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綿製背甲)
면제배갑(綿製背甲) 또는 면갑(綿甲)은 무명을 여러 겹 겹쳐 만든 조선 말기의 갑옷
흥선대원군의 명령에 따라 김기두와 안윤 (또는 강윤)에 의해 고종 초 1867년에 발명되었고,[1][2]1871년 신미양요때 미국과 조선과의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개요
1866년 병인양요에서 프랑스와 전투를 치른 조선은 서양의 무력도발에 경각심을 갖게 되었고 앞으로의 도발에 준비하게 된다.
특히 서양 총의 우수함에 주목한 조선은 총기공격을 무력화 시키기기 위한 방도를 찾기 시작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서양의 총탄을 막아낼 갑옷을 제조하도록 명한다.
당시 무기제조자였던 김기두와 안윤 (또는 강윤)은 명령에 따라 면갑옷 과 철갑옷 등으로 실험을 거듭한 결과, 면 12겹에 총탄이 뚫리지 않음을 확인, 면 13겹으로 만든 면갑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 내게 된다.
병인양요 직후에 만들어진 이 면갑은 곧 조선병사에 배포 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때 실제로 효용성이 드러나게 된다. 이 갑옷은 실제 총탄을 막아내기는 하였으나, 한여름에 착용하기는 너무 더웠고, 또한 불에 약하여 쉽게 불타버리는 약점이 있었다.
1871년 여름, 강화도를 침공한 미군은 총알세례에도 용맹하게 달려드는 조선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적고 있으며, 대포 공격으로 파편에 맞아 불에 붙은 조선군을 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은 총알을 막아내는 갑옷의 존재에 당황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중 한 점을 포획해 미국으로 가져갔다. 최근까지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되어왔던 것이 세상에 알려져, 이 방탄조끼의 존재가 한국에 알려졌다
미국 박물관에 남아있는 실제 전투에서 쓰인 갑옷
한국 박물관의 갑옷
갑옷의 쉽게 입고 벗기 위해 왼쪽어깨를 잘라내서 열고 단추를 달았다.
무게 30~40kg 으로써 실제로 이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어떻게 전투를 했는지 의문일 정도
免除背甲(綿製背甲) または ミョンガブ(綿甲)は 無名を多くの重重なって作った 朝鮮 末期の よろい
興宣大院君の命令によって 金期もとアンユン (またはガングユン)によって 高宗 超 1867年に発明されたし,[1][2]1871年 辛未の役の時のアメリカと朝鮮との戦闘で使われた.
概要
1866年丙寅の役でフランソワ戦闘を支払った朝鮮は西洋の武力挑発に警戒心を持つようになったしこれからの挑発に準備するようになる.
特に西洋総意優秀さに注目した朝鮮は聡気攻撃を無力化シキギギのための方途を捜し始めたし, ここに興宣大院君は西洋の銃弾を受け止めるよろいを製造するように命ずる.
当時武器製造者だった金起頭とアンユン (またはガングユン)は命令に従ってミョンガブオッ科チォルガブオッなどで実験を繰り返えした結果, 面 12重に銃弾が抜けないことを確認, 面 13重で作ったミョンガブを世界最初に作り上げるようになる.
丙寅の役直後に作られたこのミョンガブはすなわち朝鮮兵士に配布になったし, 1871年辛未の役時実際に效用性が現われるようになる. このよろいは実際銃弾を受け止めることはしたが, 真夏に着することはとても暑かったし, また火に弱くて易しく燃えてしまう弱点があった.
1871年夏, 江華島を侵攻した米軍は弾洗礼にも勇猛に飛びかかる朝鮮軍に深い印象を受けたと書いているし, 大砲攻撃で破片にそう火に付いた朝鮮軍を見たりしたと言う.
当時米軍は弾を受け止めるよろいの存在に荒てたことと見えて, その重い点を捕獲してアメリカに持って行った. 最近までスミソニアン博物館に保管されて来たことが世に知られて, この防弾チョッキの存在が韓国に知られた
アメリカ博物館に残っている実際戦闘で使われたよろい
韓国博物館のよろい
よろいの易しく入庫脱ぎために左側肩を切り捨てて開いてボタンをつけた.
重さ 30‾40kg として実際で こんなに重いよろいを着てどんなに戦闘をしたのか疑問である位