内に含めて扱った措置など)」(The Minquiers and Ecrehos Case)
・「証拠は具体的なもの」でなくてはならず「疑いのあるものは採用されない」(Sovereignty over Pedra Branca/Pulau Batu Puteh、 Middle Rocks and South Ledge)
・実効的支配は「継続的で平和的な実効的支配」でなければならない。(Eastern Greenland case)

国際判例と比較すると日本の行った「平和的かつ継続的な主権の表示」が国際法的根拠に合致していることが理解できるでしょう。


韓国の「国際法的根拠への代替」
さて韓国側はどのように「歴史的根拠を国際法的な根拠に代替」したのでしょうか。
韓国の資料は「沈黙」しています。つまり「根拠を代替した形跡が存在しない」のです。

韓国に国際法が適用されたと考えられる19世紀どころか、日本に併合される20世紀初頭まで韓国は竹島に対して「国際法的な根拠」を何ら行使していないのです。
韓国国内では1900年の勅令41号の「石島」を「竹島(独島)」に当てはめる説もありますが、そもそも「石島がどの島なのか」を示すことはできていません(「石島の発音が独島とよく似ている」という主張がありますが、そもそも鬱陵島付近には多数の石島が存在し勅令41号の石島がどの島を指しているかは証明できていない)。
また「韓国の歴史的根拠」が既に断絶していると思われる後代、つまり1953年もしくは1954年に韓国政府は竹島に対する占有(占拠)を開始したが、すでに1952年2月に日本政府は竹島の領土権について口上書を通達しており、この時点以降の占有(占拠)は証拠として採用されない(「決定的期日critical date」)。
上記に挙げた国際判例を見ると、韓国側の主張が「国際法的根拠」としていかに成立できないかが理解できるでしょう。

これらの事実を考えると韓国が「歴史的根拠を国際法的根拠へ代替した」と判断することは極めて難しいのです。


結論
以上のように、現在の領土権について考えるとき「歴史的根拠には、もはや証拠能力が存在しない」のです。
重要となるのは、「いかに歴史的根拠を国際法的な根拠に置き換えたか」という事実です。
「歴史的根拠」という子供騙しに欺かれるのはそろそろお終いにしま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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