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전, 중국에서 이런 墓碑가 발견되었을 때 일본 언론의 보도 내용은
“663년 白村江 전투에 참여했다가 포로가 되어 唐에 귀화한 백제 군인의 묘비에서 가장 오랜된
일본이라는 國號가 발견되었다 “
이런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연관된 墓碑가 하나가 아니고 다른 3개가 더 있다는 것을 일본국민들에게
상세히 알리지 않고, 이후 총 4개의 墓碑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보도를 금지하고 있군요.
그러나 묘비에 적힌 내용은 인터넷을 통해 일본국민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일본 국민들이 상당히 충격에 빠졌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을 전합니다.
<한국에서 나오는 보도 내용>
총 4개의 墓碑는 모두 가족墓인데, 백제 멸망의 비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분석해 보면
백제가 멸망할 때, 백제의 마지막 王 義慈王은 신라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의 수도인 扶餘城이 함락되자, 북쪽에 위치한 熊津城으로 피신합니다.
熊津城, 壬存城은 難攻不落의 城이며 백제 남쪽 지방에 많은 지방軍이 존재했기 때문에
지방軍이 도착할 때까지 장기 籠城을 하면 충분히 戰勢를 역전할 수 있었던 상황
그런데, 義慈王이 피신했던 熊津城의 城主는 백제의 佐平이었던 Ye氏 家門인데,
佐平은 현대의 의미로 總理 혹은 首相에 해당됩니다. (즉, 백제의 모든 신하 중에 가장 높은 지위)
백제의 佐平은 이미 백제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家門의 安衛를 위해 반역을 결심합니다.
백제의 佐平에게는 나이 차이가 2살인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이 Ye軍이고, 둘째 아들이 Ye寔進입니다.
둘째 아들 Ye寔進은 熊津城 안에서 義慈王을 기습하여 포로로 잡고 唐에 投降하였는데,
이 功을 인정받아 직접 義慈王을 중국까지 호송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후, 그는 중국에서 상당한 출세가도를 달립니다.)
그리고, 멸망한 백제를 다스리는 總督의 역할은 그보다 나이 2살 많은 형 Ye軍이 맡았는데,
Ye軍도 곧 唐으로 건너가 唐의 사람이 됩니다.
이번에 日本이라는 문자가 발견된 것은 Ye軍의 墓碑입니다.
Ye氏 가문은 백제 멸망 후 모두 중국으로 건너가 상당한 권세를 누렸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묘비는 1) Ye軍 2) Ye寔進 3) Ye寔進의 아들 4) Ye寔進의 손자...이렇게 4개이군요.
이것은 Ye寔進의 墓碑
이것은 Ye寔進의 아들의 墓碑
이것은 Ye寔進의 손자의 墓碑
Ye寔進의 兄 Ye軍의 墓碑 (이곳에서 日本이라는 문자가 발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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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밝혀진 사실>
1. Ye軍은 日本의 白村江 전투와 무관한 사람이고, 일본과 관련된 적이 한 번도 없군요.
(그가 唐의 사람이 된 후, 유일하게 정치 교섭을 위해 일본을 방문한 기록은 있음)
2. 또한, Ye軍은 (일본 언론의 보도처럼) 군인이 아닙니다. 그는 백제 멸망 후
唐을 대신해 그 지역을 다스리는 관리였을 뿐 군인이라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의 이름(=Ye軍) 때문에 그를 군인으로 착각한 일본 언론의 보도는 nonsense입니다.
3. 따라서, 저 碑文의 글자 日本이 島國 Japan을 의미하는지 여부는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일본의 중견 학자가 碑文의 글자 日本이 島國 Japan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문맥이나 모든 점으로 보아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1年前, 中国でこんな 墓碑が発見された時日本言論の報道内容は
663年 白村江 戦闘に参加してから虜になって 唐に帰化した百済軍人の墓碑で一番長い間のされた
日本という 国号が発見された
こんな内容だったことで憶えます.
しかし, 日本言論は連関された 墓碑が一つではなくて他の 3個がもっとあるというのを日本国民たちに
詳しく知らせないで, 以後総 4個の 墓碑に何の内容があるのか報道を禁止していますね.
しかし墓碑に書かれた内容はインターネットを通じて日本国民に伝わるようになったし
日本国民がよほど衝撃に抜けたから詳細な内容を伝えます.
<韓国から出る報道内容>
総 4個の 墓碑は皆家族墓なのに, 百済滅亡の秘密を盛っています.
その内容を分析して見れば
百済が滅亡する時, 百済の最後の 王 義慈王は新羅唐連合軍の攻撃を受けて百済の首都である 扶余城が陷落されると, 北に位した 熊津城で身を避けます.
熊津城, 壬存城は 難攻不落の 城であり百済南側地方に多い地方軍が存在したから
地方軍が到着するまで長期 篭城をすれば充分に 戦勢を逆襲してたたかうことができた状況
ところが, 義慈王が身を避けた 熊津城の 城主は百済の 佐平だった Ye氏 家門なのに,
佐平は現代の意味で 総理 あるいは 首相に当たります. (すなわち, 百済のすべての臣下の中に一番高い地位)
百済の 佐平はもう百済が傾いたと判断して 家門の 安衛のために反逆を決心します.
百済の 佐平には年差が 2歳の二人の息子がいたが,
第一息子が Ye軍で, 二番目息子が Ye寔進です.
次男 Ye寔進は 熊津城 中で 義慈王を奇襲して虜に取って 唐に 投降したが,
が 功を認められて直接 義慈王を中国まで護送する役目をします.
(以後, 彼は中国で相当な出世街道を走ります.)
そして, 滅亡した百済を治める 総督の役目はそれより年 2歳多い兄さん(型) Ye軍が引き受けたが,
Ye軍もすぐ 唐で渡って 唐の人になります.
今度 日本という文字が発見されたことは Ye軍の 墓碑です.
Ye氏 家門は百済滅亡後皆中国に渡って相当な権勢を享受したが,
今まで発見された墓碑は 1) Ye軍 2) Ye寔進 3) Ye寔進の息子 4) Ye寔進の孫...こんなに 4個でありますよね.
これは Ye寔進の 墓碑
これは Ye寔進の息子の 墓碑
これは Ye寔進の孫の 墓碑
Ye寔進の 兄 Ye軍の 墓碑 (こちらで 日本という文字が発見さ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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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まで明かされた事実>
1. Ye軍は 日本の 白村江 戦闘と無関係な人で, 日本と係わる一番(回)もないですね.
(彼が 唐の人になった後, 唯一に政治交渉のために日本を訪問した記録はある)
2. また, Ye軍は (日本言論の報道のように) 軍人ではないです. 彼は百済滅亡後
唐の代わりをしてその地域を治める管理だっただけ軍人という証拠はないです.
彼の名前(=Ye軍) のため彼を軍人と間違えた日本言論の報道は nonsenseです.
3. よって, あの 碑文の字 日本が 島国 Japanを意味するのか可否は疑問の余地があります.
日本の中堅学者が 碑文の字 日本が 島国 Japanを意味しないと言ったことは
文脈やすべての点で見てそうだという意味で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