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염 [金焰 ]
1910년 서울 출생
아버지 김필순 [金弼淳 ]은 한국 최초 면허 의사이며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19년 김필순 [金弼淳 ]은 병원을 열어 수입을 조선독립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였으며
조선 독립군 군의관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일본인 밀정에게 독살되었다
김염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빠졌다
1927년 상하이로 간 그는 쑨유 [孫瑜 ]감독에게 발탁되면서 부터 그가 제작한 여러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후 1930년대 영화 大路 들장미 장공만리[長空萬里 ]등 40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 황제 ]
라는 칭호를 받았다
1931년 도화읍혈기 [挑花泣血記 ]1932년 야초한화 [野草閑花 ]에 당시 최고 여배우
롼링위 [완령옥 [阮玲玉 ]]와 출연하면서 최고의 배우로 자리 잡았다
1936년 영화 장지릉운 [壯志凌雲 ]은 일본군이 점령했을 때 필름을 없애 버린 영화라고 한다
영화 野草閑花 에 롼링위[ 阮玲玉 ]와 함께 출연한 영화
김염[金焰 ]
상하이 영화 제작소 부주임
상하이 인민대표회 대표
중국영화 작가협회이사
마오쩌둥 [毛澤東 ]에 의해 국가 일급 배우로 임명되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 때 수용소에 들어가 어렵게 살았다
수용소에서 나오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3년 상하이에서 생을 마쳤다
ギムヨック [金焔 ]
1910年ソウル生まれ
お父さん金筆順 [金弼淳 ]は韓国最初兔許医者で独立運動家だ
1907年抗日秘密決死新民会に加入して活動してから
1911年 105人事件に掛かり合って中国に亡命した
中国に亡命する時家族と一緒に中国に向こう中国国籍を取得した
1919年金筆順 [金弼淳 ]は 病院を開いて 収入を 朝鮮独立のための基金で 使ったし
朝鮮独立軍軍医で活動した
1922年日本人密偵に毒殺された
ギムヨックはこんな難しさの中で苦学に高等学校を通って映画に耽った
1927年上海に行った彼はスンユ [孫瑜 ]監督に抜擢してから彼が製作したさまざまな
映画で主演を引き受けた
以後 1930年代映画 大路 のいばら長空万里[長空万里 ]など 40本の映画に出演して [映画皇帝 ]
という称号を受けた
1931年桃花泣血期 [挑花泣血記 ]1932年野草韓国火薬 [野草閑花 ]に当時最高女俳優
ルァンリングウィ [ワンリョングオック [阮玲玉 ]]と出演しながら 最高の俳優に落ち着いた
1936年映画ザングジルングウン [壮志凌雲 ]は日本軍が 占領した時フィルムをつぶしてしまった映画だと言う
映画 野草閑花 にルァンリングウィ[ 阮玲玉 ]と ともに出演した映画
ギムヨック[金焔 ]
上海映画製作所祝義
上海人民代表回代表
中国映画作家協会引っ越し
毛沢東 [毛沢東 ]によって国家日給俳優に任命されたが
1966年文化大革明の時収容所に入って行って難しく暮した
収容所から出て闘病生活をしてから
1983年上海で生を終え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